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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주현절(2-1) - "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 / 이순태 목사

관리자 2019-01-10 (목) 18:11 5년전 3466  

본문) 이사야 11:10-13, 고린도전서 3:1-9, 마가복음 9:38-50

 

1. ① 이사야는 주전 8세기 말,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에서 활동한 예언자이다. 그 무렵 앗수르 제국은 점차 세력을 확장하였는데, 그러다보니 지중해 동쪽 연안의 작은 나라들과 함께 유다도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여러 나라들이 앗수르의 확장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고, 수리아와 북이스라엘은 남유다를 반 앗수르 동맹에 가담시키려 하였다. 그런데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은 쓸데없이 동맹에 끼어들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면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다 임금은 반앗수르 동맹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앗수르의 도움을 요청하였는데, 그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 남유다는 앗수르의 손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②이런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놀라운 약속을 이사야를 통해서 주셨다. 그것은 메시야를 보내신다는 것이다. 메시야는 이사야 11:1절에서 “이새의 뿌리”에서 나오는 한 싹으로 묘사되고 있다. 즉 오실 메시야는 단순히 다윗의 계보 중 하나가 아니라,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다. 이것은 메시야가 “또 다른 다윗”임을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강대국과 우상에 오염된 다윗 왕조를 심판하신 후, 메시야를 통해서 새로운 나라를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메시야가 오셔서 하실 일은 무엇인가? 오늘 이사야 본문에는 두 가지가 서술되어 있다. 하나는 열방을 모으는 일이다. 즉 메시야의 구원 사역에 이방인들을 포함시키는 것이다(사 11:10). 다른 하나는 오랜 경쟁과 갈등 관계에 있던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에브라임)의 갈등을 끝내고 화해를 이룩하는 것이다(사 11:13). 즉 메시야는 유대인과 이방인, 남과 북의 갈등을 없애고 세상에 참된 평화와 화해를 안겨다 주신다는 것이다. 

 

2. 그러면 이새의 뿌리에서 나온 싹, 메시야는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이시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제자들을 모으시고 하나님의 나라 운동을 펼치셨다. 오늘 마가복음의 말씀은 그런 과정에서 벌어진 한 해프닝을 다루고 있다. 

  ① 어느 날 요한이 예수님을 찾아와 말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요한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을 자신이 하였노라고 예수님께 보고를 한 것이다. 요한의 생각으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권세는 오직 12제자들에게만 주어진 배타적 권위였다. 당시 예수님을 대적하던 자들은 예수님더러 바알세불이 지폈다, 사탄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낸다며 비난하였다. 그런데 이런 적대자들과는 달리,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았다면 그는 적어도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요한은 귀신축출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앞의 사건들과 대조를 이룬다.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열두 제자들은 귀신들린 소년을 고치지 못하였다(막 9:17-18). 어디 그뿐인가? 제자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를 가지고 서로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 곁에서 생활하고 그분의 말씀을 날마다 들었지만, 정작 그들의 마음은 주님의 마음을 따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한 익명의 제자에게 화살을 돌리면서, 자기들의 특권에 집착하는 편협한 속내를 드러내었다. 

  ② 이런 요한의 보고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는가? “금하지 말라.” 그러시면서 마가복음 9장 40절에서 이렇게 덧붙이신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게다가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일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에게 물 한 잔 주는 일도 주님은 귀하게 인정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선행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헌신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님 당시 그리스도인은 회피의 대상이었지 환영의 대상은 아니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람인 것을 알고도 도와주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했다. 결국 예수를 비방하고 왜곡하는 상황에서 예수의 이름을 주술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고, 사람 살리는데 사용하는 자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는 것, 그런 화목함을 주님은 소중히 여기신 것이다. 

  한분 예수님을 믿더라도, 사람들마다 조금씩 신앙 양태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나와 다른 예식으로, 나와 다른 패턴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이에 대해 주님의 제자들은 마음을 열어야 한다. 주님이 좋으시다면 우리의 익숙한 편견이나 선입견 내려놓고, 나와 다른 자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주님의 방식대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일꾼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뜻이 가장 중요하다. 주님이 원하시면 우리는 다만 아멘! 하며 나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3. 이사야에 예언된 메시야의 사역은 화목이었다. 메시야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몸된 교회 역시 화목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교회 현실을 보면 자주 그렇지 못하다. 교회 내에서도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파벌을 조성하고, 자기 집단에 들어오지 않은 자들이라면 폄하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고린도교회에서 그런 모습을 보게 된다. 

  ① 고린도전서 3:1절에서 사도 바울은 교인들을 두 유형으로 나눈다. 하나는 신령한 자들, 다른 하나는 육신에 속한 자들이다. 육신에 속한 자들에 대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이라는 표현을 추가하기도 한다. 여기서 ‘육신에 속한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 역시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른이 될 만한 시기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어린 아이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떼를 쓰고, 오직 나만을 위해 무엇이든 해달라고, 나만 바라봐! 하며 조른다. 철저히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간다. 바로 이런 자들이 육신에 속한 자들이요, 어린 아이들이다. 

  물론 예수를 믿는다고 곧장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다. 영적인 성장에는 단계가 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처음 전할 때 고린도전서 3:2절에 의하면, 젖으로 먹였다고 말한다. 즉 아직 단단한 음식을 먹을 때가 아니라서, 복음의 핵심을 전하면서도 그것을 부드럽게 해서 먹였다는 것이다. 그런지 이제 5년이 흘렀다. 그렇다면 젖을 떼고 밥을 먹어야 하는데, 아직도 갓난 아이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다. 

  그러면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들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와 같다 라고 평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교인 숫자가 적어서인가? 아니다. 개척한지 5년이나 되었는데 변변한 교회 건물 하나 없어서 그런가? 그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고린도 교회들을 질책하면서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라고,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고 했을까?

  ② 고린도 교인들은 나름대로 탁월한 면을 지니고 있었다. 고린도전서 1:5절을 보면, 그들은 모든 언변과 지식에 풍족하였다. 즉 말을 참 조리 있게 잘 하고, 지식에 있어서 해박하다는 것이다. 고전 1:6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증거가 견고하였다. 즉 확실히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1:7절을 보면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다. 복음의 말씀을 조리 있게 설명할 줄 알고, 철학이나 수사학에 관한 지식도 높은 수준이었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도 확실하다.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다양한 은사들을 지니고 있었다. 여러분, 이 정도 되는 교인이라면 그야말로 A급이 아닐까? 그런데 바울은 그들을 젖 먹는 어린이라고 부르고 있다. 도대체 그 교인들의 모습이 어떠하길래 그럴까?

  ③ 교회 안에 시기와 분쟁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3:3절에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지적하였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다.” 어느 누가 교회에 열심을 내어 헌신을 하면, 그를 칭찬하고 격려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고린도 교회에서는 어느 누가 특별히 열심을 내고 잘하면, 칭찬은 고사하고 깎아내리려 하였다. 또 어느 누가 다른 누구를 칭찬할 때도 그 칭찬을 수용할 수가 없었다. 자기와 같은 라인이 아니면, 잘 했어도 잘 했다는 말은 안하고, 오히려 평가절하하려는 심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들의 구체적인 행태에 대해 고린도전서 3:4절에서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그 안에 파벌이 있다! 어떤 이들은 바울이 최고다, 어떤 이는 아볼로가 최고다 하면서 서로 당을 짓는 것이다. 교회가 무엇인가? 믿음의 어린아이를 낳고 그 아이를 양육해서 성숙하게 만드는 곳이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도 커야 할 어린 아이가 크지 않으면, 이것은 큰 문제이다. 종종 이런 사람은 교회를 비난하면서 다른 교회로 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다른 교회로 간다고 해서 미성숙한 신앙이 갑자기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기간까지 그 미성숙이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자리의 이동이 아니라, 변화되고 자라나는 것이다. 그래야 교회가 성숙한 교회가 될 수 있다. 

  그런데 교회의 성숙도는 교회 나이가 몇 살이냐, 몇 명이 모이느냐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고린도전도 13장, 일명 ‘사랑 장’이라 불리는 곳에서 이런 말씀이 나온다. “내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벗었다.” 누가 성숙한 교인인가? 시기와 분쟁을 극복하고 서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④ 그러면 파벌로 인한 시기와 분쟁을 바울은 어떻게 해결하려고 하는가? 먼저 바울은 고린도전서 3:5절에서 두 개의 수사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아볼로가 무엇이냐?” “바울이 무엇이냐?” 이것은 교회 사역자들의 역할에 관한 질문이다. 그 답변은 무엇인가?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교회 사역자들은 주님의 복음을 전하여 예수를 믿게 하는 자들이다. 교회 사역자들은 주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그것에 걸맞는 임무를 수행하는 하나님의 도구이다. 

  바울은 심는 일을 하였고, 아볼로는 물을 주는 일을 하였다. 바울은 돌아다니면서 교회를 개척하는 선교사였다. 그는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교회가 세워졌다 싶으면 그 지역에 적절한 리더를 선정하여 맡기고 자신은 다른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바울은 대중을 모아 놓고 웃겼다 울렸다 하는 능숙한 강사는 못되었다. 실제로 그의 글은 탁월하지만, 정작 글을 통해서 바울에 대한 기대를 품은 자들이 바울을 만나고 나서 실망한 경우도 있었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바울은 말도 어눌하고, 외모도 형편없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아볼로는 초대교회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지도자였다. 사도행전을 보면 아볼로는 성경에 해박한 자로서 탁월한 성경교사였다. 그러다보니 어떤 교인들은 아볼로를 통해서 은혜를 받은 후, 아볼로가 최고라고 생각하였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은 그래도 우리 교회는 바울이 세웠기 때문에 바울이 최고!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지도자들은 가만히 있는데, 정작 그 추종자들이 자꾸 파를 만들어 교회에 분열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둘 중 누가 최고냐가 아니다. 아무리 인간이 심고 물을 주어도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시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아무리 사역자들이 애쓰고 수고하여도,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도구일 뿐이고, 결국엔 하나님이 이루신다. 우리들은 받은 은혜에 감사하면서 오직 기도하고 사랑으로 헌신할 뿐이다. 

  고린도전서 3:9절은 말씀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모든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다. 밭이 풍성한 소산을 내고, 집이 아름답기 위해선 그것을 이루는 우리 모두가 주님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 

 

4. 마가복음 9:50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우리마음에 소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소금은 부패를 방지하여 오래 가게 한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 바치는 모든 제물에 소금을 치도록 하였다. 또한 소금은 맛을 내는 기능을 한다. 제자들은 제자들의 맛을 내야 한다. 누가 크냐, 서열을 놓고 싸우기 보다는 섬김의 맛을 내야 한다. 그럴 때 교회는 화목의 공동체가 될 수 있고, 또한 세상에서 화목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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