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61:1-9, 행 4:5-12, 눅 4:16-30
1) 해외선교주일
2월 첫 주일입니다. 포근해진 날씨를 통해서 새 봄이 다가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오늘이 입춘입니다.
오늘은 총회가 제정한 해외선교주일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라하신 예수님의 분부를 받들고 세계 곳곳에 나아가 고생하며 애쓰는 선교사님들을 위해 기도하고, 저들의 헌신적인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널리 펼쳐져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지기를 위해 마음을 모아 기도합시다.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품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많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이 땅에 들어와 우리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님들의 수고와 헌신의 덕인 것을 깨닫고 우리도 이 복음의 빚을 갚기 위해 더욱 열심히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해외선교주일을 맞아 먼저 우리나라 사람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헐버트 선교사 이야기를 먼저 드리겠습니다.
헐버트 선교사는 미국 유니온 신학교를 졸업하고, 1886년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일제가 우리나라를 침탈하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서재필 박사가 창간한 독립신문의 영문판 발행에 협력하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는 고종 황제를 도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일제의 침탈을 규탄하는 고종의 친서를 전달하려 했으나 실패하고도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리는 세계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하여 일제 침탈의 만행을 알리도록 고종에게 진언하여 자신도 함께하여 고종의 밀사들을 도왔습니다. 또 헐버트 선교사는 우리글 한글의 우수성을 알고 서양식 문장부호 곧 쉼표, 마침표 등을 한글에 도입하도록 해서 한글보급에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헐버트 선교사는 정치문제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미국 선교부의 소환을 받아 헤이그 밀사 사건 이후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글들을 계속 써가며 한국을 도왔습니다. 해방 이후 1949년 한국정부의 초청으로 광복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한국에 올 때 고령의 나이인 것을 염려하는 미국 신문의 인터뷰에서 “나는 웨스트민스터 시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에 묻히기를 원한다.”는 말을 하고 한국에 돌아와 도착한지 1주일만인 1949년 8월 5일 긴 배 여행의 피로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 후 그의 소원대로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었고, 1950년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을 추서(追敍) 받았으며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선교사>로 선정되었고, 2014년에는 한글 표기에 기여한 공로로 금관문화 훈장을 또 추서 받았습니다. 헐버트 선교사에 대해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 이후 일본 경찰의 조사를 받으며 “한국인이라면 헐버트 선교사를 하루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정도로 한국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선교사로서의 임무를 잘 수행했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있었지만 특별히 오늘 헐버트 선교사를 소개하는 것은 그가 우리나라가 일제의 억압을 부당하게 받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한국 사람보다 더한 열정으로 일제의 압제에서 해방받기를 위해 헌신하며 복음을 증거한 선교사이기 때문에 남다른 점이 있어서 소개한 것입니다.
2)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실 메시야의 오심을 전한 이사야
이사야서 61장은 제 3이사야의 글로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의 귀환공동체가 예루살렘 재건이 지지부진하고 힘들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보내 이스라엘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 말씀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아직도 페르시아 제국의 지배 아래 놓인 이스라엘의 회복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선포하기 위해 하나님이 기름을 부어주셨다고 외치며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1-2절)하게 하신다고 외쳤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훗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구원의 복음을 비춰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은혜의 해”라는 말씀에 주목해야합니다. 이는 모든 억압이 사라지고 해방이 선포되는 ‘희년(禧年)’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 곳곳에 이는 명백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희년에 관한 규정을 이미 율법에 명시해 주셨습니다. 레위기 25장에 나타난 희년법입니다.
희년은 두 가지 제도가 핵심입니다. 먼저는 토지를 무르는 일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토지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든 희년이 되면 토지는 원소유자나 그 자손에게로 되돌려 주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제도를 두신 것은 모든 경제 행위의 기반이 되는 생산수단의 집중 현상을 막고 부가 편중되지 않도록 해서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한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집에 종으로 팔려간 사람들에게 희년이 되면 자유를 주도록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기를 원하셨는데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차별하고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억압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희년법을 통해 영구히 다른 사람의 집에 종이 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도록 하셨습니다. 희년이 되면 희년 나팔(요벨) 소리와 함께 모든 종들은 자유를 얻고 자신들의 토지를 되찾아 자유롭고 평등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희년법은 가난한 사람들을 비롯한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희년법은 구약 시대에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희년이 완벽하게 시행되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 욕심 탓이라고 봅니다. 자기 수중에 들어온 토지나 오랫동안 집에서 부리던 종을 희년이 되었다고 해서 자유를 주어 돌려보내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온전한 희년의 성취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했고, 오늘 복음서의 말씀 누가복음 4장은 이를 잘 보여줍니다.
3) 예수님의 메시아 선포와 이를 거부한 고향 나사렛 사람들
누가복음 4장 말씀은 예수님이 어려서 자라나신 고향 나사렛회당을 방문했을 때 일어난 사실을 알려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통 ‘메시아 취임사’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고향을 방문하셔서 나사렛회당에 가셔서 예배를 드리시게 되었습니다. 고향 사람들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을 비롯한 갈릴리 여러 곳에서 많은 기적을 행하신 사실들을 소문을 통해서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예배에 참석하셔서 관례대로 예배 시간에 성경을 읽기 위해 앞에 서셔서 회당장이 건네주는 이사야 두루마리를 받아 61장에 있는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하는 오늘 구약 본문 이사야 61장 1-2절에 있는 말씀을 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 선지자의 그 예언이 자신을 통해서 성취되었음을 고향 사람들 앞에서 밝히셨습니다. 이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반발이 컸습니다. 저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고대하며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아니라 단순히 목수 요셉의 아들로만 예수님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저들은 자신의 상식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그 동네에서 내쫒았습니다.
4) 질병에서 자유하게 된 사람과 예루살렘 기득권자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후 성령을 체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인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담대하게 예루살렘 거리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에게 참 된 자유를 주셨음을 선포했습니다. 나아가 질병에 얽매어 고통 받는 자들을 자유하게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던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하여 자유하게 했습니다. 병에서 억눌린 그에게 참 된 희년이 온 것입니다.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차별과 따가운 시선을 받던 그가 참된 자유를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를 억압했던 장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일 후에 제자들은 예루살렘 거리에 뛰어 나가서 ‘바로 이 사람을 고쳐주신 분은 바로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그 예수라’고 하며 당당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루살렘 기득권자들은 당황했습니다. 저들은 자유와 해방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자신들이 누리는 기득권을 위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께서 그 사람을 구원하셨다는 제자들의 선교를 가로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0,12)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선언했습니다.
5) 맺음
예수님은 바로 우리들을 죄와 사망에 억눌린 모든 사람들을 자유하게 하시는 곧 해방과 자유의 복음을 통해서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핵심은 바로 모든 억압에서 해방을 얻어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물론 이 자유는 영적인 억눌림에서만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회적 불의와 억압의 구조에서 해방되는 것들을 포함하는 전인적(全人的)이고 총체적(總體的)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교’를 지향합니다. 이는 단순하게 교회의 확장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나라의 성취를 지향합니다.
헐버트 선교사가 단순히 교회의 확장이 아닌 일제의 억압을 받는 나라를 해방시키려했던 사실을 해외 선교주일인 오늘 우리가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온 세계 모든 곳에서 그리스도의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위해 우리 모두의 온 힘을 다 쏟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해방과 구원의 복음을 들고 하나님의 구원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멈추지 말고 5대양 6대주 곧 땅 끝까지 달려 나아갑시다. 하나님나라가 오고 있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