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겔 37:15~23, 엡 2:11~22, 마 12:22~32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고대 소아시아 프리기아 왕국의 전설에서 유래한 말이지요. 프리기아에는 ‘테르미소스에 우마차를 타고 오는 자가 왕이 될 것’이라는 신탁이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시골 농부였던 고르디우스가 아들 미다스와 함께 우마차를 타고 테르니소스 성에 들어갔지요. 그걸 본 사람들은 신탁이 이루어졌다고 기뻐하면서 고르디우스를 맞이했습니다. 고르디우스는 프리기아의 왕이 되었고, 그의 아들 미다스가 왕위를 이어받았지요. 그런데 이 우마차가 문제였습니다. 또 다른 어떤 자가 우마차를 타고 들어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미다스는 마차를 신전 기둥에 단단히 묶어버렸습니다. 그 누구도 풀 수 없도록 복잡하게 묶었지요. 이게 바로 ‘고르디우스의 매듭’입니다. 이후로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도저히 풀 수 없는 난제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고르디우스의 매듭이 있다면 그게 무엇일까요? 우리가 풀어야 할, 그러나 정말 풀기 어려운 문제가 무엇입니까? 많은 문제가 있겠지만, 아마 그중에서도 극도의 분열, 분단이 아닐까요? 우리는 새해를 시작하자마자 부산에서 야당 대표가 피습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송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도 참 비루한 시비가 끊이지 않았지요. 이 과정에서 드러난 우리의 정치 현실은 어땠습니까? 극단의 적대와 혐오의 정치 그 자체가 아니었습니까? 이 혐오의 정치는 우리 사회 전체를 분열시키는 거대한 벽을 보여주었습니다. 사회는 그렇다 치고, 종교는 또 어떨까요? 그래도 예전에는 ‘보수’라는 종교인들이 (뒤에서는 별짓을 다 해도 적어도 앞에서는) 종교가 정치에 참여하면 안 된다고, 사람은 누구나 권력에 복종하라 했다면서 로마서를 들먹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예 내놓고 정치와 교잡합니다. 정확하게는 권력과 야합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기독교 불교 할 것 없이 보수 종교는 극한의 혐오와 적대를 부추기고 있습니다. 이참에 사이비 교주들은 자기들이 권력 창출의 주역이라며 다시 깃발을 들고 광장과 길거리로 쏟아져 나옵니다. 이렇게 정치와 종교가 교잡하면서 신념과 신앙이 뒤섞이고, 사람들은 지독한 ‘확증편향’에 빠져버렸습니다. 확증편향, 한번 묶이면 아무도 풀 수 없는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묶여버린 것입니다. 이 난제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에서 예수님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부딪힌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고 일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일,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그 고통으로부터 풀어주는 일이었지요. 사람이 마땅히 사람답게 살도록 돕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아파하는 사람과 함께 아파하고 위로하고 힘을 주는 일은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지요.
오늘 본문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께 한 사람을 데려왔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귀신이 들려서 눈이 멀고 말을 하지 못합니다. 고통당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의 주민등록 번호를 물어야 할까요? 그의 출신지를 따져야 할까요? 그가 신용불량자가 아닌지 조회해야 할까요? 그가 기독교인인지, 아니면 교회 나오겠다고 서약이라도 했는지 확인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냥 그를 고쳐주셨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말을 하게 되고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다. 고통당하는 한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났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놀라서,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았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율법대로, 말씀대로 산다는 자들입니다. 성전 제사를 빠뜨리지 않고, 안식일 성수도 하고, 십일조에 감사에 특별 헌금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웃도 뜨겁게 사랑한다고 자랑하는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귀신 들린 사람을 풀어주시는 것을 보고 어떻게 생각했겠습니까? 감사했겠지요. 그 고통당하던 사람이 나았으니 마땅히 하나님을 찬미했겠지요? 그런데 아닙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귀신의 두목 바알세불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무슨 말입니까? 귀신의 일이랍니다. 그들은 눈앞에서 고통당하는 사람이 귀신에게서 풀려난 것을 보고도, 오히려 예수님이 귀신의 두목이라고, 빨갱이가 분명하다고, 귀신이 쫓겨난 것이 그 확실한 증거라고, 거꾸로 뒤집어서 덮어씌웠습니다.
참으로 지독한 ‘확증편향’ 아닙니까? 내편 네편 가르는 잘못된 신념이 신앙으로 굳어지면 이렇게 되고 맙니다. 정말 확증편향(독선과 맹신)에 빠지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일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지독한 자부심, 자기들만은 특별하다고, 자기들은 선민 중에서도 가장 특별하게 구별되었다고 맹신, 나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독선, 그 확증편향은 결국 하나님을 거부하는 데까지 이르고 맙니다. 그리스도를 바알세불의 간첩이라고 기소하고야 맙니다. ‘하나님도 까불지 말라’고 하늘을 향해 삿대질하는 것이지요. 이 바리새파 사람들이 차라리 불신자들이었다면, 그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사탄이 사탄을 쫓아냈다는 말이냐?” 예수님께서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의 생각처럼, 예수님이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냈다면, 사탄이 사탄을 쫓아냈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결국 사탄의 나라가 망하고 말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렇다면 사탄이 자폭한다는 말이 되지요. 바리새파 사람들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돌아보라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그 바리새파 사람 중에서도 귀신을 쫓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또 누구의 힘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겠습니까? 악한 귀신을 쫓아내는 것, 사탄을 몰아내는 일은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이다, 그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고통으로부터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렇게까지 말씀하셨으니, 이제 바리새파 사람들도 좀 알아들었을까요? 그들의 멀었던 눈이 뜨이고 먹었던 귀가 열려서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었을까요? 그들의 확증편향이, 그 지독한 독선에 좀 균열이 생겼을까요?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무슨 죄를 짓든지, 무슨 신성모독적인 말을 하든지, 그들은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 무슨 죄도, 심지어 신성모독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신성모독 죄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 아닙니까? 세상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 엄청난 죄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죄, 한 사람을 고통으로부터 풀어주시는 성령을 훼방하는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뒤 32절에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겠으나,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인자를 거슬러 말하는 것, 곧 예수님을 거슬러 말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성령을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오는 세상에서도, 용서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말 놀랍고 또 놀라운, 두려운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 그것도 참으시겠답니다. 예수님을 거스르는 것, 그것도 참아 주시겠답니다. 그러나 도무지 해서는 안 되는 것, 그 누구도 넘어서면 안 되는 선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모독하고 성령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서도 성부와 성자보다 성령이 최고라는 말일까요? 그래서 성부를 모독하고 성자를 거슬러도 괜찮지만, 성령만은 절대 신성불가침이라는 말이겠습니까? 아니지요. 그게 아닙니다. 이 말씀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그 무슨 계급이 있다는 황당무계한 얘기가 결코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한 사람을 고통으로부터 구하는 그 일, 그 일이 그토록 귀하고 그토록 거룩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일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고통받는 그 한 사람은 바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주신 사람이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사람입니다. 무엇보다 그 한 사람은 성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몸을 찢고 피를 흘려서, 목숨을 바쳐서 구하신 그 사람입니다. 그 한 사람을 구하는 일은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 일을 모독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일을 훼방해서는 안 됩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오늘 우리는 에스겔서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특별히 37장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시는 약속/환상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흩어진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시 일으키실까요? 그들에게 새 영을 넣어주심으로써 그들을 다시 살리십니다. 하나님의 영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죽어 흩어진 백성을 다시 일으켜 살리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앞(37:1-14)에는 골짜기에 흩어진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나는 환상이 나옵니다. 골짜기에 흩어져 버린, 이미 말라버린 뼈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납니까? 하나님의 바람이, 하나님의 영이 마른 뼈들 위로 불어오지요. 그러자 뼈가 이어지고 힘줄이 생기고 살이 차오르고 살갗이 덮입니다. 그러나 아직 다 살아난 게 아닙니다. 사방에서 불어온 영이 그들 속으로 들어가자, 마침내 그들은 다시 살아서 일어났습니다. 마른 뼈들이 다시 살아 일어나 군대가 되었습니다.
이제 이것으로 이스라엘은 완전하게 살아난 것일까요? 이것으로 하나님의 영의 역사는 완성된 것일까요? 아니지요. 아직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온전하게 살아나기 위해서는 그들을 패망으로 이끈 그것, 이스라엘을 죽게 만든 그 매듭을 풀어야 합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분열, 분단입니다. 남과 북을 가르는 지독한 혐오와 적대감이지요. 서로 가르고 서로 찌르고, 서로 공격하고 포탄을 쏘아대고 핵무기로 위협하는 그 지독한 분단, 그 끔찍한 확증편향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 사람아, 너는 막대기 하나를 가져다가 그 위에 ‘유다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자손’이라고 써라. 막대기를 또 하나 가져다가 그 위에 ‘에브라임의 막대기 곧 요셉 및 그와 연합한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고 써라. 그리고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게, 그 막대기를 서로 연결시켜라. 그것들이 네 손에서 하나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은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로 분단되어 있었습니다. 남북은 서로 적대하고 혐오하며 싸웠지요. 서로 죽이기 위해서 주변 강대국을 끌어들였습니다. 그들을 노예로 억압했던 이집트도 끌어들이고 끊임없이 약탈하려 노리는 아시리아도 끌어들였습니다. 그 제국들과 함께 온갖 우상과 잡귀와 주술이 들어오고, 독주와 마약도 들어왔지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의 백성은 온갖 더러운 우상과 역겨운 것으로 더럽혀지고, 서로 배타하고 혐오하고 적대하며 분열되었고, 마침내 그들이 보호자라 생각했던 제국의 침략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은 무너져 황무지가 되고, 백성들은 다시 바빌론의 노예로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렇게 흩어진 이스라엘을 다시 살리려면,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그 지독한 혐오와 적대감을 버리고, 그 참담한 분열과 분단을 극복하고,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러진 두 막대기가 하나가 되도록 이어야 합니다. 남과 북이 그렇게 다시 연결되어서 하나가 되면, 하나님께서 다시 평화의 언약을 세우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그렇게 하나가 되게 하시고, 화해하게 하시는 평화의 영이십니다.
지난 연초에 영월의 한 식당에서 밥을 먹던 손님 하나가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멀리서 밥 먹던 어떤 여자가 뛰어오고, 어떤 남자도 뛰어오고, 사람들이 모두 뛰어왔습니다. 그중에 한 여자가 그 남자를 살피고는, 바닥에 눕히고 가슴을 누르며 심폐소생술을 했습니다. 다른 어떤 사람은 119로 전화하고, 여자가 힘이 들면 다른 남자가 교대하고, 그렇게 식당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숟가락을 놓고 달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 사람들이 한 사람을 살려냈습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그 사람들 생면부지인데 왜 모두 그렇게 달려든 걸까요? 그 여자는 누가 시켜서 모르는 남정네 가슴을 눌러댄 걸까요? 아마 그 사람들에게 왜 그랬느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누가 시킨 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달려간 것입니다. 그냥 무언가 내 속에 있는 그 무엇이 그냥 달려가게 한 것이지요. 이 내 안에 있는 그 무엇, 나를 일으켜서 숟가락을 내던지고 달려가게 한 그것, 그게 뭘까요? 그것이 바로 마음이요, 그것이 바로 영 아닐까요? 그렇지요. 그게 사람이고 그게 영입니다. 그 ‘생명의 영’으로 그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순간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성령이 하시는 일이 바로 그런 일 아닐까요? 성령이 내리면 작두를 타고 마약에 취한 듯 환각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은 사람이 마땅히 사람답게 살도록 돕는 영입니다. 무엇보다 성서가 말하는 성령의 일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요, ‘평화를 이루는 일’입니다. 성령은 고통당하는 사람을 풀어주고 죽은 백성을 다시 일으키십니다. 성령은 모든 갈라진 것들을 이어 하나가 되게 하고 평화를 이루게 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께서 우리를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하신다고 말했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극한으로 분열되고 분단된 세상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반도는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분단국이 아닙니까? 나라와 나라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분열만이 아니라 온 생명이 진통하며 신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분열과 분단의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어떻게 생명을 살리고 어떻게 평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독선과 맹신을 벗어나야 합니다. 눈을 떠서 성령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성령이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육이 아니라 영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야 합니다. 무엇이 생명을 살리는 일인지, 어떻게 평화를 이루어가야 하는지, 생각하고 성찰해야 합니다. 마음을 모아 기도하며,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하나 실천해 가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지키시고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성령께서, 우리가 함께 생명과 평화의 길로 걸어가도록,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