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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현절(2-1) - " 벽을 허물라 " / 이병일 목사 > 주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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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주현절(2-1) - " 벽을 허물라 " / 이병일 목사

관리자 2024-01-09 (화) 09:50 11개월전 577  

본문) 겔 37:15~23; 엡 2:11~22; 마 12:22~32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며, 그 삶의 모습이나 생각은 저마다 다릅니다. 그 다름의 정도도 제각각입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생물학적으로나 정치경제적으로나 상반되는 관계도 있습니다. 성의 다름으로 인한 관계는 인간의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역할이나 지위에서 차이와 차별이 있었습니다. 또한 신분이나 빈부로 인하여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차별이 심각하게 드러나기도 하였습니다. 한 공동체 안에서도 이러한 차이로 인하여 갈등과 대립이 노골적으로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멀리 있으면서 결코 하나 될 수 없을 것 같은 예가 바로 유대인과 이방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종교적 전통과 신념에 의해 분리된 사람들의 모습, 육체적 증표에 의해 구별된 사람들의 모습, 정치적 권력에 의해 차별하고 차별받아온 사람들의 모습이 그 속에 있습니다. 

지리적으로는 가까이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던 그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안에서 자기의 피로써 가까이 갈 수 있게 하였으며, 증오와 분단의 벽을 자기의 육체로 깨뜨려서 양쪽을 하나 되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을 바쳐서 둘을 새로운 사람, 한 몸으로 만들어 하느님과 화해하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본문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 될 수 있는 지를 보여줍니다. 그 방법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예로써 십자가는 가로를 잇고 세로를 잇는 모양입니다. 이 모양에서 하느님과 사람의 수직적인 관계와 사람과 사람의 수평적인 관계를 잇고 화해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도식적인 설명을 접고서 조금 진지한 물음을 던져봅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어떻게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의 증오와 분단의 벽을 허물었을까요?’ ‘어떤 사람의 죽음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화해시켜 하나 될 수 있게 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물음은 우리를 혼란스럽게도 하지만, 그 물음의 실마리를 찾았을 때에는 긴 터널의 끝에서 다가오는 빛처럼 우리의 마음을 맑게 만듭니다. 그 실마리를 본문에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써”라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 되어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하느님이 화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 또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그러려니 하겠지만, 의문을 품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추상적으로 들립니다. 추상적이고 논리와 이론을 구체적 현실로 나타내는 것은 삶과 사건입니다. 


한 사람의 죽음의 의미는 그 사람의 삶에 의해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어떻게 살았느냐는 그 사람의 죽음과 죽음 이후 남겨진 모습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자기 안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을 품으려는 활동이 없었다면, 십자가에서 양쪽을 하나 되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자기의 살과 피를 내어줌으로써 “증오와 분단의 벽”을 허물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생활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남이 아니라 하느님의 가족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한 가족이 된 사람들은 어떠한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서로에게 용기를 주면서 같은 방향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써” 생명의 양식을 삼는 사람들은 생명을 먹고 그 생명을 대신하여 살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생명 살림의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을 화해시키는 것은 더 나아가 사람과 하느님을 화해시키는 일입니다. 사람 사이의 장벽은 사람과 하느님을 갈라놓고, 사람들의 화해와 하나 됨은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과 결과는 평화입니다. 평화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를 위해서 증오와 분단의 벽을 허물고 양쪽을 하나로 만들어 함께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하였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연합이 아니라 하나 되어 평화를 위하여 연대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양극단으로 치닫도록 부추기는 세력에 의하여 휘둘리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궁지에 몰린 수구적인 정치세력과 언론재벌들은 아무 그림에나 빨간 색을 칠하면서 빨간 색은 해로운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호도합니다. 작은 틈만 있으면 쐐기를 박아서 더 큰 균열을 만들어 사람들을 빠지게 합니다. 기회만 있으면 증오와 분단의 벽을 쌓아서 자기의 알량한 자존심과 권력을 유지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입에 담지도 못할 욕을 하며 협박하는 증오의 벽, 오래된 관습에 얽매여 살아 있는 사람들을 편 가르는 분단의 벽을 깨뜨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입니다. 


예수님은 분단의 벽을 허물기 위해서 때로는 반대하는 세력을 철저하게 거부하기도 하십니다. 귀신의 왕과 바알세불은 사탄을 뜻하는 완곡어법입니다. 바알세불은 주인이라는 의미의 바알과 사당이라는 의미의 세불의 합성어이며, 신들이 거주했던 사당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오물의 주’, ‘주거의 주’ 등을 나타냅니다. 구약시대 블레셋의 도성 에그론에서 섬기던 바알세불, 열왕기하 1:2에 언급된 블레셋 사람의 우상신 바알세불과 동일시됩니다. 아히시야가 병들었을 때 자기 병이 나을 것인지를 알아보려고 바알세불에게 사신을 보낸 것으로 엘리야는 그를 책망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에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바알세불의 하수인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사회에서 개인은 언제나 규격품처럼 집단의 정체성에 따라 이해되었기 때문에, 특정 집단의 특성들이 개인에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닙니다. 바알세불에 신접하여 그의 힘을 행사한다는 것은 사회 질서를 일탈한 자에게 붙는 최악의 꼬리표였습니다. 일단 그렇게 꼬리표가 붙고 나면, 그 이미지를 벗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빨갱이’ ‘종북좌파’ ‘카르텔’ ‘공사전체주의’란 꼬리표)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수가 행한 일들을 보았고, 죽음의 세력에 억눌려 고통받던 많은 사람들을 죄악으로부터 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내쫓는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활동이 자신의 권위를 침해한다는 생각에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자신과 다르거나 반대되는 모든 것들은 사탄(귀신)입니다. “나의 것과 다르면 모두 사탄이고, 우상이고, 적이다?”

예수님의 대답에서 비유된 나라와 집은 각각 다윗의 나라와 예루살렘 성전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나라와 그 나라의 중심에 있는 집은 사탄의 지배에 대한 상징어인 것입니다. 바로 유대왕국과 예루살렘 성전이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정치적, 종교적 지배자들이 바로 사탄이고 바알세불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로 예수님은 스스로를 방어하면서 동시에 비난하는 사람들을 공격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예수님을 비난했던 말을 그대로 받아서 그들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분열과 힘의 논리입니다. 함께 살아야 하는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평화롭게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싸움으로 내몰고 있는 것이 그들의 본질입니다. 분열을 조장하고 싸움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바로 사탄이요, 바알세불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을 상생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갈라져서 갈등하고 싸우게 하는 정책을 만들고 무리하게 추진하는 세력이 사탄이고 그들의 우두머리(두목)가 바알세불입니다.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내쫓는 예수님의 활동은 귀신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며, 구조와 제도를 깨뜨리고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은 바알세불의 역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능력의 놀라운 구현이고 진정한 인간 해방을 위한 거룩한 영의 활동입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예수님의 활동의 본질은 사탄을 결박하고 그의 집을 약탈하고 점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활동의 핵심은 분열과 힘의 논리를 무력화시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탄(바알세불)의 관계는 숙명적으로 적대관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은 사탄의 집을 뚫고 들어가 그를 결박하고 그에게 억눌린 인간을 해방시킵니다. 예수님은 사탄에게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을 결박하고 그 재산을 빼앗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사탄에게 결박된 인간을 놓아주기 위함이며, 모든 사탄적 굴레로부터 인간을 해방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들이 짓는 모든 죄와 그들이 하는 어떤 비방도 용서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하고, 영원한 죄에 매인다.” 이 말씀은 의도적으로 사악한 마음을 품고 예수님을 모함하고, 하느님 나라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대한 심판과 저주의 말씀입니다. 

자기의 자리와 지식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음해하고 거룩한 영의 활동을 모독하는 것, 즉 예수님 안에서 일하는 거룩한 영을 더러운 영과 혼동하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입니다. 그 죄는 선을 악으로 바꾸고 하느님의 구원 행위를 사탄의 파괴적 행위와 바꾸는 것이며, 생명과 평화를 위한 활동을 불법으로 몰아가서 탄압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활동, 즉 생명과 평화를 위한 일을 악마적인 것이라고 왜곡하는 사람의 죄는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활동과 정체를 순간적으로 오해하는 자들은 용서받은 수 있지만, 자기들의 자리와 지식을 이용하여 진정한 인간 해방의 거룩한 사역을 추악한 그 어떤 것으로 말하는 자들은 우리의 역사와 후손들에게 결코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의 세상은 생명과 평화를 향한 예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바알세불의 하수인이나 추종자로 왜곡되어 탄압받고, 불법-범법자로 매도되는 세상입니다. 지금 정부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온갖 수단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바알세불의 하수인이라고 선전하고 있습니다. 정작 바알세불의 하수인은 누구입니까? 분열을 조장하여 세상의 평화를 깨뜨리는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애를 쓰지만, 하느님의 정의와 거룩한 영의 활동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비뚤어진 세상을 위하여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거룩한 영을 거스르지 않고 예수님의 편에 서려고 노력하는 일입니다. 돈과 권력이 만능이 되는 세상이 아니라, 누구나 쉽게 감동할 수 있는 사랑이 흐르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사랑 없는 세상에 사랑을 심고, 악한 영이 아니라 거룩한 영의 힘으로 선과 악을 분별하여 선을 위해 헌신하는 일, 생명과 평화를 온 몸으로 배우며 그것을 위해 행동하는 일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사탄의 세력에 반대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은 그들에 의해서 죽임을 다했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건물의 모퉁잇돌이라고 합니다. 모퉁잇돌(ἀκρογωνιαΐος)은 건물의 중앙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돌입니다. 돌들을 잇는 중심에 있기 때문에 그 돌을 빼면 건물이 무너질 수 있는 돌입니다. 그 하나의 돌이 건물 전체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평화와 화해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열정과 하느님 나라 운동의 핵심을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예언자들과 사도들을 기초로 하여 모두가 연결되어 한 건물을 이루는 데에 예수님은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에스겔에 나오는 네 가지 환상 가운데 세 번째 환상인 본문은 에스겔 전체를 대변하는 강력한 이미지이고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이 에스겔에게 마른 뼈 환상을 보여주신 이유는 이제 이스라엘이 회복할 가능성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 같으나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마른 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살아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것은 잘못 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느님과 함께라면, 하느님이 하시면 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른 뼈도 살아날 수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광경을 잘 기억합시다. 

또한 에스겔은 두 막대기를 하나로 연결시키는 예언자의 상징적 행위를 통해 포로에서 돌아왔을 때에  있을 이스라엘과 유다 간의 복된 연합을 예고합니다(15-22절). 이 행위의 예언은 복음 안에서 하느님과 사람들 간의 연합과 더불어 유대인과 이방인의 연합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원수 되었으나 위대한 화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의 담이 허물어지고(엡 2:14) 화합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롬 16:17; 갈 5:6; 골 2:11).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으로 증오와 분단의 벽을 깨뜨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들이 할 일은 또 다른 벽을 쌓는 일입니다. 그 벽은 증오와 분단의 벽이 아니라 평화를 위한 하느님의 집을 만드는 벽돌쌓기입니다. 세상을 향하여 날카로운 비판과 희망을 제시한 예언자들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널리 퍼뜨린 사도들을 기초로 하여 하느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집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었을 때에 하느님이 거하는 곳이 되어갑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말은 ‘되었다’가 아니라 ‘되어간다’는 현재진행형입니다. 하나의 사건으로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이 계속해서 일어남으로써 성전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되어 가는 현재진행형에는 자족이나 교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되어감에는 일회성이 아니라 연속성이 필요합니다. 되어감에는 건물 모두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함께 건물을 이루어 하느님께서 영으로 거하실 곳이 되어갑니다. 

미천한 저는 모퉁잇돌을 중심으로 연결되는 수많은 돌들 사이에 끼인 작은 모래알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품고 그 역할을 잘 감당하기 위해서 날마다 애쓰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 새해를 시작하고 여신도회주일을 지키면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우리가 속한 큰 공동체의 일보다는 보다 가까운 공동체의 일입니다. 나와 관계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회보다는 매일 혹은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건을 만들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 사건은 벽을 쌓는 일이기도하고 벽을 허무는 일이기도 합니다. 나의 몸과 마음으로 하는 모든 사건 하나하나가 벽을 쌓아서 사람들을 가르는 일을 하는지, 벽을 허물어서 하나 되게 하는지 돌이켜봅시다. 

주기적으로, 때가 되면 일주일에 한 번이든 두 번이든 만나서 예배드리고 이야기 나누는 것으로 교회생활이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몇 년 전에는 그러한 일상적인 만남과 예배도 자유롭지 못했던 일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더 끈끈한 관계를 소망하는 의미와 이유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예배와 친교의 목적 중에 하나가 바로 벽을 허무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결혼하기 전에 수시로 만나면서 데이트를 할 때에는 마냥 좋다가도, 막상 결혼하고 나서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생활하게 되면 부딪히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못마땅해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만을 생각한다면, 결혼 생활은 지속될 수 없습니다. 싸우는 과정 속에서 남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방법을 배우고 자기의 의견을 주장하면서도 수정해나가는 모습을 보일 때에 결혼한 두 사람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되고 든든한 신뢰가 쌓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동체의 모임을 통한 예배와 친교는 우리에게 서로에 대하여 더 깊이 알고 이해하는 시간이면서 관계들 속에서 자기의 모습을 돌아보는 기회입니다. 교우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생각하면서 평소에 보지 못하던 교우들의 숨은 장점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다른 사람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모습도 진지하게 돌아보면서 자기를 발견하는 기회가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함께 드리는 예배와 함께 나누는 친교가 더 나은 공동체를 향한 소중한 시간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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