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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성탄절(1-1) - " 권력이냐, 생명이냐 " / 송년주일 / 김거성 목사

관리자 2025-12-26 (금) 15:37 2시간전 6  

본문) 호11:1-4, 8-9; 고전1:26-31; 마2:13-23



1. 실마리


오늘 성탄절 첫째 주일이며 송년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립니다. 


2. 지난 2025년의 회고


지난 해 연말, 전시도 아닌 평시에 느닷없이 계엄령을 선포한 윤석열, 그리고 이에 대해 목숨을 내건 시민들의 항거와 엄청난 응원봉-빛의 물결, 국회에서의 대통령 탄핵 가결과 트랙터-키세스 시위, 이후 이른바 서부지법 사태 등이 바로 1년 전 이 땅에서 일어난 일들입니다. 

MBC의 최초 보도로 드러난 이른바 ‘노상원 수첩’을 보면, 정치인, 언론인, 법조인 등 500여 명의 이른바 '수거 대상' 목록과 이들을 처리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연평도 이송, 가스, 폭파, 격침 등의 수거 방법도 놀랍지만, 무인기와 삐라 살포 등으로 북한을 자극하여 전시 상태를 만들고, 계엄령 이후 헌법 개정과 재선 넘어 3선 장기집권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내란의 전형을 보게 됩니다. 


이후 2025년에는 우리 사회에 엄청난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 심판에서 계엄 선포, 국회 군경 투입, 포고령 발동, 선관위 압수수색, 법조인 위치확인 시도 등 국회의 탄핵소추 사유가 모조리 인정되었습니다. “이에 재판관 전원 일치된 의견으로 주문을 선고합니다.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잊혀지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 개입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까? 윤석열-김건희 부부는 권좌에서 쫓겨나 지금은 감옥에 있고, 국민을 이기는 권력이 없음을 다시 증명하고 있습니다. 새로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하였고, 이후 특검 조사 등을 통해 그동안 용산 대통령실과 군부, 검찰, 당시 여당, 사이비 이단 세력 등등이 어떻게 끈끈하게 카르텔을 이루어 국정을 농단해 왔는지가 조금씩 드러나고 있습니다. 물론 ‘계몽령’ 운운하며 경고성 계엄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으며 진정한 사과도 하지 않는 세력이 아직까지도 거리를 활보하고 있기도 합니다.


 국제적으로 보더라도 이런 불확실한 형편은 여전합니다. 이른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수백만 생명이 살상당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북한군 사장자도 수천 명이 있다고 합니다. 또 하마스의 공격을 빌미로 팔레스타인에서는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와 그 배후 세력들이 가자 주민, 학교 등을 공습하고, 식량 공급 등을 차단하여 수만 명의 사망자와 수십만 명의 부상자가 나오고 있는 형편입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몇몇 지역에서도 그런 갈등 상황이 해소되지 못한 상태로 새해를 맞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3. 난민 신세였던 예수님의 가정


지난 성탄절, 세계교회협의회(WCC)는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추운 밤, 누추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어린 시절은 광기에 휩싸인 왕을 피해 도망치는 난민 신세였습니다. 이처럼 절망적이고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성가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오늘날의 가족들은 너무나 잔혹한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겪어야 하는 위험과 역경을 경험합니다. 전 세계 수백만 가족이 가난과 박해에 시달리고, 기후 변화와 재난으로 삶의 터전을 잃고, 분쟁과 폭력을 피해 난민이 되면서 뿔뿔이 흩어집니다.” 

오늘 복음서 본문은 바로 “헤롯이 아기를 찾아서 죽이려고 하니, 일어나서,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마 2:13)는 메시지를 요셉이 꿈에 나타난 주님의 천사를 통해 듣는 장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기 예수의 가족이 이제 난민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4. 권력을 위한 살해

 

오늘 복음서에서 헤롯은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였다“(마 2:16)고 합니다. 이 영아 살해 이야기를 들으며, 출애굽기 1장에서 히브리 산파들에게 “히브리 여인이 낳은 아기가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어라”(출 1:16)고 했던 파라오의 명령이 생각나지 않습니까? 


이 본문 등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구약성서의 모세 사이에 많은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모세와 예수의 출생 당시 이야기의 유사점을 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를 ‘모세와 예수의 유형론’(typology of Moses and Jesus)이라고 부릅니다.

  

복음서들 가운데서도 특히 마태복음서가 이런 면을 도드라지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기 예수 출생 당시 헤롯 왕과 모세 출생 당시 파라오의 권력욕은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인기, 삐라 등으로 북한을 자극하여 남북간의 군사적 충돌을 유도했던 윤석열의 이적죄와, 나아가 정치인 등을 수거하려고 획책했던 계획이 드러난 노상원 수첩 등이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습니까?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강화를 위해서라면 무고한 생명들의 희생조차 하찮게 여기는 공통점이 바로 이들 이야기에 담겨 있습니다.


5. 공감 없는 공정


최근 청년층 일부에서 공감 없는 공정의 추구를 발견합니다. 이들에게서는 경쟁·서열의 논리를 ‘자연의 섭리’로 수용하는 경향이 관찰됩니다. 물론 공정은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 가운데 하나이지만, 공감이 결여된 공정은 능력주의(meriticracy)라는 포장으로 약자 도태와 소수자 배제를 정당화할 위험이 있습니다. 한 젊은 정치인은 “모두가 자유로운 세상은 정글이죠. 또한 정글에는 나름의 법칙이 있습니다. 약육강식입니다. 강자가 다 먹는 세상이죠. 미국은 이런 정글의 법칙, 약육강식의 원리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아요. …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보는 것이죠. …


 저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다시 도약해 선진국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국식 자유의 가치를 사회 전반에 받아들이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자기 책에 적었던 적이 있습니다. 또 다른 정치인은 “국민의 삶을 국민이 책임져야지, 왜 정부가 책임지느냐?”고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정치 이념이 일부 청년층의 지지를 바탕으로 더욱 증폭된다면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가 밝을 것이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사실 역사적으로 ‘쓸모’의 논리로 생명과 존엄을 값매긴 폭력이 반복되었습니다. 히틀러 나치 치하 독일에서는 ‘쇼아’(Shoah)로 당시 유럽의 9백만 유대인 가운데 6백만을 학살했습니다. 그런데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우생학적인 관점을 내세우면서 장애인들을 세금을 갉아먹는 존재로 비하하였습니다. 나치당 월간지 ‘새 민족’ 표지에 ‘동족 여러분, 이것도 여러분의 돈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유전병 환자 사진을 싣고, “그에게 6만 제국마르크(요즘 화폐가치로 5억원 정도)의 돈이 평생 들어간다”라며 ‘반(反)장애인’ 캠페인을 전개했습니다.  


 더욱이 실제로 ‘Aktion T4’라는 장애인 안락사 작전을 짜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1939년 9월부터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약 30만명의 장애인들도 일산화탄소 가스 등으로 살해당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인권선언>은 전문에서 “인권에 대한 무시와 경멸이 인류의 양심을 격분시키는 만행을 초래하였다”고 지적했습니다. 거기에 공감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6. 전태일의 공감과 생명 사랑


학교는 물론 교회와 사회에서도 공감이 빠진 공정을 넘어서도록, 그리고 자신을 넘어 생명을 사랑하도록 시민성 교육을 강화해야 합니다. 세계인권선언 제1조에서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존엄과 권리에 있어서 서로 동등하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성과 양심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서로 형제자매애의 정신으로 행동해야 한다.”라고 말입니다. 약육강식이나 공정과 효율만을 앞세우는 능력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힘, 바로 그 형제자매애와 우애의 바탕에 공감이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재봉틀이 아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표현 기억하십니까? 이 말은 10대 소녀들, 이른바 시다라고 불리던 견습공들이 각혈을 하면서까지 일해야 했던 현실을 보며 전태일 열사가 일기에 남긴 말입니다. 전태일 열사는 배를 곯고 있는 시다들의 모습을 보고 너무 안타까워서, 자기 차비를 털어 그 아이들에게 풀빵을 사 주었습니다. 그 대신 본인은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쌍문동, 지금의 삼익세라믹아파트 자리까지 약 12킬로미터, 세 시간 넘게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는 약한 사람들, 배고픈 시다들의 처지를 깊이 공감했고, 자기 자신보다 먼저 이웃을 생각하며 그들의 굶주림부터 해결하려 했습니다. 또 당시 교회 생활을 함께했던 분의 증언에 따르면, 전태일 열사는 교회에서도 늘 봉사에 앞장섰다고 합니다. 주일학교 교사로 섬기면서, 한겨울에 맨발로 온 아이들을 보고는 자신의 양말을 벗어 신겨 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그의 행동 하나하나는 생명 사랑과 이웃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공정과 계산만을 중시하는 세상의 눈으로 보면, 이런 모습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처럼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에게 “바보 같은 짓 하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오히려 “그래, 우리는 바보다”라고 응대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과 함께 모임을 만들고 이름도 아예 ‘바보회’라고 붙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삼동친목회’로 확대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전태일 열사는 노동자들을 그저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여기고 함부로 부려먹는 이 구조를 어떻게 깨뜨릴 수 있을지 깊이 고민했습니다. 그 고민은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인 1970년 11월 13일, 그의 분신 항거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안위보다도 먼저, 이웃들이 겪고 있던 비인간적인 고통과 배고픔을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7. 하나님의 여전하신 생명 사랑


마치 호세아 예언자의 대언 말씀처럼, 인정의 끈과 사랑의 띠로 묶어서 업고 다니며 젖을 물리는(호 11:4) 어머니처럼, 반역한 백성들을 여전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여기서도 발견합니다.


오늘 사도서간문 본문인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이 썼던 표현처럼, 비천했던, 그리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겨졌던 그의 처지에서도 전태일은 잘났다고 하는 것들을 자랑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2014년 3월 1일 오후 서대문형무소역사관 9옥사 앞에서 열린 3.1민주구국선언 38주년, 무죄판결 기념대회에서 문동환 목사님은 1970년 전태일의 분신이 신앙인들을 부끄럽게 만들었고, 그것이 1976년 3.1민주구국선언으로 표출되었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전태일의 ‘풀빵’은 이후 광주항쟁에서는 ‘주먹밥’으로, 또 지난 겨울의 빛의 혁명에서는 ‘선결제’라는 모습 등으로 계속해서 되살아나고 있는 것입니다.


8. 매듭


2025년 한 해를 마무리하며 다시 우리의 삶을 반성해 봅니다. 과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이 이 세상 널리 생명을 살리는, 진정한 ‘기쁨과 평화’의 소식이 되도록 만들었는가? 또 탐욕만을 추구하는 권력과 금력을 제어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사회로 변화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

가난과 불의, 어둠과 슬픔, 눈물과 아픔, 전쟁과 공포, 질병과 좌절, 불안과 암담한 미래,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의 왕으로 오신 아기 예수께서 주시는 위로와 희망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가 그 메신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의 삶이 그 메시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2026년 새해를 맞이합니다. 오늘의 반성과 올해의 회오를 바탕으로 새해에는 진정으로 생명을 살리는 예수의 길을 크게 열어제끼는 모든 그리스도의 일꾼들이 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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