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60:1-14, 갈 4:1-7, 마 2:1-12
1. 일어나 빛을 발하라!
오늘은 아기 예수께서 우리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인 오늘 우리는 ‘구원의 빛, 생명의 빛’이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다섯 번째 촛불을 켭니다. 이념과 사상으로, 갈라진 이 땅에 사랑과 정의로 구원을 이루시고 흑암에서 절망하는 이들에게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묵상하며 또 우리도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본받고자 성탄예배를 드리며 다섯 번째 촛불을 켜는 것입니다.
<성탄절 촛불>
오늘 성탄절에 주어진 삼위일체 교회력 세 본문 말씀은 한 민족(나라), 한 마을, 한 사람을 선택하시어 하나님의 구원과 생명의 회복을 이루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성탄의 의미입니다. 구약 말씀을 통해서는 한 민족을 세워 빛을 발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또 복음서 말씀을 통해서는 한 작은 마을, 곧 유대 땅 베들레헴을 통한 새로운 생명의 시작, 곧 메시아의 탄생을, 그리고 서신서의 말씀은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먼저 한 민족을 다시 세우시는 구약 이사야 말씀을 볼까요?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사 60:1-3)
이사야서는 구약의 복음서입니다. 참 아름다운 말씀입니다. 성경공부를 통해 이사야서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누어진다고 말씀드렸었죠? 제1 이사야인 ‘바벨론 포로 전 예루살렘 이사야(1-39장)’, 제2 이사야인 ‘바벨론 포로기 이사야(40-55장)’,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이 속한 제3이사야인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사야(56-66)’입니다. 제1이사야가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파국적 심판’을 선포했다면, 제2 이사야는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구원과 해방의 메시지입니다. 이러한 해방과 구원은 출애굽 사건을 연상시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제2의 출애굽을 소망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소망이 이루어져 제3 이사야에서는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과 해방을 선포했던 제2 이사야의 희망과는 달리 바벨론에서 돌아온 귀환 공동체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직면합니다. 먼저는 경제적 어려움입니다. 무너진 예루살렘을 재건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힘들었습니다. 또한 사회적 어려움입니다. 대부분의 사회 지도층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다시 돌아왔는데, 이들이 그동안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이들과 주도권 경쟁을 벌인 것입니다.
따라서 제3 이사야와 동시대 선지자인 학개와 스가랴는 성전재건이라는 해결책으로 이 문제를 돌파하려고 하였습니다. ‘지금의 경제적, 사회적 혼란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성전이 무너졌기에 다시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 이 민족이 살길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성전 재건을 독려합니다. 소위 ‘성전재건 열광주의’로 민심을 몰아갔던 것입니다. 학개와 스가랴의 말을 들어 볼까요?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성전을 건축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것으로 말미암아 기뻐하고 또 영광을 얻으리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학 1:8)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 일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슥 4:9)
스룹바벨은 유대 총독으로 예루살렘 성전을 다시 재건합니다. 따라서 제2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성전개건을 통해 사회적 혼란을 잠재우는 것에 대해 제3 이사야는 다소 비판적입니다. 그렇다면 제3 이사야의 입장은 무엇일까요? 결론을 말씀드린다면, 제3 이사야는 예루살렘 성전재건을 넘어 온 인류의 재창조입니다. 가령, 제2 이사야가 제2의 출애굽을 선포했다면, 제3 이사야는 제2의 창조를 선포했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은 성전이라는 공간에 갇히는 분이 아니라, 온 우주에 존재하시는 창조주이시며(사 66:1-2),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어,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하게 되는(사 65:17 ; 66:22) 새로운 창조를 행하시는 분이라 한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본문 말씀은 이러한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 아담을 지으셨듯이, 제2의 창조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창조하시는 이야기입니다. 그 창조와 구원의 아름다운 소식이 오늘 본문 말씀인 것입니다. 계속해서 들어볼까요?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일 것이요. 느바욧의 숫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제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사 60:4-7)
미디안과 에바, 스바와 게달(이스마엘의 차자, 창 25:13), 그리고 느바욧(이스마엘의 장자, 창 25:13) 곧 이방 나라들이 온갖 재물을 가지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바치려고 육지로 온다고 합니다. 그리고 구름과 같은 모양으로 배를 타고서도 오는데, 저 멀리 다시스(스페인)에서도 이스라엘에 온다는 것입니다.
“저 구름 같이, 비둘기들이 그 보금자리로 날아가는 것 같이 날아오는 자들이 누구냐?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먼 곳에서 네 자손과 그들의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사 60:8-9a)
육지와 바다로부터 예물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와서 무엇을 한다는 말입니까?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사 60:9b).” 하나님께 예물을 드린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내가 너(이스라엘)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라(사 60:9c).” 예물을 바치러 하나님께 나온다는 것이지만, 결국 이스라엘 나라에 바친다는 것이죠? 이전에는 불순종하여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으나, 이제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영화롭게 하셨으니 모든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을 섬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입니다.
“내가 노하여 너를 쳤으나, 이제는 나의 은혜로 너를 불쌍히 여겼은즉, 이방인들이 네 성벽을 쌓을 것이요. 그들의 왕들이 너를 섬길 것이며 네 성문이 항상 열려 주야로 닫히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들이 네게로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가져오며 그들의 왕들을 포로로 이끌어 옴이라. 너를 섬기지 아니하는 백성과 나라는 파멸하리니, 그 백성들은 반드시 진멸되리라. 레바논의 영광 곧 잣나무와 소나무와 황양목이 함께 네게 이르러, 내 거룩한 곳을 아름답게 할 것이며 내가 나의 발 둘 곳을 영화롭게 할 것이라. 너를 괴롭히던 자의 자손이 몸을 굽혀 네게 나아오며 너를 멸시하던 모든 자가 네 발 아래에 엎드려 너를 일컬어 여호와의 성읍이라,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의 시온이라 하리라.” (사 60:10-14)
한 나라를, 한 민족을 다시 창조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일으켜 세우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빛, 생명의 빛을 엿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일어나 빛을 발하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지금 우리들에게도, 또한 이 민족에게도 들리는 듯합니다.
2. 끼어있는 나라, 깨어있는 나라
영화 <남한산성>(2017)에서 이병헌이 연기한 최명길(1586~1647)은 실제 영화와 달리 왜소하고 병약한 볼품없는 외모에, 나이 마흔도 되지 않아 이빨이 반이나 빠져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했던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왜란과 호란에 관한 국내 최고 권위자인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는, 『최명길 평전』 (보리, 2019)에서 병자호란 당시 목숨을 걸고 홀로 적진에 들어가 화친을 이끌어 냈던 최명길의 삶을 담담하고 명확한 문장으로 되살려 냅니다. 한교수가 본 최명길은 ‘용기, 책임감, 희생정신’의 화신입니다. 정통 성리학이 아니라, 양명학(陽明學, 중국 명나라 때 왕양명이 주장한 유교 학설로 지식과 실천의 일치를 강조)의 영향을 받았기에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정신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또한 당시 유학자들이 주자학 말고는 거들떠보지 않았던 『주역』을 수천 번이나 읽어 현실주의자다운 면모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영화 남한산성 포스터와 최명길 평전 표지>
아무튼 청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병자호란), 조정 대신들은 척화(斥和, 화친을 반대)를 주장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사신들의 목을 친 뒤, 나라의 존망을 걸고 청과 싸우자!” 이렇게 큰 소리 쳤던 이들이 그러나 정작 전쟁이 일어나자 제대로 싸움 한번 하지 못하고 피난길에 오릅니다. 이때 최명길은 청나라 군대 선봉이 서울 한복판까지 들이닥쳤을 때, 홀로 적진에 들어갑니다.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주었던 것입니다. 이후 최명길은 영화 <남한산성>에 잘 그려져 있듯, 화친을 주장해 조선의 멸망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최명길을 이렇게 단죄합니다. “진회보다 더한 만고의 간신!” 진회(秦檜, 1090-1155)는 남송을 금나라(여진족이 건국한 중국 왕조)에 넘긴 중국 역사 최고의 간신입니다.
<남한산성>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인물이 있죠? 김윤석이 연기한 김상헌입니다. 김상헌은 명나라에 의리를 지키기 위해 인조 까지도 옥쇄(玉碎)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옥처럼 아름답게 부서져야한다’는 말로, 명나라에 대한 충절을 위해 깨끗하게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명나라에 사대(事大,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를 주장했던 김상헌은, 지금 ‘조선의 정사(正士)이자, 영원한 사표’로 추앙받고 있습니다. 한명기 교수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이 기막힌 대비가, 바로 조선이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시각을 가진 명백한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그때로부터 400여년이 흘렀습니다.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그 때와 비슷합니다. 임진왜란 때, 망해가는 나라를 살려줬으니, 후금(청나라의 전신)을 치는 데 앞장서라고 강요했던 명나라와, 그런 명나라를 위해선 임금의 목숨도 바쳐야 한다던 김상헌과 같은 척화신들의 모습은 지금 미국과 친미극우보수세력의 모습으로 떠오릅니다. 한국이 분수도 모르고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종료를 시도했다가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이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한 사대주의입니다. 그러나 사대주의자들의 말은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믿을 것이 못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버릇없는 북한을 혼 내주기 위해 전쟁도 불사해야한다는 이들도 매 한가지입니다. 전쟁나면 가장 먼저 도망갈 이들이, 분단으로 먹고사는 이들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꼼수입니다.
이처럼 강대국 사이에 ‘끼어 있는 나라’ 조선의 운명이 오늘도 한반도에서 계속되고 있는데, 아직도 깨어있는 시민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따라서 대한민국이 ‘깨어 있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당시 최명길의 (실리주의가 가리키는 방향이 어느 쪽인지 논쟁의 여지는 있겠지만) 최소한 양명학에 기초한 지행합일의 정신과 현실주의적 판단, 그리고 용기와 책임감, 희생정신을 본받아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덕목은 바로 기독교적 가치 덕목입니다.
따라서 구약에서 작고도 연약한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신 하나님은 오늘 21세기에는 지정학적으로 동일한 운명을 가지고 또한 남과 북이 분열된 것도 똑같은 우리나라를 들어 쓰실 것입니다. 구원과 생명의 아기 예수님은 이 나라를, 이 민족을 다시 창조하시고 새롭게 하시며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3. 유대 땅, 베들레헴아! 한국 땅, 공수처야!
이렇게 한 민족, 한 나라를 세우시는 하나님은 또한 한 마을(고을)을 택하십니다. 쉬운 말씀이니, 본문을 바로 보겠습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냐 물으니, 이르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마 2:1-6)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은 고을인 베들레헴을 택하시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목자가 나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동방박사들은 왕이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 예물을 드립니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왕께 드리는 예물)과 유향(제사장에게 주는 예물)과 몰약(방부제의 일종으로, 십자가 죽음을 상징)을 예물로 드리니라.” (마 2:9-11)
<동방박사 세 사람>
황금은 왕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유향은 거룩한 제사에서 태우는 향료입니다. 따라서 제사장에게 주는 예물이죠? 몰약은 시신이 썩지 말라고 바르는 방부제의 일종입니다. 이것은 아기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상징합니다. 성탄의 기적은 그렇습니다. 연약한 아기 예수를 통해 새로운 세상의 비전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크고 강하고 권세 있는 것이 아니라, 작고 힘없고 연약한 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펼쳐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합니다. (이 때의 예루살렘은 더 이상 성스러운 곳이 아닙니다. 정치와 종교, 문화의 중심지로 기득권을 가진 자들의 도시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기존의 왕과 제사장, 그리고 기득권층들은 이러한 새로운 세상,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이 그렇죠? 종교, 정치, 문화의 기득권을 가진 헤롯왕과 예루살렘이 소동한 것과 똑같습니다.
따라서 헤롯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마 2:7-8).” 그러나 “그들(동방박사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마 2:12)”갑니다. 그렇게 죽음의 위험 속에서 한 아기가 태어난 것이 바로 첫 번째 성탄절입니다.
4.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이 아기는 바울에 의하면, 죄와 사망의 그늘에 짓눌린 이들을 구원합니다. 곧 율법을 통해, 죄를 깨닫고 그 결과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간의 현실을 깨닫는(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속량하십니다. 바울의 말입니다.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노릇 하였더니,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갈 4:1-5)
아기 예수를 통해 구원과 새 생명을 허락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분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갈 4:6-7)
하나님의 유업을 받을 자로 당당히 살라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또한 우리를 억압하는 율법 아래에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에 아기 예수님의 사랑과 생명을 증거하고 구원의 새 세상을 선포하라는 유업을 받은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올 해 성탄을 이러한 사명을 받는 은혜로운 성탄으로 맞이하시기를 아기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