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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탄 일(1-2) - " 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 / 전완기 목사 > 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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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성 탄 일(1-2) - " 귀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 " / 전완기 목사

관리자 2020-12-23 (수) 09:37 4년전 728  

본문) 사11:1~9, 요 1:6~18, 히 1:1~12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이 성탄절은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요? 

2천 년 전에 이미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크리스마스 행사를 잘 준비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올해 성탄절은 코로나로 인하여 예전과 같이 기쁨과 감사가 넘치기 보다는 세상의 불편한 시선을 의식해야하는 그 이유는 모두가 아시듯이 교회가 코로나 확산의 주범인 것처럼 이야기되어지는 상황 속에서 많이 불편한 성탄절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성탄 불빛이 사랑과 따뜻함을 품지 못하고 이기적인 집단으로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을 무시하기에는 상황이 많이 어렵고 불편한 것은 목사인 저만 느끼는 감정일까요? 바로 지금이 주님의 손길이 더욱 필요한 때이고 회복시켜주실 것을 믿고 의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역을 위해서 주님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갈 때 오늘 말씀을 붙잡고 나아가시길 원합니다.


구약의 말씀입니다.(사11:1~9)

이사야는 8세기의 유다 왕국에서 활약한 선지자입니다. 이 시기 이스라엘 왕들은 하나님의 법이 다스리는 사회를 건설하는데 실패했고 민중들은 권력자들 밑에서 신음하고 있었으며 남북왕국으로 갈라져 서로 분쟁하였습니다. 외적으로는 앗수르의 위협 앞에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던 시기입니다. 이런 시기에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실 이상향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합니다. 이 나라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이상향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장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1-5절은 그들이 기다리던 메시야에 대한 묘사이고 6-9절은 메시야가 다스릴 왕국의 묘사 입니다.


먼저 메시야에 대한 묘사부터 보겠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메시야를 이새의 줄기에서 나는 싹으로 묘사합니다. 왜 이새의 줄기일까요? 이새의 아들은 다윗이지요.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조를 연 인물입니다. 모두가 다윗은 알지만 그 아버지 이새는 잘 모릅니다. 그러면 다윗의 후손으로 하는 것이 더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요? 굳이 그 아버지 이새의 이름을 쓴 이유는 줄기라는 단어에 숨어있습니다. 줄기의 원어는 그루터기라는 뜻입니다. 그루터기는 잘려나간 나무의 밑둥치를 말하는 것이지요. 이새의 후손들이 마치 잘려나간 나무와 같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다윗으로부터 시작된 이스라엘의 왕들의 실패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공의와 성실이 없는 통치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통치하에서 백성들은 많은 괴로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과 달리 메시야는 어떤 분이십니까? 


3-5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통치자들, 정부와 국가들, 세상의 정치, 사회, 경제제도와 달리 공의와 성실로 그 백성을 다스리십니다. 우리는 파시즘에 대항한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와 겨룬 자본주의가 승리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이 제도 역시 온전한 역사의 마지막 정치, 경제 제도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이 사회 속에서 우리는 날로 심화되는 빈부격차, 가속화되는 환경파괴, 제 3세계의 소외와 착취를 직면하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우리는 AI와 로봇이 가져올 대량실업에 다가서고 있고 의학의 발전은 부자들의 생명연장에만 기여할 뿐 인류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제 3세계의 빈자들의 질병치유에는 무관심합니다. 메시야에 대한 이사야의 선포는 이 세상의 어떤 나라, 어떤 제도, 어떤 사회도 완전한 이상향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우쳐 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부조리 너머에 있는 이상향을 꿈꿉니다. 그 곳은 어떤 곳입니까? 


6절 이하를 보십시오.

그리스도가 다스리게 될 하나님의 나라는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충만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여호와를 압니다. 히브리 문화에서의 지식은 직접 경험하여 얻는 것만을 가리킵니다. 로마에 대해 책을 보고 아는 지식은 이 기준으로 지식이 아닙니다. 로마를 직접 방문하고 경험하여 얻은 지식만이 진짜 지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직접 경험함으로써 알게 되고 그런 지식으로 충만한 공동체에서는 더 이상 형제가 형제를 희생시켜 자신의 이익을 구하는 결과 발생하는 모든 다툼과 희생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나라의 비전은 언제 이루어질 것입니까? 그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이미 시작되었고 다시 오심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건설의 시대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은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일에 동참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나라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우리 안에서 건설되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성령을 좇아 사는 성도들의 공동체 교회 안에서 건설되고 있습니다. 그 나라는 성경의 가르침,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의 질서를 좇아가는 사회 속에서 건설되고 있습니다. 그 나라의 건설을 가로막는 마귀의 군대와 전쟁이 여전히 벌어지고 있지만 결코 그 나라의 건설을 멈추지는 못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죽어서 가는 천국만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하도록 하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일을 시작하신 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복음서의 말씀입니다.(요 1:6~18)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자기 땅>에 오신 것이라고 했습니다.(요 1:11) 자기 땅에 왔는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어두움>이라고 했습니다. 왜 그것이 어두움인가 하면 자기 땅에 오신 예수님이 바로 사람과 세상 곧 백성들의 빛이시기에 그 빛을 몰라본다는 것은 어두움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쉽게 생각하는 빛은 모르기가 더 어렵습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빛이 비취면 아는 것이 빛입니다. 그런데 요한 사도는 빛이 어두움에 비쳤는데 어두움이 알지 못한다고 했고 했습니다. 그것은 이 빛이 우리가 아는 그 빛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빛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인식>과 <깨달음>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는데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미디어의 발달로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의 이름은 들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영어권에서는 Jesus라는 단어가 ‘맙소사!’와 유사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정도니 예수님의 실존에 대하여 모르기가 더 어렵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바로 이것이 어두움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의도, 그것을 모르면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을 알고, 때로 신학이나 고고학 혹은 역사학적으로 그 실존을 확신하다고 해도 아무소용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세상에 오신 빛인 예수님을 아는 것인가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영접하는 자”는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1-12)


이 말씀에서 우리는 <영접하지 않는 자 = 어두움에 비친 빛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자>, 그리고 <영접하는 자 =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문맥만 읽을 수 있다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영접하는 것이고, 무엇이 믿는 것인가 하는 것이 핵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오실 곳에 오셨습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 땅이 예수님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이 곧 땅이기 때문입니다. 즉 자기 땅에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용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땅에 오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면 빛이 어두움에 비쳤음에도 알지 못하는 어두움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십니다.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그것을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이름은 정체성인데, 하나님의 이름 ‘기도하면 필요한 것 주시는 자’라든가, ‘수고하면 상 주는 자’라든가, ‘자기 소유를 많이 바치면 축복하는 자’와 같은 분이 결코 아닙니다. 그런 신들이 따로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바알이요 아세라인 것입니다. 즉 이방신이고, 우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이 아니라, 인생이 살 동안 겪는 일을 안위하고, 세상에서 육신이 하는 일을 남보다 잘 되게 복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바알이나 아세라와 같은 이방신으로 섬기는 것이됩니다. 즉 문맹이 글자로 표시된 사람의 뜻을 알 수 없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자신의 수고와 소유의 드림으로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와 또한 내세에서 하나님을 그렇게 섬지 않은 사람과 달리 복 주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은 다 어두움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미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이 땅에 비친 빛을 깨닫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안위를 살피신다고 영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뜻이 온전히 자신에게 의미가 있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자기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존재 목적과 이유가 바로 뒤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이 자기 삶이 되는 것, 그것입니다. 이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나타나시는 것, 곧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들입니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땅은 하늘의 기운을 표현합니다. 하늘이 차가우면 땅의 모든 것이 춥고, 하늘이 따뜻하면 땅의 모든 것이 따뜻합니다. 차고 따뜻한 것은 영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땅이 그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의도(그것이 가장 기초적인 종족보존의 본능이라 해도)는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표현된 것이 아들인 것도 마찬가지 법입니다. 그렇게 될 때 사람이 하나님의 땅, 곧 자기 땅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영접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빛을 영접한다는 것은 인식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신 목적, 존재의 목적 그것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들이고, 그것이 빛이 비친 것이고, 그것이 태초이며, 그것 하나님의 세계와 나라가 시작된 것입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뜻, 그것을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로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서신서의 말씀입니다.(히 1:1~12)

히브리서는 그 책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히브리인들’ 즉 ‘유대인들’에게 쓰여진 책입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면, 그냥 유대인들이 아니라 1세기 당시의 ‘유대인 크리스천’, 즉 유대인들이지만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쓰여진 책입니다. 히브리서는 바로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교와 기독교는 비슷한 점이 많기 때문에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믿고, 구약의 선지자들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차이가 있습니다. 유대교는 예수를 안 믿고, 기독교는 예수를 믿습니다. 그리고 유대교는 여전히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율법들, 예를 들면 제사 제도나, 할례, 음식법 등을 지키지만, 기독교는 지키지 않습니다. 기독교가 이런 율법들을 지키지 않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런 율법들을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다 성취하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대교는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구약의 율법들을 다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1세기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로마제국의 핍박이었습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흔히 바울 사도로 알려져 있는데, 바울 사도가 활동하던 당시는 로마제국이 기독교를 극심하게 핍박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그래도 유대교에 대해서는 비교적 관용적이었기 때문에, 기독교인으로서 핍박을 받느니 차라리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면 최소한 핍박은 면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두번째 이유는, 같은 유대인들의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외부적으로는 로마제국의 핍박이 있었다면, 내부적으로는 같은 동족인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근본적으로 예수 자체를 믿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을 핍박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불교 집안에서 자란 어떤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가족들과 친척들이 그를 핍박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냥 유대인들이 아니라 같이 예수를 믿는 유대인들의 핍박이었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좋지만, 유대교를 버려서도 안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단지 가르침 정도가 아니라 핍박을 하는 수준이어서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핍박했는가 하면, 같은 유대인 사회에서 소위 왕따를 시켰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과는 비즈니스도 하지 않고, 그가 파는 물건은 사지도 않습니다. 그에게는 말도 걸지 않고 인사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 유대인 크리스천은 장사도 못하고 돈도 벌지 못합니다. 경제적으로 궁핍해집니다. 더 심각한 것은 지독한 소외감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1장의 내용은 천사보다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여기에 ‘아름답다’는 말의 원래 의미는 ‘더 낫다, 더 우월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이 생각에는 예수님과 천사 중에서 누가 더 우월합니까? 우월하다는 말은 누가 더 키가 크고, 잘 생겼느냐, 누가 더 똑똑하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가 진짜 구원자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천사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중에서 가장 높은 자이고, 하나님을 위해서 봉사하는 자라고 그 존재를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에 비하면 예수는 천사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임을 강력하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 첫번째 증거는 예수만이 하나님의 아들이지 천사는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두번째 증거는 천사는 예수님에게 경배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예수님을 경배하는 존재들이며, 예수님께서 이 천사들을 마치 바람과 불꽃을 사용하심 같이 섬기는 자들로 삼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천사보다 우월한 세번째 이유는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을 드린다면, 예수님은 창조자이십니다. 즉 예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로서 당연히 천사도 창조하셨으므로 천사보다 우월하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우월하신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라면, 세상의 그 어떤 좋은 것도 내 신앙의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람이나 환경의 유혹, 세상의 핍박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가장 우월하신 예수님 때문에 덜 우월한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나를 죄 가운데서 구원하신 예수님의 사랑만큼 귀하고, 아름답고, 우월한 사랑은 없는데, 그 사랑을 날마다 생각하는 사람은 우월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결론입니다.

인간의 모든 다툼은 우월하지 못한 것을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비롯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 역시 가장 우월한 것을 보지 못하고 우월하지 못한 것을 우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고 다른 것들에 더 우월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그러므로,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 모두가 세상에서 가장 우월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날마다 생각하심으로써 세상과 타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우월한 사랑을 하게 되시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공의와 사랑의 그리스도의 법을 지키며 그 법이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코로나19가 확산되고 테러와 전쟁과 고난과 실패가 점철된 세상을 살면서도 여전히 소망을 잃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그 나라를 건설하는데 동참하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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