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사 35:1~10, 벧전 1:22~2:3, 막 9:33~37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의 말씀은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던진 질문의 의도는 제자들이 길을 걷다가 서로 티격태격하는 것처럼 보인 것에 따른 궁금증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물음 앞에 제자들은 잠잠했다 성경은 증거합니다. 잠잠했다는 것은 자신들이 어떤 내용으로 논쟁했는지 밝히기를 꺼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논쟁했던 내용이 예수님께 말씀드리기에는 부적절한 것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그 논쟁 가운데 제자들의 숨겨진 욕망이 드러나고, 욕심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겠다 고백하며 결단한 제자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논쟁이 적절치 않고, 예수님 보기에 민망했다는 것입니다. 오랜 시간 예수님과 동걱동락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어왔던 제자들로서는 숨겨진 욕망이 드러나는 것이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바로 직전 예수님은 장차 자신에게 다가올 수난과 죽음에 대해 다시한번 설명하고, 가르쳐 주셨던 상황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숨겨두었던 욕망을 꺼내 논쟁했다는 자신들의 모습이 부끄러웠던 것입니다. 기억할 것은 오늘 제자들의 논쟁으로 나타난 인식은 제자들만의 인식이 아니라 당시 예수님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일반적인 인식이었다는 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스라엘의 부흥을 꿈꾸고, 로마식민지로 그간 억눌렸던 감정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망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는 이 땅에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뜻과도,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예수님의 뜻과도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주목할 것은 예수님이 공생애 이후 단 한 번도 그들에게 권력을 준다든지, 장차 권좌에 앉게 되면 제자들에게 어떤 자리를 주겠다 약속한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직접적으로 장차 자신이 얻게 될 영광과 권력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사탕발림하거나 유혹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제자들 스스로 성경의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예수님이 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아가 맞다면, 유대인의 왕이 될 것이고, 그 왕을 따르는 자신들에게도 권세가 주어질 것이라는 헛된 기대를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곧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논쟁은 제자들 스스로가 만든 허상으로 빚어진 소동인 것입니다. 제자들의 상상이 만들어 낸 웃픈 광경인 것이죠.
그러자 그들의 본질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은 진정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자 한다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리곤 한 아이를 안고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선언하셨던 것이죠. 이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이 세우시고, 예수님이 증거하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세상적 가치관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질서와 새로운 가치관이 중심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하찮은 존재로 여겨졌던 아이를 통해 하나님 나라는 그처럼 작고 하찮은 존재조차도 소중히 여기며 사랑하는 자세가 필요하고, 그런 사랑을 간직한 사람이라야 예수님과 하나님의 진정한 영접 자가 될 수 있음을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세상적 가치와는 상충된 새로운 가치를 가르치심을 통해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만들어갈 세상이 세상적 가치와 욕망과는 그 내용과 방향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이는 사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선포된 약속에서 드러난 내용입니다. 오늘 구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의 때에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될 백성들을 향한 축복과 희망의 말씀입니다. 사실 오늘 말씀의 배경은 앗수르의 지속된 위협 앞에 놓여 있던 남유다 백성들에게 주는 회복과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선지자는 자신들의 힘만 믿고 남유다를 핍박하며 세계를 호령했던 앗수르가 하나님의 심판 아래 몰락할 것이라는 점을 선포하며, 남유다는 앗수르의 위협에 굴복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주변 나라들의 지속된 위협 아래 두려움에 사로잡혀 위축된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이스라엘을 회복하고, 구원하실 것임을 분명히 선포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언자는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그 날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앗수르에게는 무서운 몰락과 멸망의 결과를 얻는 날이 되지만, 하나님의 약속을 간직하고 살아온 백성들에게는 구원과 복락이 임하는 기쁨의 날이 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현실적으로는 앗수르의 위협이 끝나고 평강의 길이 열릴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장차 이 세상에 오실 메시아를 통해 이루실 나라에 대한 예언입니다. 분명한 것은 오늘 선지자의 말씀을 통해 메시아의 임재는 심판과 축복이 동시에 나타나는 시간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민족들의 지속적인 핍박과 억압 가운데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을 간직한 백성들은 메시아를 통해 구원의 은혜와 기쁨을 얻게 되지만, 하나님을 거역하고 거부하는 세력들에게는 무서운 심판의 시간이 될 것이라는 경고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선지자는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던 남유다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현실에 굴복하지 말고, 흔들리지 말라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를 통해 하나님이 허락하실 미래는 세상의 가치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치가 부여되며, 새로운 질서가 세워질 것임을 오늘 말씀을 통해 보여줍니다. 이사야 35:5~7절 말씀을 새번역으로 봅니다.
“그 때에 눈먼 사람의 눈이 밝아지고, 귀먹은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다. 그 때에 다리를 절던 사람이 사슴처럼 뛰고, 말을 못하던 혀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 시냇물이 흐를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연못이 되고, 메마른 땅은 물이 쏟아져 나오는 샘이 될 것이다. 승냥이 떼가 뒹굴며 살던 곳에는, 풀 대신에 갈대와 왕골이 날 것이다.” 오늘 선지자는 메시아를 통해 이룰 새 세상의 모습을 아주 상징적으로 묘사하며, 모든 갈등과 아픔이 회복되고, 치유되며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풍요와 번영의 미래가 만들어질 것임을 증거합니다. 주목할 것은 그곳의 주인공은 하나님께 속량 받은 자들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복락을 누리게 될 그들이 걷는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부르게 될 것이라는 증언입니다. 오늘 선지자가 증언하는 거룩한 길은 세상의 길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시고, 하나님이 정하신 뜻에 합당한 길이라는 점을 오늘 성경은 증거하면서, 악하고, 어리석으며, 불의한 자들은 결코 그 길을 다닐 수 없다 선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만드신 새 질서에 합당한 자만이 하나님이 주신 새 약속의 주인공이 되고, 영광을 누릴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앞서 복음서를 통해 ‘어린 아이를 영접하는 자가 예수님을 영접한 자요, 하나님을 영접한 자’라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 서신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들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라’는 권면을 통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그 진리에 순종함으로 우리의 영혼은 깨끗하게 되고, 우리의 삶은 달라진다는 점을 서신서 기자는 가르치면서, 그렇게 말씀의 가르침을 삶에서 실천하고 행동할 때 비로소 우리는 거듭난 삶을 살게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거듭남의 본질은 하나님 말씀으로 나를 새롭게 하는 것이요, 말씀으로 우리 생활을 바꾸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내 지식과 판단 대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세상을 살고, 세상의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오늘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야 말로 세상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진리임을 담담히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목할 것은 그렇게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해야할 이유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참된 구원의 길에 들어서고, 참 생명의 길을 걷기를 원하는 성도들은, 하나님 말씀에만 순종하며 세상의 모든 악독과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자 결단했다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화되어야 하고, 우리 삶의 방식과 행동도 하나님 뜻에 합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서 기자는 점점 높아지는 로마제국의 박해와 마주한 초대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구원의 약속을 받은 거룩한 성도로서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담대히 맞서라 당부하고 있는 것이죠. 세상적 가치관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만이 주어진 현실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점을 담담히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림절 넷째 주일 우리의 현실을 가만히 돌아 봅니다. 우리는 지금 잘못된 지도자의 판단과 행동이 빚어 낸 뜻하지 않은 혼란과 위기를 몸소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결정하면 국민들은 자기 결정대로 믿고 따를 것이라는 망상에 사로 잡혔던 잘못된 지도자를 현명한 국민들은 헌법적 가치를 지켜가며, 그 어느 때보다 질서 있고 빠르게 되돌려 놓았습니다. 이럴 수 있었던 이유, 역사의 교훈을 통해 국민들은 민주주의 진정한 가치를 배웠고, 잘못된 불의와 싸워 이기는 방법을 학습해 왔기 때문입니다. 다만 모든 국민이 아는 이 중요한 가치를 불의한 지도자는 미처 깨닫지 못하고, 제대로 인식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죠. 자기가 하면 모두가 이해할 것이라는 망상에 빠져 뜬금없는 오늘의 혼란을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세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말씀의 가르침대로 우리 삶을 바꾸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한번 깨닫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아 약속의 본질은 우리의 욕망을 성취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가치를 드높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는 것임을 오늘 성경은 분명히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지자는 그 길을 거룩한 길이라 표현하고, 평강의 길이라 고백했던 것이고, 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자세를 갖추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음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이를 서신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거듭나야 한다는 가르침을 통해 실생활에서 말씀을 체화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죠.
아무리 겉모습이 화려하고 존귀한 보석이 가득하며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하는 배도 그 목적지가 없으면 그 배는 바다를 표류하며 떠도는 난파선이요, 유랑선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중요한 건 규모가 아니라, 외모가 아니라 방향이기 때문입니다. 비록 작은 규모의 배일지라도 그 목적지가 분명하면 그 배는 여객선이 됩니다. 목적지를 정했으면 그곳으로 가장 신속히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배를 조정해야 합니다. 바람의 방향은 돛을 조정해서 그 힘을 이용해야 하고, 전체적인 배의 진로는 키를 조정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엇나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행여 목적지로 나아가다 암초를 만나고, 장애물이 있으면 피하고, 제거해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하고 빠르게 도착할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우리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로 우리의 방향을 정했으면 그 방향에 맞게 말씀으로 무장하고, 그 말씀의 가르침대로 우리 삶을 바꾸고, 그 말씀대로 우리가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돛을 삼아 방주를 인도해 주시고, 예수로 키를 삼아 그 방향을 정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 말씀만 의지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으로 변하고,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고,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는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혼란과 혼동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바른 길 걷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이며 하나님 나라로 힘차게 나아가는 거룩한 믿음의 일꾼들 되시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