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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대림절(3-1) - " 기다림, 종말과 희망 " / 이병일 목사

관리자 2024-12-13 (금) 10:13 17일전 75  

본문) 3:19-33; 6:9-20; 1:68-79

 

<유대 종말 이후의 애가(哀歌)와 희망>

예레미야 애가는 이스라엘 예언자들이 예언한 하나님의 심판과 종말이 바빌론의 침공으로 현실로 이미다가온 이후에 슬픔과 희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제목은 히브리어 성서에서는 유대인들의 괴로운 감정을 표현한 첫 단어를 따서 에카(ekah: “, 어떻게라는 뜻)라고 했습니다. 그리스어 성서에서는 트레노이(悲歌: 슬픈 노래), 불가타 성서에서는 슬픔의 예언자 예레미야에 따른 비가들이라고 합니다. 애가는 룻기, 에스더, 잠언, 아가와 함께 이스라엘의 축제 때 읽혀지는 다섯 두루마리 중의 하나로 예루살렘 멸망 기념일에 읽혀졌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금요일마다 통곡의 벽에서 애가를 부르며 예루살렘의 멸망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애가는 예루살렘이 불타고 성전이 파괴되어 극심한 충격을 받은 유대인들에게 재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참 뜻이 무엇인지 일깨우려고 합니다. 그들에게 닥친 이 불행은 하나님께 선택된 백성 이스라엘의 불성실과 죄악에 대한 야훼의 진노임을 깨닫게 하고, 자신들의 과오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되돌아가 야훼의 지속적인 권능과 정의, 자비로우심에 희망을 걸고 살아가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본문인 예레미야 애가 3:19-33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대한 인식을 정점으로(21-22) 극심한 절망과 탄식이 눈부신 희망과 믿음에로 극적 전환을 이룹니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종말이라고 하는 고난을 통한 죄의 인식과 고백, 회개를 통하여 더 높은 신앙으로 성숙하는 것이 이 책의 전반에 걸쳐 흐르는 주제입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심이 아니라 우리를 돌아오게 하려는 하나님의 애틋한 사랑과 자비 때문이라고 합니다.

히브리 성서에서 종말은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왕과 지도자들을 비롯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예언자들이 선포한 야훼 하나님의 말씀에서 기인합니다. 예언자들은 부패와 타락이 만연한 왕과 백성들에게 국가의 멸망을 경고하고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지만, 그들은 예언자들의 경고와 요구를 무시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예언자들은 야훼의 날’(그날)을 선포하는데, 이 날은 구원의 날이 아니라 파멸의 날이요, 빛의 날이 아니라 어둠과 불안과 공포의 날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심판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구원과 희망을 함께 선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선포하는 동시에, 새로운 미래의 희망을 선포합니다.

땅과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다윗의 통치와 함께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스라엘의 타락과 불복종으로 나라가 분열되고, 결국 북이스라엘은 BCE. 721년 앗시리아에게, 남유다는 BCE. 587년 바빌론에게 멸망당합니다.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스라엘의 희망은 꺼지지 않고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의 더 큰 약속으로 확대됩니다.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한 옛날의 약속을 평화의 왕 곧 메시야에 대한 약속으로 확대합니다(9:1-6).

예레미야 애가를 선포하는 역사적인 상황은 이스라엘이 앗시리아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한 이후, 즉 하나님의 심판으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미 종말을 맞이한 이후를 반영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말은 국가의 멸망으로 인해서 왕족과 귀족은 포로로 끌려가고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들은 식민지 시대를 살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암울한 시대에도 절망과 자포자기에만 빠져서 단지 슬퍼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과 파국의 고난을 뚫고 희망을 찾으려 합니다.

내가 겪은 그 고통,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그 고난을 잊지 못한다. 잠시도 잊을 수 없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언제까지나 버려두지는 않으신다. 주님께서 우리를 근심하게 하셔도, 그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다.”(예레미야 애가 3:19-33)

 

<우리의 고난, 종말 그리고 희망>

여러분에게 종말이란 말은 어떤 의미로 다가옵니까? 기독교에서 개인적으로 종말은 죽음이고, 역사적으로 종말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는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종말을 학수고대 기다리고, 그 종말이 온다면 기쁘게 맞이할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죽음은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일이기 때문에 슬퍼할 필요가 없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는 장례식에서 울고 있는 유족들을 야단치면서 천국에 갔으니까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면서 크고 작은 고난의 현실이 수시로 밀려오지만, 우리가 당하는 고난의 극한과 절정은 개인의 죽음과 역사의 종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종말을 준비한 사람들에게 그 순간은 희망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신앙인에게 종말은 구원의 사건이요,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죽음이 신앙인에게는 시간의 마침이요 완성이라고 한다면, 죽음은 역사 속에 제한된 시간과 공간의 틀을 넘어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하나님의 영원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때가 언제인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는 것이고, 하나님 영광의 시간인 카이로스를 우리 삶의 시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비록 지금의 현실이 고난과 두려움으로 휩싸여 있더라도 결코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희망과 평화의 시간을 미리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체험을 종말론적 선취라고 합니다. 종말에서야 이루어질 사건을 지금 여기서 미리 경험하는 삶입니다. 따라서 세상 종말은 고난과 절망이 아니라 언젠가 이루어질 우리의 희망입니다. 하나님은 인류가 당면한 위기에 맞서 우리의 노력 속에서 하나님이 약속한 세상을 만들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과 발로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의 마음을 바꾸시어 온 인류가 세상 속에서 함께 꿈꾸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그러한 체험을 통하여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시편 126:5-6) 이 고백은 포로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오는 사람들과 식민지에서 해방되어 평화와 자유를 되찾는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지금 당장 힘에 겨워하는 사람들에게는 고난에 희망을 연결시키는 것은 매우 사치스러운 말처럼 들립니다. 고난을 이겨낸 후 그것을 미화하는 미사여구처럼 들리기도 하고, 고난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헤픈 동경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 속에서 고난은 언제나 희망을 잉태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본질은 히브리 역사나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고난의 역사에는 희망이 산다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믿음은 오늘 나의 고난 속에서 희망을 보는 것입니다.

 

<기다림, 선택하며 행동할 때>

우리는 살면서 고난과 절망의 순간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예레미야 애가에서처럼 그 시간은 쓴 쑥과 쓸개즙 같기에 한시라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우리가 걱정하고 괴로워한 것은 변할 수 없는 사실 곧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의지하여 큰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기때문입니다.

불행한 군사독재와 유신독재와 검찰독재와 내란의 장본인들에게 면죄부를 주어 계속해서 그들이 이 땅과 사람들에게 쓴 쑥과 쓸개즙 같은 고난을 안겨주느냐, 아니면 새로운 희망의 빛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게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과 맹세를 의지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향한 전환점을 맞이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우리의 선택과 행동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참여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누가복음 본문은 세례자 요한을 낳은 후에 그의 아버지가 부른 사가랴의 노래입니다. 요한은 히브리어로 예호아난인데, “야훼께서 사랑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사가랴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을 노래하면서, 자기의 아들 세례자 요한을 이렇게 말합니다. “76 아가야, 너는 더없이 높으신 분의 예언자라 불릴 것이니, 주님보다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고, 77 죄 사함을 받아서 구원을 얻는 지식을 그의 백성에게 가르쳐 줄 것이다.” 이어서 예수님에 대하여 말합니다. “78 그는 해를 하늘 높이 뜨게 하셔서, 79 어둠 속과 죽음의 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이 세상을 어둠과 죽음의 그늘로 만드는 세력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자본을 더 모으려는 욕망으로 세상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권력과 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인민의 인권과 생명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우리가 대림절에 기다리는 일 중에는 더 이상 이 땅에서 이런 죽음이 없어야 한다는 믿음과 기도와 행동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성서에서 하느님을 체험하고 함께 한 사람들을 믿음이라는 관점으로 재해석하여 들려줍니다. 그 믿음은 인내가 필요한 것이고, 구원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구원을 기다리는 일은 희망을 품는 것이고, 이 희망을 이루는 힘이 믿음입니다.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과정으로써의 믿음은 삶의 방식이고 행동입니다. 구약성서의 사람들, 믿음으로 하느님 앞에 살았던 사람들은 아직 약속된 것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우리가 없이는 완성에 이르지 못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본받아야 할 믿음의 선배들이 우리의 믿음으로 인해서 완성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우리가 본 받아야 할 좋은 모법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그 믿음을 따라서 행할 때에 그들의 구원도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기다리면서 보내는 일상 속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역할을 할 수도 있고, 예수님의 역할을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언자이면서 메시야입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당하는 개인적인 고난은 결코 역사적인 고난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것이든 궁극적인 것이든 모두가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단순히 두려움의 상황이 아니라 우리에게 평온과 안식을 주기도 하고 새로운 일을 도모하기 위한 쉼과 기회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더욱이 어둠은 그 너머에 있는 밝음과 새날을 희망할 수 있는 바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면서 믿음으로 행동하며 준비하는 대림절에 조금이라도 예수님의 꿈을 이루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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