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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4-1) - " 정의와 공의의 시작과 끝은 형제 사랑입니다 " / 오정석 목사 > 대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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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대림절(4-1) - " 정의와 공의의 시작과 끝은 형제 사랑입니다 " / 오정석 목사

관리자 2022-12-14 (수) 12:47 2년전 587  

본문) 렘 23:5~8, 1:18~25, 요일 4:13~21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만날 수 있는 가장 큰 사건은 무엇일까요? 천지창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천지창조보다 더 큰 사건이 있습니다.

죄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하나님이시기를 포기하고 사람의 하나로 오신 사건, 바로 예수님의 나심이죠.

오늘은 이 성탄을 한 주 앞둔 대림절 넷째주일입니다.

성탄이 임박한 대림절 넷째주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속에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죄의 지배를 받는 피조물이라고 할지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한결같이 함께하시고 돌보시는 사랑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믿고 그 사랑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오늘 우리를 포함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어떠한 삶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고 맺어야 하는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구약에서는 정의와 공의가 훼손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배경으로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기준과 원칙을 바로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직시하게 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으시고, 구원받고 회복된 피조물들이 이후에 지속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도 말씀하십니다.

이어지는 복음서에서의 죄에서 구원할 자와 임마누엘이라는 예수님의 나심의 예고는 이러한 하나님의 개입하심의 극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서신서에서는 예수님의 나심이 곧 하나님께서 오신 대() 사건이라고 믿고 고백하는 자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그 길을 제시합니다.

대림절 넷째주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의미를 마음에 깊게 새겨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한다는 것을 증거하며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이제 먼저 구약 예레미야 말씀을 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아시다시피 남 유다의 요시야 왕 재임 기간부터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시드기야 왕 까지 활동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마음과 말씀을 대언하는 예레미야는 뭐라고 외칩니까?

5절과 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남 유다의 역사에 개입하셔서 반드시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고,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일컬음을 받는다고 외칩니다.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은 정의와 공의라고 합니다.

그러면 왜 예레미야가 남 유다를 향해서 이렇게 선포했을까요?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이 시점의 남 유다는 정의와 공의가 무엇인지 도무지 분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의와 공의가 자취를 감춘 지는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온갖 우상 숭배와 그에 따른 음란과 행악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남 유다의 무너진 정의와 공의의 여파는 자국 내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남 유다의 불공정과 부정의는, 급기야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고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끌려갑니다.

그러면, 정의와 공의가 사라진 나라의 마지막이 쫓겨나는 것이라면, 구원받고 회복되는 길은 철저한 회개와 정의와 공의를 회복하고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서 바로 이 말씀을 선포하고 계십니다.

죄의 지배를 받아 임의대로 하나님의 원칙인 정의와 공의를 훼손했던 것을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의 원칙인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우고자 할 때, 하나님은 구원해주시고, 회복시켜주신다는 말씀입니다.

8절의 말씀을 읽어봅시다. “이스라엘 집 자손을 북쪽 땅, 그 모든 쫓겨났던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할 것이며 그들이 자기 땅에 살리라 하시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세계 어느 곳으로 쫓겨나서 흩어져 살더라도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우며 살아가려는 자들을 인도해 내십니다.

그러면 본국으로 돌아온 자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나라를 빼앗겼던 이유의 역사를 되새기며, 살아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오직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우며 살아가야 합니다. 어리석은 실수와 잘못을 반복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원칙은 명확합니다. 공의와 정의입니다. 그리고 이 원칙을 지키려는 이들이라면 그 누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이 원칙을 지키도록 도우시고, 회복시켜주시고, 마침내 구원해 주십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오심을 알리는 복음서 말씀을 통해서,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나심을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전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은 동일한 분이십니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을 지니신 분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오늘 예레미야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이 예수님께로 계속해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태복음은 이 예수님을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라고 전합니다.

자기 백성들의 죄는 개인의 죄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의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의 종류가 다양할 테지만, 오늘 예레미야의 말씀에 의하면, 그 죄는 개인이든 공동체이든 정의와 공의가 훼손되고, 무너진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의와 공의가 무너진 것을 죄라고 말씀하시고, 그 죄를 구원할 자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말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떤 마음일까요? 이 땅에 무너진 정의와 공의가 계속해서 바로 세워지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옛날 눈물의 선지자를 통해서 남 유다에 전했던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 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죄에서 구원할 자로 오셨다는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원칙과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이 적용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바로 이어지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말씀과도 당연히 이어집니다.

정의와 공의를 원하신다는 동일한 원칙과 기준을 적용하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임마누엘의 의미도 깊이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사랑하시는 분으로써의 임마누엘이라는 말씀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동시에 원칙과 기준으로써의 임마누엘이라는 말씀도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써의 임마누엘로 받아들이든, 둘 다 하나님은 분명히 죄의 지배를 받는 우리를 살리시고, 회복시키시고, 구원하시려는 분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나심, 오심은 우리에게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우려는 한결같은 하나님의 원칙과 기준이 오늘날 개인의 삶과 한 민족과 국가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적용된다는 의미요, 이 하나님은 그 기준과 원칙에 따라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죄에서 구원해주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할 분, 그리고 임마누엘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당연히 정의와 공의를 훼손하는 죄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우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우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이에 대해서 서신서는 우리에게 선명하게 대답하십니다. 바로 성령을 받은 사랑입니다.

요한은 성령이 무슨 일을 하는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구원자로 믿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은 보다 구체적으로 그러면 성령을 통해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삶이 무엇인지 전합니다.

그것은 사랑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들의 면모를 보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첫째로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우는 삶이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음을 믿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고 하면서 정의와 공의와 너무도 멀게 살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요한은 이어서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곧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우는 첫째 면모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는 당연히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첫째와 두 번째라는 표현은 순위가 아닌 단순한 숫자 나열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 그리고 그로 인해서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우는 삶은 우열과 선후가 없이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다르게 불릴지 모르나, 한 뿌리에서 나온 같은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대림절 넷째주일에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정의와 공의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종결을 맺습니다.

하나님의 원칙과 기준은 분명히 피조물 세계의 정의와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이 질서가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진다는 것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무너지는 것, 망하는 것, 포기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반드시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회복시키시고, 구원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 증표가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하나로 오신 사건입니다.

이제, 이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마음과 계획과 뜻을 알았으니, 하나님 사랑과 동일한 형제 사랑으로 하나님의 원칙과 기준인 정의와 공의를 바로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러고보니, 정의와 공의만 하나님의 원칙과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도 하나님의 원칙과 기준입니다.

정의와 공의로 회복되고 구원받았듯이, 사랑함으로 회복되고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도저히 하나님께 사랑받을 수 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만큼, 미워할 형제를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깊이 되새기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내 안의 들보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참 사랑이 없었음을 회개하고,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이르듯이(빌 2:12) 날마다 구원을 이루는 길로 걸어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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