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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대림절(3-2) - " 예수만 바라보고 " / 김거성 목사

관리자 2022-12-09 (금) 17:17 1년전 341  

본문)  사 62:10-12; 히 11:32-12:2; 요 1:19-28

 


1. 실마리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로, 총회가 정한 인권주일이며 성서주일입니다. 함께 예배드리는 교우 여러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언제나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2. 예수의 사랑을 바라보고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첫째로,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의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유’를 강조하면서 민주주의에 더해 ‘자유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이클 무어는 ‘자본주의: 러브스토리’(Capitalism: A Love Story)라는 영화를 통해 여기에서의 자유란 사실은 ‘시장의 자유’일 뿐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즐겨 사용하는 개념이 바로 약육강식, 적자생존 이런 것들입니다.


 

지금은 조금 잠잠합니다만, 한 정치인이 자신의 책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모두가 자유로운 세상은 정글이죠. 또한 정글에는 나름의 법칙이 있습니다. 약육강식입니다. 강자가 다 먹는 세상이죠. 미국은 이런 정글의 법칙, 약육강식의 원리를 최소화하려는 노력을 별로 하지 않아요. … 그것이 자연의 섭리라고 보는 것이죠. … 저는 한국이 경제적으로 다시 도약해 선진국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미국식 자유의 가치를 사회 전반에 받아들이는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우 여러분, 이 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완배라는 분은 그런 관점을 다음과 같이 쉽게 설명합니다:


 

사자와 사슴이 붙었을 때 “자, 둘이 공정하게 싸우세요. 글러브는 똑같은 걸 끼시고요, 2대 1로 싸우거나 무기 들면 안 돼요. 오로지 1대 1로만 맞짱 뜨는 겁니다”라며 심판을 본다.


 

그리고 사자가 싸움에서 이기면(사자가 사슴과 싸워 질 리가 있나?) “이게 공정한 세상입니다, 여러분. 이 둘은 공정하게 1대 1로 맞짱 뜬 거니까요. 잔인하다고요? 약육강식이야말로 자연의 섭리이자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에 오른 원리라고요!” 뭐 이렇게 주장하는 것 말이다.1)


 

영화 <오징어게임>이 고발하는 것이 바로 그처럼 공정을 부르짖으면서, 사람들을 ‘공정하다는 착각’(마이클 샌델)에 빠지게 하는 우리 현실이 아닙니까?2)


 

히틀러 시대 독일에서는 우생학적인 관점을 내세워 장애인들을 세금을 갉아먹는 존재로 비하하였습니다. 나치당 월간지 ‘새 민족’ 표지에 ‘동족 여러분, 이것도 여러분의 돈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유전병 환자 사진을 싣고, “그에게 일생 동안 5만마르크의 돈이 들어갑니다”라며 ‘반(反)장애인’ 캠페인을 전개했습니다. 또 1939년 9월부터 1945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장애인 약 30만명을 일산화탄소 가스 등으로 살해했습니다.3) 이는 600만명의 유대인들 학살과는 별도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네이버 ‘지식in’에 어떤 사람이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우생학이 왜 잘못됐나요? 잘생기고 키 크고 똑똑한 사람의 자손이면 좋은 사람 낳을 거고 못생기고 멍청하고 그런 사람이 자식을 낳는다면 도태남녀가 나올텐데 인권문제 빼면 솔직히 우생학이 옳은거 아니에요?”


 

이 질문에 “유전적 다양성이 감소하여 결국 멸종하게 됩니다”라는 답변도 있었지만, “현재 우생학 지지단체를 운영중인 네오나치 조직의 광주 파시즘 총선전담당을 맡고 있습니다. 귀하의 질문에 적극 지지합니다.”라는 댓글도 보입니다.4)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독일 정치가들은 지속적으로 유대인학살 에 대한 죄악을 통감하고 국제사회에 용서를 구합니다. 독일 개신교도 히틀러와 나치의 만행에 동조한 그 당시 독일 제국교회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슈투트가르트 고백’을 하였고 ‘탈나치’ 작업으로 교회를 정화시키고 독일사회로부터 신뢰를 회복하였습니다.5)


 

 스스로 신앙인이라고 하려면 먼저 예수께서 병자들과 약자들, 소수자들을 어떻게 대하셨는지 살펴야 합니다. 중풍병자, 혈루병자, 문둥병자, 시각장애인, 지체장애인, 가나안 사람, 사마리아 사람, 여성들 등등. 주님께서는 이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반대하셨습니다. 오히려 그들과 함께하셨고 또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세계인권선언은 이처럼 약육강식의 동물적 시대, 차별의 시대, 야만의 시대를 끝내야 한다는 범지구적인 합의를 바탕으로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류 구성원의 천부의 존엄성과 동등하고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 세계의 자유, 정의 및 평화의 기초라는 관점에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함을 선언”합니다.6) 그리고 이 선언이 선포된 1948년 12월 10일을 인권의 날로 정했고, 또 오늘 인권주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에 젖어 사는 것이 아니라 공간적으로 또 시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이웃들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교계 일각에서 신앙의 이름으로 편견과 차별을 선동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보고 온갖 편견과 차별을 금지, 철폐하는 것으로부터 인권 개념이 시작됩니다. 따라서 차별금지와 인권옹호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신앙 실천의 시작입니다.


 

장공 김재준 목사는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주일에만 국한된 신앙생활을 넘어서 생활신앙을 주창했습니다. 믿음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자세로 살아가는 삶, 생활신앙이어야 합니다. 예수의 관점으로 이웃을, 또 세계를 보아야 합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개독교’라는 비아냥도 사라질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본문처럼 사람들이 신앙인들을 ‘거룩한 분의 백성’이라고 부르며, ‘주님께서 속량하신 백성’이라고 부를 것입니다.(사 62:12)


 

3. 예수의 수난을 바라보고


 

둘째로,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예수의 수난을,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막 8:34에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수난절기에 종종 가시 면류관을 쓰고 나무로 만든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무게와 고통을 느껴보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뉴스를 접합니다. 그렇지만 예수께서 저마다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그런 행위를 독려하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늘 히브리서 본문에는 믿음의 사람들이 겪은 다음과 같은 고난의 사례들을 열거하고 있습니다(히 11:35-38): 고문, 조롱, 채찍, 결박, 감옥, 투석, 톱질, 칼, 궁핍, 고난, 학대. 이런 고난들은 바로 예수의 시각에서 삶을 살아가려 할 때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런 길에서 터무니없는 누명을 쓰고 공격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본질은 예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데 있습니다.(막 8:35) 최선을 다해 우리의 믿음을 현실에서 실천하려 합니다. 이처럼 예수를 따를 때 일부러가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겪으신 십자가가 바로 이것이구나 느낄 때, 그것이 바로 예수의 수난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독실한 믿음의 청년 전태일은 자신이 청계천에서 도봉구 창동까지 타고 갈 버스비를 털어 이른바 ‘시다’라고 불렸던 나이어린 여공들을 위해 풀빵을 사 주었습니다. 심지어 추운 겨울에 맨발로 온 주일학교 어린이를 위해 자신이 신고 있던 양말까지 벗어 신겨주었다고 합니다. 52년 전 전태일은 ”노동자는 기계가 아니다. 사람이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항거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지극한 사랑으로부터 자신을 던져 암울했던 노동현실에 빛을 보여주려 했던 것입니다. 그의 묘비는 ‘기독청년 전태일’이라 쓰여져 있습니다.7)


 

그러면서도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 만한 자격도 없소.“라던 세례자 요한처럼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것입니다.(요 1:27)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베스트셀러로 기록된 <천국의 열쇠>라는 A. J. 크로닌의 소설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모습은 바로 주인공 프랜치스 치셤 신부가 자신의 첫 선교지를 찾아 무릎 꿇고 ”행위로서가 아니라 의도로서 심판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여기서 바로 그 ‘의도’가 바로 신앙의 자세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뒤를 따르고자 할지라도 우리의 무한한 책임의 크기에 비하면 우리가 해낼 수 있는 범위는 보잘 것 없을 따름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우리도 그저 악하고 게으른 종일 뿐이라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4. 예수의 부활을 바라보고


 

셋째로, 신앙인이라면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신앙인들이 십자가 없이 부활의 영광만 누리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신앙인들에게 최후승리라는 희망의 원천이요, 예수를 따라 사랑하며 십자가를 지고 함께 걸을 수 있는 용기의 바탕입니다. 찬송가 150장 가사처럼, ”최후 승리를 얻기까지 주의 십자가를 사랑하며 험한 십자가를 붙들“ 수 있도록 하는 원동력입니다.


 

 좁은 길을, 멀고도 험난한 길을 걸을 때, 바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구나’ 실의에 젖어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축 늘어진 어깨를 감싸고 눈을 밝혀 마음을 뜨겁게 해 주신 부활하신 예수를 알아보게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5. 매듭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성서의 말씀이 곧 인권의 바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성서주일이면서 동시에 인권주일로 지키는 것이 매우 뜻깊다 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 예수께서 세상에 오실 것을 기다리는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자기 욕심이나 세상의 유혹, 절망 등에 흔들리지 말고, 오직 예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다시 살핍니다. 세상의 온갖 아픔을 감싸며 십자가를 지며 함께 아파합니다. 그렇지만 ”깨치고 나가 끝내 이기리라“ 예수만 바라보고 부활의 희망으로 힘을 얻는 대림절기, 모든 교우들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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