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렘 23:5-8, 요일 4;13-21, 마 1:18-25
1)정의와 사랑이 사라진 대한민국
10월 29일 일어난 참사로 158명이라는 많은 젊은 희생자들이 죽었고, 또 그 이후에도 악플러들의 2차 가해를 견디지 못한 10대가 극단적 선택을 통해 생을 마감하는 일이 일어나는 등 이태원 참사는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진상조사를 통해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대책을 만들어야한다는 국민적 요구를 거부한 채 계속 강경드라이브를 하며 악셀 페달을 밟고 있습니다.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은 희생자들을 혐오하는 발언을 통해서 유족을 가슴을 난도질하고 있습니다. 유족들이 영정과 위패를 갖춘 제대로 된 분향소를 겨우 만들었는데 그 곁에서 유족들을 조롱하는 플랑카드를 내걸어 또 한 번 유족들을 괴롭히는 비정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희생자가 자기 가족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비통한 마음이 듭니다.
사랑은 사라지고 정쟁(政爭)만 남은 우리 대한민국이 안타깝습니다.
새 정부가 들어서고 계속해서 전(前) 정부 인사들을 향한 검찰의 수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대통령 장모와 부인이 연루된 주가조작 사건 등은 무혐의 판정을 받거나 공소시효를 넘기고 있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사법정의가 살아있는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정부는 계속해서 법인세 감면을 통해 부자들의 주머니를 지켜주는 정책을 펼치고 있고, 다주택자의 양도세 완화정책을 들고 나와 집 없는 서민들을 다시 괴롭히는 현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정의가 사라진 대한민국을 이렇게 참담한 심정으로 지켜보는 우리 가슴에 찬바람이 일어납니다. 정의가 무엇입니까? 바로 힘없는 사람들이 힘을 가진 사람들에게 털리지 않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정의 아닌가요? 힘을 가진 정부가 가난한 사람들의 주머니를 지켜주는 것이 정의지, 부자들의 호주머니를 지켜주는 것이 정의인가요?
2022년 사랑도, 정의도 사라진 대한민국 땅에서 주 오심을 기다리는 계절에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을 기다리며 하늘을 바라봅니다.
2)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주셔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리라
구약본문 예레미야 23장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메시아 고대(苦待)의 메시지입니다. 예레미야는 어찌 보면 비운의 예언자입니다. 나라가 망하는 것을 몸으로 겪어내며 눈물로 예언한 예언자입니다.
이미 북 왕국 이스라엘은 망한 상태에서 남은 유다도 제정신 못 차리고 이 나라 기웃 저 나라 기웃하며 도움을 받으려고 하며 하나님을 외면하고 멸망의 길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힘을 가진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배불리기에 정신이 없어서 가난한 민초(民草)같은 백성들은 유리방황하며 고달픈 삶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를 지켜본 예레미야 예언자는 오늘 우리 본문 바로 앞 절에서 “내 목장의 양떼를 멸하며 흩어지게 하는 목자에게 화가 있으리라. ……너희가 내 양 떼를 흩으며 몰아내고 돌보지 아니하였도다. 보라! 내가 너희의 악행 때문에 너희에게 보응하리라”(2절)는 정의의 외침을 외치며 오늘 본문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또 예레미야는 22장 15-16절에서 요시아 임금의 아들 여호야김을 책망하며 “네가 남보다 백향목을 더 많이 써서, 집 짓기를 경쟁하므로, 네가 더 좋은 왕이 될 수 있겠느냐? 네 아버지가 먹고 마시지 않았느냐? 법과 정의를 실천하지 않았느냐? 그 때에 그가 형통하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의 사정을 헤아려서 처리해 주면서, 잘 살지 않았느냐? 바로 이것이 나를 아는 것이 아니겠느냐? 나 주의 말이다.”며 가나한 백성들을 잘 돌본 요시야 임금을 칭찬하며 그 아들 여호야김을 책망했습니다. 에레미야가 말한 정의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제 배 불리며 호사를 누리는 불의한 여호야김을 책망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본 요시야 임금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그가 왕이 되어 지혜롭게 다스리며 세상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할 것이며 그의 날에 유다는 구원을 받겠고 이스라엘은 평안히 살 것이며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5-6절)라고 외쳤습니다.
다윗에게 일으킬 의로운 가지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오실 메시아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당시 유다의 지도자들 같은 힘없는 양떼 같은 가난한 백성들을 괴롭히는 불의의 통치자가 아니라 정의와 공의로 다스리는 왕이 되신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의 이 메시지 속에는 유다사회의 사회적 상황이 반영된 가난한 민중들의 희망이 투영(投影: projection)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발, 가진 자들의 횡포에 시달리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갈망이 담긴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임마누엘 하나님, 예수 오시다
갈릴리 나사렛 산골 마을에 사는 산골 처녀 마리아는 결혼을 약속한 요셉이라는 시골 청년과의 결혼을 앞두고 놀라운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 가브리엘이 그녀에게 나타나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으로 아기를 가질 것이며 장차 태어날 그 아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며 하나님께서 조상 다윗의 왕위를 그에게 주시리라고 일러주었습니다.(눅 1:30-33)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천한 시골 처녀에게 그런 일을 하신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또 그 정혼한 남편 요셉에게도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그런 일이 있을 것을 일러주었습니다. 사실 요셉은 약혼한 마리아의 배가 불러 오는 것을 보면서 조용히 마리아와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는데 주의 사자가 꿈속에 나타나 미리아를 데려 오라하며, 그 마리아가 낳게 될 아이가 오래 전에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처럼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게 될 것인데(사7:14), 그 아이가 이스라엘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시는데 이처럼 비천한 시골처녀와 총각을 통해서 일이 이루어지는 것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오늘 마태복음 본문은 그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 사회 가난한 사람들은 로마의 식민 통치 아래서 수많은 억압 속을 받으며 고통스럽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어디서 희망을 찾아볼 수 없이 암담한 삶을 살았습니다. 짓밟힌 백성들은 체념하며 겨우겨우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답답한 형편이었습니다. 이런 처지에 있던 산골 처녀 마리아와 시골 총각 요셉에게 이 소식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누가복음에 의하면 노래(마리아의 찬가)를 부르며 하나님이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여!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를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는 빈손으로 보내셨도다.”(눅 1:48, 51-53)라고 했습니다. 이 ‘마리아의 찬가’ 속에 억압받고 억울하게 사는 가난한 시골 사람들의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갈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시골 처녀 마리아 그리고 요셉의 가정에 태어났다는 사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정의를 보여주는 계시사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그들의 빈 마음에 오셨습니다.
4)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요한일서 4장 말씀은 하나님의 사람을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임을 요한은 강조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19절) 하나님의 ‘사랑의 선취(先取)’를 보여줍니다. 또 하나님은 그 본질이 사랑이라고 요한은 고백합니다.(16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이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하셨는가 하는 것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몇 백 년 전에 예언하시고 그 계획하신대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수백 년 전부터 준비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이 바로 우리의 희망이 됩니다. 불의하고 메마른 세상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까?
5)맺음
지금 정의가 사라지고 힘을 가진 사람들이 온통 우리 사회를 난장판을 만들고 있는 현실에서 정의의 하나님이 의로운 한 가지 곧 다윗의 집을 일으키시고, 그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신다는 약속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복음은 우리의 희망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지금 2022년 어둡고 갑갑한 이 땅에서 다시 정의와 사랑의 주님을 갈망합니다. 우리의 희망을 주님은 외면하시지 않으실 것을 확신합니다. 반드시 정의가 세워지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이 어려움에서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제 그 사랑을 받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처럼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야합니다.(요일 4:19-21)
이 대림절 그리고 성탄절을 기다리는 이 절기에 서로 미워하지 말고 사랑을 만들어가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