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슥 2:1~13, 롬 11:25~32, 눅 19:28~40
어떤 사람이 미국에 있는 친구의 초청을 받았습니다. 아주 어린 시절에 막역하게 지냈던 친구였지요. 얼마 전에, 그 친구가 혼자 낯선 타국에서 가서 모진 고생을 했지만, 마침내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터였지요. 그런데 친구가 잊지 않고 불러준 것입니다. 물론 모든 비용도 다 자기가 대겠다며 비행기 표도 보내주었습니다. 비행기에서 내려서, 공항 바로 앞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개그림 버스를 타고 열 정거장 가서 내리면, 자기가 직접 나와서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참 고맙고 친절한 친구입니다. 그 사람은 즉시 비행기를 탔습니다. 자리가 얼마나 편안한지 깜빡 잠들었는데 미국에 도착했습니다. 짐을 찾아 들고 공항을 나서니 역시나 바로 앞에 버스 정류장이 있었습니다. 이제 버스만 타면 됩니다. 무슨 ‘개그림’ 가는 버스라 했지요?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개그림 가는 버스가 오지를 않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손짓 발짓 다 섞어서 물어보아도 아는 사람이 없네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저 하염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지요. 정류장에서 밥도 못 먹고 온종일 눈 빠지게 기다렸습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요? 해가 넘어가며 어둑해질 즈음, 그 친구가 헐레벌떡 달려왔습니다. 이거 엄청 반갑기도 하고, 좀 야속해서 화가 나기도 하고, 눈물을 글썽이며 친구에게 따졌습니다. “이 친구야, 여기 개그림 가는 버스가 어디 있다는 거야?” 그러자 그 친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지요. “이 친구야, 개 그림이 그려져 있는 버스를 타랬지, 뭔 개그림 가는 버스야?” 아, 그렇군요. ‘개그림’이 아니라 개를 그린 그림 ‘개 그림’이었네요. 원래 우리말이 띄어쓰기도 어렵고 띄어 읽기도 좀 어렵지요?
대림절 둘째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우리에게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렸지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고 평화를 가져올 주님의 종을 기다렸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서 오셔서 우리에게 새 희망을 주시고, 빛을 비추어 주시며, 생명과 평화의 길을 열어주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어떤 모습으로 오실까요? 만약 예수님이 우리에게 버스를 타고 오신다면, 어떤 그림이 있는 버스를 타고 오실까요? 우리가 이 대림절에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른다면 우리도, 개그림 가는 버스만 기다렸던 어리석은 친구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래도 그 친구는 개고생은 했지만, 늦게나마 친구를 만날 수는 있었지요. 그렇지만 메시아를 잘못 기다렸던 이스라엘 백성은, 정작 자기들에게 찾아온 메시아를 배척하고, 핍박하고, 끝내 십자가에 못 박아버리고 말았습니다.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다행히도 우리에게는 이천 년 전에 예수님이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 알려주는 성서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어떻게 오셨는지 이야기해주는 말씀을 받아 읽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서, 오늘 예수님은 어떤 모습으로 오실지 생각해 보려 합니다.
예루살렘은 어떤 곳입니까? 이스라엘의 수도요, 중심이 되는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은 성도, 곧 거룩한 도시라 불리지요. 그 예루살렘의 중심은 또 무엇입니까? 성전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세계의 배꼽이요, 온 세상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물어봅니다. 이 거룩한 도성과 거룩한 성전의 주인은 누구일까요? 당연히, 마땅히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주인이지요.
예루살렘의 주인이시며 예루살렘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한편의 사람들은 기뻐하며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편의 사람들은 기뻐하며 찬양하는 사람들을 막고 저지하려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그들을 꾸짖어 달라고, 이게 무슨 짓이냐며 대들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기뻐하고 찬양했던 사람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이 아니었지요. 그들은 주로 갈릴리에서 온 무리였습니다. 예루살렘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자신이 예루살렘과 성전의 주인이라 착각하는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없애버리려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못하고 무너져 버릴 예루살렘 도성을 보시면서 마음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요?
그런데 그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들어가셨습니까? 예수님은 예루살렘 가까이 오셨을 때, 제자들을 마을로 보내시며 새끼 나귀를 끌어오라 하셨습니다. 누가 왜 푸느냐 물으면 주님께서 쓰실 것이라고 하라 하셨지요. 그래서 제자들은 새끼 나귀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옷을 나귀 등에 얹고서, 예수님을 태웠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습니다. 새끼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셨던 모습은 새끼 나귀를 타신 모습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사람들, 특히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속속들이 아는 허가받은 전문가들이지요. 대제사장은 하나님 가장 가까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율법학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독파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까맣게 몰라보았습니다. 그들은 도대체 하나님의 아들이 어떻게 오셔야 알아볼까요? 천군만마를 거느리고 황금 마차를 타고 온다면 알아보고 땅바닥에 납작하게 엎어졌겠지요? 하늘의 구름을 타고 눈부신 흰옷을 입고 온다면 알아볼까요? 아마 예수님이 그렇게 오셨다면, 그들은 누구보다 앞서 버선발로 달려와서 진창에 오체투지로 코를 박았겠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 새끼 나귀를 타고 오셨을 때, 그들은 몰라보았습니다. 아니지요. 죽어도 인정하지 못하고 인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 아들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 할지라도 그런 꼴은 받아들이지 않겠다, 그런 것이지요.
정말 이상하게도,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천 년이 지나고 이 천 년이 지나도, 조금도 전혀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실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라면, 앞에서 말한 대로 율법과 예언의 전문가 아닙니까? 그런데 그 예언서에서 메시아는 어떤 모습으로 온다고 했을까요?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슥 9:9) 스가랴 예언자의 예언이지요. 스가랴는 시온을 향하여, 예루살렘을 향하여, 뭐라고 말했습니까? 왕이 오신다고, 공의로운 왕이요 구원을 베푸는 왕이 오시는데, 뭐를 타고 오신다고요? 나귀입니다.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이 너무도 분명한 예언이 그렇게 어려운가요? 이렇듯 명백한 말씀을 누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 그야말로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은,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렇게 한사코 그것을 모르는 것일까요?
그들의 굳어버린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의 회칠한 믿음 때문이요, 완악한 독선 때문이지요. 한번 독선에 눈이 멀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정말 무서운 일이지요.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지독한 독선에 갇혀서 정작 하나님의 뜻을 배타하고 거역했습니다. 자기들이 예루살렘 성도와 성전의 주인이라는 무서운 독선에 갇혀서 정작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정죄하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스가랴 본문에서, 스가랴는 측량줄로 예루살렘을 재려는 사람을 만납니다. 그런데 측량은 왜 하나요? 뭔가 보수하거나 새로 지을 때 측량을 하지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새롭게 든든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을 훨씬 더 크게 넓히고, 돌 성벽이 아니라 불 성벽으로 완벽하게 보호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을 든든히 한 다음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안에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완전히 새롭게 하신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바빌론의 딸과 함께 사는 도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지금 겉으로는 예루살렘에 살지만, 그러나 그 실상은 바빌론 사람처럼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않는다, 그 말이지요, 바빌론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바빌론 사람들은 이방인인 이스라엘 백성을 무시하고 배척했습니다. 힘이 없다고, 약탈하고, 노예로 마구 부려먹었지요. 이스라엘 백성은, 억울하게 맞아 죽어도 어디 한군데 호소할 곳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또다시 지옥 같은 바빌론 도성으로 만들면 안 되지요.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머무르시는 예루살렘에는 많은 이방 백성들이 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것입니다.(11절) 새 예루살렘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서, 함께 더불어 사는 평화의 도성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가랴는 이스라엘 백성만의 배타적인 예루살렘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그런 새 예루살렘을 꿈꾸었습니다. 진정한 믿음은 완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마저 독점하겠다는 독선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방 사람에게 은혜를 베푸셨다고 해서, 누구처럼 삐치고 치졸하게 보복하려 한다면, 그를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택하신 것도 다만 은혜인데, 그것을 마치 무슨 특권인 양 시위하며 나댄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분명히 알려주셨는데, 자기가 바라는 것과 다르다고 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내쫓는다면, 그가 과연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그는 하나님을 바라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 욕심을 바라고 탐욕에 집착하는 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기다립니까? 예수님이 우리에게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면, 우리 교회에 그런 모습으로 오신다면, 우리는 기뻐하며 찬미할까요, 아니면 시끄럽다고, 문을 닫아버릴까요?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땅 가장 낮은 곳으로, 이 땅의 말구유로 오십니다. 우리가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기뻐하며 찬미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대림절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