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합 2:1~4, 롬 13:8~14, 마 25:1~13
기다림의 절기인 대림절 마지막 주를 보내고 있습니다. 기다림은 희망을 품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사는 시간 동안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기다림이란 우리가 현재 있는 곳과 우리가 있고 싶어 하는 곳 사이에 있는 메마른 사막이다.”<헨리 나우엔> 기다림은 현실의 꿈을 미래에 이루기 위한 길입니다. 그 길은 험할 수도 있고 평탄할 수도 있습니다. 살벌한 가시밭길일 수도 있고, 향그러운 꽃길일 수도 있습니다. 위태롭게 흔들리는 외나무다리일 수도 있고, 듬성듬성 놓인 징검다리 일 수도 있고, 튼튼한 콘크리트 다리일 수도 있습니다.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그 길이 어떠한 모습과 상태일지라도 가야하고 건너야 합니다. 기다림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이루기 위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다림과 희망 사이에는 지금 우리의 삶이 있습니다. 잘못된 믿음이나 사랑처럼 허황된 희망은 위험한 망상이 될 수 있습니다. 믿음과 사랑처럼 희망도 성숙함이 있어야 최선의 결과를 낳습니다. 허황됨을 판단할 만큼 충분한 인생 경험을 쌓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수술이 불가능한 중병을 진단받은 환자는 오래 살기를 희망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희망을 품는 건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절체절명의 순간에 맞닥뜨렸을 때 우리에게 남은 단 하나도 희망입니다. 산악이나 해양 사고나 홍수와 지진 같은 자연재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습니다. 그러나 희망만 품으면 이런 역경에서 살아남는 건 아닙니다. 희망에는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결의가 수반되어야 합니다. 의지를 동반한 희망은 절대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두 가지가 합해져야 희망을 현실로 만드는 데 필요한 행동을 낳습니다.
기다리면서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우리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그것을 믿음과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박국 2:4의 말씀인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바울에 의해서 인용되었습니다. 개인적인 믿음을 강조하는 개신교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말씀으로 인정되었습니다. 하박국이라는 이름은 “씨름하는 자, 포옹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씨름을 하거나 포옹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 안아야 하는데, 두 가지 행동은 서로 상반되는 모습입니다. 씨름은 상대방을 넘어뜨려야 하는 것이 목적이고, 포옹은 상대방을 받아들이고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언서 하박국의 핵심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인데, 하박국이라는 이름의 뜻에서 믿음의 양면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박국은 남유다가 바빌로니아의 첫 번째 침공에 의해 백성들이 1차로 유배당한 때(BCE 597년)부터 예루살렘이 함락(BCE 587년)되기까지의 비극적인 시대에 활동했습니다. 늘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언제 어떻게 죽을지 걱정되어 불안한 때입니다. 백성들의 평화와 생명을 보호해줄 왕과 그의 군대는 힘을 잃고 소위 지도자들이라고 하던 사람들도 자기들 살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남유다에서 공동체 내부적으로 악인이 판을 치고 불의가 만연한 때였습니다. “살려 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않으시고, ‘폭력이다!’ 하고 외쳐도 구해 주지 않으시니, 주님, 언제까지 그러실 겁니까? 어찌하여 나로 불의를 보게 하십니까?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보기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제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아주 시행되지 못합니다.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니, 공의가 왜곡되고 말았습니다.”<1:2-4>
밖에서는 바빌로니아의 침공이 계속 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사납고 성급한 민족이어서, 천하를 주름 잡고 돌아다니며, 남들이 사는 곳을 제 것처럼 차지할 것이다. 그들은 두렵고 무서운 백성이다. 자기들이 하는 것만이 정의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권위만을 내세우는 자들이다. 그들이 부리는 말은 표범보다 날쌔고, 해거름에 나타나는 굶주린 늑대보다도 사납다. 그들의 기병은 쏜살같이 달린다. 먼 곳에서 그렇게 달려온다. 먹이를 덮치는 독수리처럼 날쌔게 날아온다. 그들은 폭력을 휘두르러 오는데, 폭력을 앞세우고 와서, 포로를 모래알처럼 많이 사로잡아 갈 것이다. 그들은 왕들을 업신여기고, 통치자들을 비웃을 것이다. 견고한 성도 모두 우습게 여기고, 흙 언덕을 쌓아서 그 성들을 점령할 것이다.”<1:6-10>
그러나 하박국은 백성들에게 야훼 하느님의 묵시를 전달합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끝이 곧 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공연한 말이 아니니, 비록 더디더라도 그 때를 기다려라. 반드시 오고야 만다. 늦어지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한껏 부푼 교만한 자를 보아라. 그는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2:3-4>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라고 했는데, 여기에서 믿음은 교리적인 믿음이 아니라 현재의 암울한 상황에서도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는 믿음입니다. 하박국은 더 적극적으로, 오히려 역설적으로 지금의 상황에 감사합니다. “무화과나무에 과일이 없을지라도,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올리브 나무에서 딸 것이 없을지라도, 밭에서 거두어들일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에 양이 없을지라도,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야훼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련다.”<3:17-18>
하바국이 말하는 믿음은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지게 한 사람들에 대하여 “씨름하는 자”처럼 심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실행되지 못하는 세상을 주도하는 사람들, 약탈과 폭력과 다툼과 시비가 만연한 세상에서 지도자인 척하는 사람들을 주저앉히기 위하여 씨름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납고 빠르게 달리면서 자기들만의 정의를 내세우는 바벨로니아 사람들을 무찌르는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믿음은 하바국이 선포한 심판이 반드시, 늦지 않게 올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 것입니다. 현실의 어려움을 이러한 희망으로 이기려는 사람들을 “포옹하는 자”처럼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 모두가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삶의 방식입니다. 하바국의 믿음은 암울한 현실을 “씨름하면서” 극복하면서도 동시에 “포옹하면서” 헤쳐 나가는 삶의 방식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의롭다고 인정되어 이미 구원과 해방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믿음은 현실이 됩니다. 믿음은 삶의 방식으로써 삭막한 현실을 이겨내기 위하여 미래의 생명과 평화와 정의를 향한 희망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삶의 방식인 믿음이 때때로 “믿음주의”가 되어서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사랑을 잊거나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왜곡된 형태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입된 믿음은 형식만 남은 율법과 같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다는 명목으로 사람들을 미워하고, 자기의 욕심과 욕망을 충족시키려 합니다. 믿음과 사랑이 서로 다른 행동양식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전혀 다른 방향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 바울은 거듭해서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 강조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다 이룬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 하는 계명과, 그 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서 13:8-10)
몇 년 전에 “교회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들”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습니다. 참 공감을 많이 하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새벽기도에 오래도록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한 집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새벽기도에 빠진 목사와 장로들의 빠진 횟수와 날자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꼬박꼬박하는 신자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머릿속에는 십일조을 빼먹거나 제대로 하지 않는 동료 신자들의 목록이 빼곡히 들어 있습니다. 40일 금식기도를 다녀온 권사님의 눈길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시선에는 '너는 왜 금식기도를 하지 않느냐'는 무언의 질타가 섞여 있습니다. 크고 건강한 교회를 다니는 성도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말투에는 작고 별 볼일 없는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이 넘쳐납니다. 무언가를 깨달은 '안티'가 무섭습니다. 그분의 몸짓에는 깨닫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들을 향한 손가락질이 배어있습니다.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신학자가 무섭습니다. 그분 앞에 서면 모든 사람들이 종류별로 차곡차곡 분류되어 버리고 맙니다. 성도수가 제법 되는 교회 목사들이 무섭습니다. 그분의 권위와 무게가 엄청난 압박으로 성도들을 찌그러트립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는 오래 된 전통입니다. 너무도 경건이 몸에 배어 스스로 자신들을 구별된 존재라고 여겼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습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것도 모자라 울타리 율법까지 만들어 놓고 철저하게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심지어는 음식에 집어넣는 양념까지 십분의 일을 구분하여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신앙의 일상화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과시'의 일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율법과 경건이 종교의 광기로 치달았습니다. 그래서 수틀리면 사람들을 돌로 쳐 죽이고자 하는 무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입니다.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이 스승과 함께 40일 금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마지막 하루를 남겨 놓은 39일째 되는 날 젊은 제자 하나가 맛있는 스프 냄새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한 숟가락을 입에 떠 넣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함께 금식을 하던 제자들은 눈을 부릅뜨고 그 젊은 제자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눈길 속에는 유혹에 넘어간 불쌍한 영혼을 향한 애처로움이 아니라 분노에 찬 정죄의 따가운 시선이 들어 있었습니다. 유혹에 빠지지 않았던 제자들은 유혹에 넘어간 젊은 제자를 엄하게 꾸짖어주기를 바라며 스승, 프란체스코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프란체스코는 말없이 수저를 집어 들더니 젊은 제자가 먹었던 스프를 천천히 떠먹기 시작했습니다. 경악의 눈길로 스승을 쳐다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프란체스코는 조용히 말했습니다. “우리가 금식을 하며 기도를 드리는 것은 모두가 예수님의 인격을 닮고 그분의 성품을 본받아 서로가 서로를 참으며 사랑하며 아끼자는 것입니다. 저 젊은이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스프를 떠먹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를 정죄하고 배척하는 여러분들이야말로 지금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굶으면서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는 실컷 먹고 사랑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바른 신앙이 무엇인지, 경건의 폭력이 어떤 것인가를 분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39일 동안 무사히 금식을 마친 프란체스코의 제자들에게서 그들의 엄격한 경건과 돈독한 신앙이 오히려 형제를 짓밟고 자신들의 영성마저 망가트리고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이러한 이야기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율법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고 다른 이들을 욕하고 질타하면서 그보다 더 큰 사랑의 계명을 어기던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오늘 우리의 모습 속에서 확인하기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서로 긍휼하게 여기고 잘못했을 때에는 그 잘못을 꾸짖고 정죄하기보다는 잘못을 깨닫고 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내하면서 기다려주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경건은 겸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경건과 믿음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 대한 배타와 거부가 될 것이며 무엇보다 폭력이 되어 다른 사람의 영혼을 상하게 하는 끔찍한 범죄가 될 것입니다. 누구의 이야기랄 것도 없이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더구나 오늘날처럼 자아가 모든 것의 중심이 되도록 부추기는 이 세상 속에서 신앙생활을 잘해보겠다는 사람들이 쉽게 빠지게 되는 함정입니다. 사랑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인격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때로 종교에 실패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어떠실는지요?
구원을 기다리는 일은 희망을 품는 것이고, 이 희망을 이루는 힘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확신, 실체, 보증]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브리서 11:1) 궁극적인 목표에 대한 과정으로써의 믿음은 삶의 방식이고 행동입니다. 보이지 않는 가치들을 확실히 눈으로 볼 수 있는 증거로 만드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것들을 실제적인 상태, 구체적인 현실로 만드는 행동입니다. 우리가 함께 공유하고 있는 믿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의 생명을 더욱 풍요롭게 하고 생명의 근원을 나누는 일에 함께 할 수 있습니다.
기다림과 희망이란, 지금 내가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준비하면서 희망이 품안에 안기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상에 묻혀서 희망을 기다리겠지만, 우리는 일상과 하느님께 충실하면서 희망을 기다리고 만들어갑시다. 희망이란, 준비하고 기다리는 자의 몫이기에, 지금 내가 무엇을 준비하고 있고, 무엇을 이겨내고 있으며, 무엇을 기다리는지, 곰곰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 하느님 앞에서 여러분의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희망의 인내를 끊임없이 기억하고 있습니다.”(데살로니가전서 1:3)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희망의 인내. 믿음은 언제나 행위로 이어져야 하고, 행위는 믿음으로 규정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행위의 원인이고, 행위는 믿음의 결과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믿음이 행위로 드러나고, 행위는 믿음에 근거하여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해야 할 때 사랑의 수고가 드러납니다. 수고와 희생을 염두에 둔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며, 수고가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를 위해 기꺼이 나의 수고를 감당할 것입니다. 희망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어떠한 수난의 순간에도 오래 참고 기다림으로써 기어이 다가오는 것이 희망입니다.
대림절에 우리가 기다리는 것은 이천년 전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데, 무엇을 더 기다립니까? 기다림은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향한 것입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절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이고 내일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우리의 믿음의 방향이고 내용인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세상입니다. 이 땅이 그런 세상과 완전히 일치하는 일은 미래의 일이라지만, 지금 내가 함께 하고 있는 가족 교회 공동체를 그렇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 일은 멀고 험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다림은 미래이면서 현재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예수님의 오심은 생명과 평화가 넘실대는 미래이면서 현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