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말 3장 1-7절, 계 3장 1-17절, 눅 3장 1-17절
오늘 우리는 대림절을 시작하면서 말라기서의 말씀을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말라기는 오랫동안 바빌론에 유배되어 노예처럼 살다가 다시 고국으로 돌아온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예언자입니다. 말라기서는 불과 4장밖에 안 되는 짧은 예언서지요. 이 말라기서의 예언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말라기의 예언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무슨 말이 되겠습니까? “나에게로 돌아오너라!”(3:7) 저는 이 말씀이 말라기의 예언 전체를 집약하는 알짬 같은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대림절의 첫 말씀으로 새롭게 받아서, 우리의 마음 깊이 새겼으면 좋겠습니다.
나에게로 돌아오너라! 참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탕자가 돌아오기를 애타게 바라는 아버지의 품처럼, 따뜻하고 자비로운 말씀이 아닙니까? 그런데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말씀은 좀 이상합니다. 말라기는 바빌론 유배지로부터 이미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바빌론 유배지에 남아 있는 백성에게 ‘돌아오라’고 하거나, 돌아오고 있는 사람들에게 빨리 ‘돌아오라’고 말한다면 말이 되겠지만, 이미 고국으로 돌아와 있는 백성에게 ‘돌아오라’고 말하는 것은,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말라기가 ‘돌아오라’고 말하는 것은, 단지 바빌론에서 팔레스틴으로 그 장소를 옮기라는 말이 아닙니다. 바빌론에서 살다가 시온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곧바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포로 귀환은, 진짜 구원은 바빌론에서 팔레스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데 있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하나님께 돌아간다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었을 때, 백성의 지도자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한다고 생각한 과업이 있었습니다. 그게 뭘까요? 그렇습니다. 성전재건입니다.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성전을 재건해야 했습니다. 성전은 곧 그 백성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장소가 아니겠습니까?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쌓고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는 것은, 그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의 중심을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에스라기와 느헤미야기는 그들이 성전을 재건하고 성벽을 수축하기 위하여 얼마나 힘을 쏟았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야말로 전심전력하였지요. 그렇게 해서 마침내 기원전 515년경에 성대한 봉헌 제사를 드렸습니다. 첫 제물로 수소 백 마리와 숫양 이백 마리와 어린 양 사백 마리를 바치고, 속죄 제물로 이스라엘의 지파 수대로 숫염소 열두 마리를 드렸습니다.(에스라 6:15 이하)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은 고국으로 돌아와서 맨 먼저 거룩한 성전을 재건하고 성대한 예배를 드렸습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이만큼 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돌아온 것이 아닐까요?
그러나 아니랍니다. 말라기는 그런 것만으로는 하나님께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라기서를 일어보면, 그 초입부터 정말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 있지요. 그게 무엇입니까? 바로 제사장들에 대한 혹독한 비판입니다. 제사장이라는 것들이 하나님께 더러운 빵과 부정한 제물을 바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누가 성전 문을 닫아걸어서 하나님의 제단에 헛불을 피우지 못하게 하면 좋겠다고 말하지요. 차라리 성전 문을 닫아걸었으면 좋겠다! 이 얼마나 참담하고 비통한 말입니까? 하나님의 심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가 아니지요. “너희가 바친 희생 제물의 똥을 너희 얼굴에 칠할 것이니, 너희가 똥 무더기 위에 버려지게 될 것이다.”(2:3) 제사장들에 대한 하나님의 저주, 정말 두려운, 두렵고 또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은 왜 그렇게 섬뜩한 저주를 받게 된 것일까요? 그들이 실제로 때 묻은 빵을, 더러운 빵을 바쳤기 때문일까요? 그들이 진짜 병들고 흠 있는 짐승들을 드렸을까요? 아니지요. 그들이 드린 빵이 더럽다는 것은 그 빵이 유통기한을 넘겼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들이 바친 양이 부실하다는 게 아닙니다. 제물을 바치는 그들 자신이, 제사를 드리는 그들 자신이 더럽고 부정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눈을 씻고 보아도 없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더러운 탐욕으로 가득하고 그들이 하는 짓이 더럽고 추악하기 그지없다는 말이지요. 그들이 하는 온갖 악행을 보고 사람들이, 기독교가 아니라 개독교라고, 하나님을 멸시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차라리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성전과 이런 제사장들을 보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내가 나의 특사를 보내겠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실 길을 닦을 특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 특사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 오시는 그 길을 닦는 특사가 오는 것,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것은 그야말로 이스라엘 백성이 그토록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일이 아닙니까? 그런데 조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특사가 오는 날은 그토록 바라고 바랐던 구원의 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오히려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금과 은을 연단하는 불고 같고, 온갖 더러운 것을 표백하는 잿물과 같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가 오시는 날은 똥물을 뒤집어쓰는 치욕과 고통의 날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말라기보다 조금 앞서 예언했던 스가랴도 ‘너희는 나에게로 돌아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악한 길과 악한 행동을 모두 버리고 돌이키라고 외쳤습니다.(슥 1:4) 그렇습니다. 일찍이 이사야도 악한 자는 그 길을 버리고,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주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지요.(사 55:7) 악한 생각을 버리고 악한 길을 떠나고 악한 행동을 돌이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라기는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3:16, 4:2)을 주목합니다. 말라기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에, 모든 교만한 자와 악한 일을 하는 자가 지푸라기 같이 타버릴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뿌리와 가지까지 남김없이 태워 버리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 날에 외양간에서 풀려난 송아지처럼 뛰어다닐 사람이 있습니다. 외양간에 갇혀 있다가 풀려난 송아지, 그 얼마나 겅중겅중 신나고 천방지축 자유롭습니까? 그렇게 맘껏 자유롭게 힘차게, 정말 기쁘고 즐겁게 춤추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누구일까요? 그들은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 그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지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 마음을 회복하는 것, 다만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 순전함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말라기가 말하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에서 세례 요한의 이야기를 함께 받아 읽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말라기가 예언했던, 주님의 길을 준비하려고 온 하나님의 특사라고 할 수 있지요. 요한이 평범하게 자랐다면, 그는 아마도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 사가랴가 제사장이었으니까, 그 아들이 제사장이 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이 아니라, 광야에서 외치는 예언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이 광야에서 외칠 때, 예루살렘 성전은 어땠을까요?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이 이룬 가장 큰 업적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헤롯의 성전은, 포로 귀환기에 재건한 성전은 말할 것도 없고, 솔로몬이 지은 성전보다 훨씬 더 컸습니다. 헤롯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거대하고 화려한 성전을 지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 성전의 위용에 압도당해서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였지요. 그렇게 거대한 성전에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성전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제사장의 아들로 자란 요한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서 광야로 갔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광야에 ‘하나님의 말씀’이 내렸습니다.
요한이 받은 그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요한이 선포한 것은 바로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회개, ‘메타노이아’입니다. 이 회개는 또 무엇입니까?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지요. 요한은 일찍이 말라기가 선포했던 것처럼, 광야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 도끼가 나무의 뿌리에 놓인 것처럼, 주님이 오시는 날이 임박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서 빨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말하는 회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 돌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요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례 요한이 말한 광야의 소리를 그대로 한번 들어 봅시다. “속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11절) “너희에게 정해 준 것보다 더 받지 말아라.”(13절) “아무에게도 협박하여 억지로 빼앗거나, 거짓 고소를 하여 빼앗거나, 속여서 빼앗지 말고, 너희의 봉급으로 만족하게 여겨라.”(14절)
어떻습니까? 참 너무 싱겁지 않습니까? 세례를 받으러 온 무리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독설을 퍼붓던 요한입니다. 도끼가 이미 나무의 뿌리에 놓였다고 다그치던 요한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그 안락한 세습의 길을 버리고 황막한 광야로 뛰쳐나온 요한입니다. 그 기세라면, 다 버리고 바치고 나만 따르라고, 지갑에 있는 거 다 털고 금이빨도 뽑으라고 겁박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요한은 속옷 두 벌 있으면 그 하나를 다른 사람에게 주랍니다. 먹을 것도 그렇게 하랍니다. 정해진 대로 하라네요. 네 몫으로 만족하라네요. 이게 뭘까요? 이게 어떻게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란 말입니까? 이게 무슨 회개란 말입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요한이 말하는 회개란, 가진 재산을 다 팔아 바치라는 공갈 협박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회개란 무엇입니까? ‘異常’한 것을 버리고 ‘正常’으로 돌아오는 것 아닙니까? 마땅하고 자연스러운 ‘일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요한의 시대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요? 속 옷 한 벌이 있으면 한 벌 더 마련해서 두 벌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두 벌이 있다면 세 벌 네 벌, 아니 열 벌을 쌓아두어야 했지요. 곳간을 크게 짓고 가득 채워야 ‘영혼’이 안심되고 즐거웠습니다. 그게 그 시대 사람들의 상식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렇지요. 최대한 부가가치를 늘여야 하지요. 정해 준 것보다 슬쩍 더 받아야 합니다. 저 빌라도나 헤롯이나 안나스는 뒷문으로 천문학적인 뇌물을 받고도 29만 원밖에 없다는데, 조금 더 받는다고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세상이 다 그런데, 그게 피차일반인데, 상식선에서 하면 되는 거지 뭐 그렇게 빡빡하게 굴겠습니까? 협박하고 속이지도 않았는데, 서로 상부상조하는 건데 뭐가 문제겠습니까?
세례 요한의 시대에 사람들은 그렇게 옷 한 벌로는 안심하지 못했습니다. 정해 준 대로는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있는 것만 가지고는 도무지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쌓아두어야 안심하고, 넘쳐야 만족하고, 이겨야 행복했습니다. 아니지요. 쌓으면 쌓을수록, 넘치면 넘칠수록, 이기면 이길수록 더 불안하고 더 허기지고 더 불행해 갔습니다. 세례 요한은 그 생활 속에 시나브로 일상화된 죄악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은, 그렇게 그들도 모르게,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게(계 3:16), 그들의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맘몬의 달콤한 지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