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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1-1) - " 기다림이란 항해를 순항하려면 " / 최부옥 목사 > 대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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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대림절(1-1) - " 기다림이란 항해를 순항하려면 " / 최부옥 목사

관리자 2020-11-26 (목) 20:23 3년전 1016  

본문) 사 60:15~22, 눅 1:5-25, 갈 3:15-22                     

 

대림절 첫째 해의 첫 주일입니다. 때는 소설(小雪)을 지나서 영하의 날씨에 넘나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번 코로나19가 독감 증상이 비슷하다고 하니, 그 어느 때보다도 감기 조심해야할 때입니다. 때맞추어 세계인이 기다리던 코로나 예방약인 백신들이 개발되어 생산되기 시작했다고 하니 환영하지만, 그래도 자기관리에 더욱 집중하셔서 끝까지 이 고비를 잘 넘기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에 노아와 그 시대 사람들과의 차이와 그 결과가 무엇인지를 확인하였습니다. 노아는 그 시대의 일반적인 인간들과는 달랐습니다. 임기응변에 능하기보다는 본질과 기본이 튼튼한 사람이었습니다. 삶의 시각과 흐름과 경향이 달랐습니다. 사익보다는 공익을, 나보다는 우리를, 대립과 갈등보다는 협력과 평화를, 단독보다는 함께를, 독점보다는 공유를 선택하는 삶을 과감히 택하며 산 인물이었습니다. ‘인간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을 지향하고 살았습니다. 

 

한 가지 묻습니다. 여러분은 ‘인간 중심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삶’이란 말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혹 하나님 중심이 되면, 인간인 나와 내 현실은 아예 무시당하고 내 삶 자체는 아예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작은(약한) 그릇과 큰(강한) 그릇의 공존방식을 생각해 봅시다. 

작은 그릇의 보호와 생존은 언제 가능합니까? 부모 품속의 아이처럼, 크고 강한 그릇 속에 약한 내가 담겨 있을 때가 아닙니까! 나약하고 부족한 자의 생존 지혜도 그렇습니다. 인간이 아닌 하나님 중심의 삶을 선택하고 사는 일은, 약한 내가 강한 전능자의 강함과 풍요를 누리며 살자는 것입니다. 그 점에서 노아의 생존 방식은 본질적으로 약자의 것이 아닌 강자의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거기에 눈이 뜨고 마음이 열려야 됩니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죠!

 

특히 코로나 시대에 맞이하는 대림절(待臨節)기는 그 어느 때보다도 남다른 시각과 행동이 요청됩니다. 그리고 포스트 코로나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그 어느 때보다도 새 윤리(뉴모럴)강령이 필요하고, 보다 차원 높은 영성(靈性) 운동이 필요합니다. 어떤 새 윤리와 영성이 필요합니까? 이제 그 답을 이번 대림 절기에서 새롭게 찾고자 합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기다리는 존재입니다. 기다림이란, 배를 타고 긴 항해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짧게는 인생을, 역사를, 그리고 영원을 향한 항해나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성서의 백성들은 기다림에 능한 사람들입니다. 기다리면서, 자기 삶의 목표도 확인하고, 인내하며, 그 세계와 그 때에 적합한 자신이 되도록 준비하며 삽니다. 이런 모습은 불신앙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차별화된 모습입니다. 동시에 왜 신앙인들이 세상에서 왕 노릇하게 되는 지에 대한 대답도 됩니다. 

 

노아가 당대의 의인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도 그렇습니다(창6:9). 그가 하나님의 심판 계시와 방주건립의 지시를 받은 후, 아주 오랜 세월을 믿음으로 기다리고 준비하면서, 그 말씀을 좇아 살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잘 기다리는 사람들은 큰 것을 받습니다. 기다림이 깊을수록 좋은 것도 받습니다. 하지만 매사에 서두르고 급하게 대처하면, 그 대가는 허망합니다. 가볍고 빈곤할 뿐입니다. 이를 위해 나다나엘 호손의 <큰 바위 얼굴>이란 단편소설이 주는 메시지를 잠시 소환하겠습니다.

 

주인공 어니스트가 사는 동네엔 큰 바위 얼굴이 있었는데, 어니스트를 비롯한 동네 사람들은 언젠가 그 바위를 닮은 큰 위인(偉人)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큰 바위 얼굴을 닮았다고 기대되는 네 명의 인물들이 있었습니다. 부자 개더골드, 장군 올드 블러드 앤 선더, 유명 정치인 올드 스토니 피즈, 그리고 한 유명한 시인이 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니스트는 그들 모두에게서 실망합니다. 그들에게 드러난 내면의 부정적인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부자에게선 탐욕을, 장군에겐 지혜와 자비의 결여를, 정치인에게선 사랑의 부재를, 그리고 시인에게서는 그의  사상을 생활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그의 노년에 발생합니다. 그 시인과 다수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어니스트 자신이 바로 그 큰 바위 얼굴과 닮은 자라는 칭송을 받는 일이 발생한 것입니다. 그 까닭은 그의 가슴에 담긴 오랜 소망과 기다림이, 그 자신을 그 큰 인물로 숙성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깊은 기다림의 사람인 그가, 자신도 모르게 그 큰 바위의 주인공의 향기를 발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그 소설만의 이야기일까요? 아닙니다. 모든 성서의 인물들의 이야기입니다.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다림을 주제로 한 대림(待臨-Advent)절이 주는 절기신앙의 축복은 매우 놀랍고 큽니다. 기다림의 긴 항해를 잘해낸 사람들은 모두 복을 받습니다. 반면에 바라는 것이 없이 얄팍하게 산 사람들은 얻을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에게 따돌림을 받게 될 뿐입니다. 명심합시다. 기다림은 삶의 보배입니다!

 

이 첫 주일의 말씀들을 봅시다. 본문들에는 오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한 증언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메시아가 오실 징조들과 인간이 왜 그를 대망하는지 그 이유들을 제시합니다. 자세히 보십시오. 메시아 오심의 무슨 여명(黎明)이나 동녘(dawning)이 보입니까? 보셔야 합니다. 무너진 세상을 되살리려 오실 메시아 오심의 전조(前兆)들을 확인하고, 우리 대응책도 세워야합니다. 

 

이사야서는, 창조주 하나님이 오셔서 그를 고대하고 사모하는 그의 백성들에게 안겨줄 위로와 영광의 세계를 예고합니다. 기다리는 자들에게 비전과 목표를 주신 것입니다. 복음서는 그런 역사의 대변혁을 이끌어내실 당사자인 예수의 등판을 위하여, 그 선발대로 온 세례 요한의 탄생을 전합니다. 서신서는 그런 예수와 그의 복음이,결국 모세의 율법의 강고한 담을 넘어야, 그들의 조상들에게 주셨던 오랜 언약과 연계(連繫)되어, 온 세계인들에게 생명을 안겨줄 수 있음을 알립니다.

 

메시아 대망(大望)의 기조(基調)가 된 이사야 예언

바벨론 제국이 패망하고 고레스가 페르시아란 새 제국의 황제로 등장하자. 이스라엘은 본국에로 귀환하는 절호의 기회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미래를 설계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 일은 역사의 주이시자 그들의 주권자인 여호와의 몫이었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미래를 향한 하나님의 비전을 선지자를 통하여 펼쳐 보이신, 하나님의 은총의 약속들입니다. 실로 가슴 설레게 합니다.

 

1) 예언은 매우 직선적입니다. ‘전에는 완전 버림받은 슬픈 인간이었으나, 이제는 세상이 우러러보는 존귀와 영화를 누리는 존재가 될 것이다.’ 어떻게 이런 대변신이 가능할까요? 그것은 오직 전능하신하나님의 놀라운 의(義)가 드러날 때에만 가능합니다. 특히 그 때 발생한 상황의 변신에는 중요한 특징이 있습니다. 일단 시작되면, 다시는 옛날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다는 점입니다(18-20절,눅16:26참조)! 

 

2) 그러면, 이들은 언제 ‘버림을 당했고 미움을 당했으며 모두에게 외면당한 신세’였던가요(15절)? 바로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무려 70년 가까이 피(被)지배 민족의 설음 속에서 눈물로 세월을 보냈던 그들의 엄혹했던 때를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포로생활은, 자신들의 죄악으로 인하여 그들의 하나님으로부터 징벌로 받았던, 일종의 복역(服役)의 때였습니다(40:2). 그 때에는 하나님이 겉으로는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신 듯하셨으나, 실상은 투 트랙(두 갈레)으로 일하시던 때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을 바벨론 왕의 신하들로 들어가게 하셔서, 그곳 제국의 대왕들과 신하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진정 어떤 신인지를 계속 보여주게 하셨고(다니엘서 참조), 또 한 편으로는 포로 된 백성들이 눈물과 참회로 자신들과 조상들의 범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돌봄과 회복의 때를 고대하게 하는 마음을 갖도록 이끌 으셨습니다. 

 

☞ 이를 깨닫지 못하던 백성 중에는, ‘여호와가 어디 계시냐’라고 볼멘소리들도 하였으나(40:27), 여호와는 그들을 위하여 진정 졸거나 주무시지도 않으셨습니다(시121:3-4 참조). 그들의 <포스트 바벨론 시대>와 <새롭고도 영원한 이스라엘>을 향한 준비에 전념하셨습니다. 본문인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비전과 계획’은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무능한 신에게선 상상 못할 일입니다!

 

3) 버림당한 자의 회복과 번영의 실상을 봅시다. 이 일은 오직 하나님이 그들 편이 되시고, 그들과 함께 하시는 뜨거운 사랑을 공개적으로 드러내 보이실 때에 나타날 자연스러운 현상들입니다 :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들이, 이제는 온 세상 모두의 선망(羨望)의 대상이 됩니다(15절).

- 이방 세계의 협력과 배려를 꾸준히 받습니다. 여호와가 그들과 함께 하심을 본 것입니다(16절). 

- 그들(외면자)의 공궤(供饋)를 받게 되고(16절), 최상의 합법적인 우대(優待)를 받으며(17절), 

  강포로 인한 억울함이나 황폐와 파멸이 없이, 오직 구원과 평화의 주거생활을 즐깁니다(18절). 

- 여호와가 친히 그들의 빛과 영광이 되시기에-, 슬픔은 사라지고, 모두가 의인이 되며, 영생의 기업도 상속하고, 모두가 조상의 위치와 강국을 이루는 영향력이 큰 인물들이 됩니다(19-22절). 

 

4) 그렇다면, 이런 놀랍고 영광스러운 완전한 변신이 이루어질 때는 언제입니까? 본문 마지막 대목에 그 답이 있습니다-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22절,하). 그 바람에 이스라엘은 이 약속의 성취를 믿고 기다리며 사는 종말론적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 때가 언제 일까요?

 

‘그 때’의 문을 연 세례 요한의 탄생

요한은 이사야에게 ‘예고한 그 때’를 열기 위하여 하나님이 친히 보내신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새 인류 창조의 문을 열고, 그 앞길을 준비하기 위해 보냄 받은 주의 사자였습니다. 그에 대한 예고는 이미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통보되었고(말3:1), 와서는 그리스도의 앞길을 평탄케 하고자 ‘외치는 자의 소리’로 활동한 사람이었습니다(눅3:4). 본문은 그런 그의 탄생을 소개합니다. 

 

1) 그는 제사장 아비야 반열(班列)의 후손인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조상 아비야는 바벨론 포로 귀환 시에 돌아온 4개열 중의, 여덟 번째 제사장입니다(5절,대상24:10). 요한의 부모는 하나님의 모든 계명과 규례를 흠 없이 준행한 의인들이었습니다(6절). 하지만 늙도록 자식을 두지 못해, 늘 간구하며 살아온 제사장이기도 했습니다(13절,상 참조). 

 

2) 이 사가랴가 천사 가브리엘로부터,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라’(13절)는 통보를 받게 된 현장은, 그가 제사장 직무 수행을 위하여 주의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던 향단 우편이었습니다(8-11절). 당시 전국에 흩어진 제사장 각 반은, 해마다 한 주씩 두 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제비뽑기에서 뽑힐 때, 성전에 들어가 제사장 직무를 수행하던 규례가 있었는데-, 마침 사가랴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졌고, 그 분향 단에서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과 통보를 받은 것입니다! 

 

3) 천사는 요한의 탄생 소식을 ‘좋은 소식’(Good News)라고 말하였는데(19절), 그것은 몇 가지 중요한 이유들 때문이었습니다. ①부모의 오랜 간구에 대한 응답이었기 때문이고, ②부모는 물론, 모든 이들에게도 큰 기쁨을 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13-14절). ③모태로부터 성령 충만을 받아서 태어났고, ④평생을 나실인으로 살면서 주의 큰 자가 되어, 수많은 이스라엘 자손을 주께 돌아오게 할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⑤무엇보다도 어버이의 심정으로, 주 앞에서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시킬 주의 사자가 될 것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15-17절). 

 

4) 해프닝도 있었습니다. 기도는 오래했으나 정작 응답이 오자, 의심부터 한 사가랴의 행보에 엄중한 경고성 벌칙이 있었습니다. 아기가 태어날 때까지 아빠인 사가랴 제사장이 벙어리가 된 일입니다(18,20절). 그래도 상황은 진행되었고, 임신5개월 된 늙은 엄마의 찬양도 터졌습니다(25절).  

- 대림절은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한 내 헌신과 봉사가 절대 필요한 절기입니다. 나의 수고와 헌신이 깊을수록 주의 임재가 임박할 터이니까요!

 

복음을 위해 율법이란 휘장을 걷어낸 일

예수의 복음이 온 세계에 구원의 능력이 되게 하는데, 최대의 장애는 유대교의 율법입니다. 이방인 중심의 모든 초대교회들은 한결같이 율법 문제로 내적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이 금과옥조(金科玉條)의 강력한 신앙과 삶의 규범이었지만, 이제 세계인을 품어야할 예수의 복음 앞에는 율법이 주역이 아닌 조역이어야만 했습니다. 자리 교체에 따른 진통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본문의 갈라디아 교회도 그 상황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성령은 사도 바울을 이 문제의 해결사로 세우셨습니다. 

 

1) 바울이 이 문제 해결책으로 접근한 방법은, 모세보다 430여 년 전에 존재한 족장들인 아브라함-이삭-야곱에게 하나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주셨던 언약(言約)들에 대한 우선권 강조였습니다. 훨씬 후대에 주어진 모세의 율법으로는, 훨씬 이전에 조상들이 받았던 하나님의 언약에는 절대로 손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후손들이 자기들의 조상의 유언에 감히 손댈 수 없음과 같습니다(15,17절)

 

2) 바울은 특히 메시아 예수의 탄생이 이미 첫 조상인 아브라함에게 통보되었던 점도 지적합니다. 곧 모리아 산에 네 아들 이삭을 바치라'하셨던 여호와의 명령에 아비인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을 보이자, 여호와가, 그에게 특별히 주신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곧 ‘또 네 씨(seed/단수)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22:18절). 여기에서 씨는 그리스도를 지칭했습니다(16절). 


3) 예수가 그런 위치에 계신 분이기에, 이제 아브라함과 예수 사이의 모세의 율법은 예수의 복음 앞에 길을 비켜 주어야합니다. 구원의 길은 율법이 아닌 믿음에 있음을 인정하면서 말입니다. 율법은 예수가 오시기까지 주의 백성들을 돌보는 안전망이며, 인간들을 예수께 잘 인도하도록 돕는 후견인일 뿐입니다. 주인이 오면 종은 주인께 당연히 자리를 비켜드려야 마땅하잖습니까-!

-대림절은 내 안에 있는 율법같은 것들(소신,주장,신념,이념등)을 주의 길를 열기 위하여 내려놓은 절기라는 생각을 해야할 때입니다.  

 

결론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삼위일체 하나님은 아주 오래 전부터 그가 오실 세상의 모습을 미리 약속하시고, 당신이 친히 예수란 인간으로 오셔서는 그 약속이 성취된 모습까지도 다 보여주셨습니다. 비록 예수가 세상의 구세주가 되시는 데에 장애들은 많았으나, 그럼에도 성령께서는 택하신 그의 교회와 사람을 앞세우셔서, 주님의 약속하신 그 영광을 모든 믿는 자들이 누리게 하시려고 계속 일하십니다. 주님은 꼭 다시 오십니다. 누가 그의 영접을 받게 될까요? 분명 그의 오심을 믿고 견디며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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