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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4-3) - " 정품사 " / 이훈삼 목사 > 대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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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대림절(4-3) - " 정품사 " / 이훈삼 목사

관리자 2019-12-21 (토) 11:19 4년전 1700  

본문) 렘 23:5-8, 요일 4:13-21, 마 1:18-25


1. 의로운 요셉

 

1)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는 바른 것이다. 개인이나 사회가 바른 것을 추구할 때 발전할 수 있고 바르지 않은 것에 관심하고 따라가면 실패한다. 무엇이 바른 것이냐는 문제는 각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바른 것을 실행하고 그른 것을 심판하는 것은 정의로운 삶과 사회의 첫걸음이다.

정의를 실행하지 않아도 문제고 불의를 심판하지 않아도 세상은 혼란스럽다. 그래서 사법부는 정의를 세우기 위해 불의를 엄단한다. 사법부가 권력이나 사적인 감정에 얽매여 불의 심판하기를 소홀히 하면 악은 만연할 것이다. 정의 실현과 불의 심판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2) 읍참마속 : 정의가 분명하지 않으면?

삼국지 후반부에 읍참마속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촉나라 제갈량이 위나라를 공격하자 위나라는 명장 사마의가 대응한다. 뛰어난 전략가인 사마의가 나왔다고 하자 천하의 제갈량도 어느 장수를 보내어 사마의에 대항할지 고민에 빠진다. 이때 마속이 자원하여 사마의를 이기겠다고 나선다. 마속도 뛰어난 장수였으나 사마의와 비교하면 모자란다고 여긴 제갈량은 주저하다가 만약 실패하면 목숨을 내놓겠다는 약속을 받고 마속의 자원을 허락한다. 그러면서 제갈량은 사마의는 뛰어난 지략가이니 섣불리 공격하지 말 것과 자세한 작전 지시를 한다. 그러나 혈기 가득한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 멋대로 다른 전략으로 대응하다가 싸움에 크게 패하고 만다. 그때서야 마속은 후회하고 제갈량에게 용서를 빌지만, 군대의 기강이 살아있지 않으면 오합지졸에 불과하기 때문에 제갈량은 눈물을 머금고 마속의 목을 벤다.

읍참마속(泣斬馬謖, 울면서 마속의 목을 벰)에서 읍()이 운다는 뜻이다.

정의는 분명히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지는 것에서 가능하다. 그 때 정의가 설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끝나고 70년이 넘었는데 아직도 국가의 영()이 서지 않는 것은 해방 후 정의의 이름으로 친일잔재를 말끔하게 심판하고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의롭지 않은 요셉의 행위

요셉은 정직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요셉이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셉은 정식 결혼하기 전에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건 정말 악몽 같은 일이요 일어나서는 안 될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정직하고 바른 요셉은 이 사실을 세상에 알려서 마리아의 참회를 이끌어내고 다시는 그런 죄가 일어나지 않도록 경종을 울리는 것이 세상에 의를 심는 것이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요셉은 티를 내지 않았다.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마태 1:18~19)

 

분하고 억울해서라도 파혼의 경위를 밝혀야 하건만 요셉은 소문 내지 않고 파혼만 하려고 했다. 요셉은 정말로 마리아를 사랑하고 있었나 보다. 중요한 것은 마리아의 불의에 대해서 정의를 실행하지 않은 것, 마리아의 불륜을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끊고자 한 것, 사실 이런 태도는 정의로운 자세가 아님에도 오늘 마태복음은 이러한 요셉을 의롭다고 했다.

 

 

2. 복음의 특성

 

1) 요셉과 마리아의 결혼

현대 건축의 신비라고 할 수 있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성가족 성당(Sagrada Familia, 안토니오 가우디 작, 1882년 시공~)의 서쪽 정문은 화려함과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동쪽을 향하는 제단의 반대편인 서쪽 정문 왼편 위에는 요셉과 마리아의 결혼식 장면이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마리아와 요셉은 서로 몸을 구푸려 신뢰와 존중의 예를 표하면서 부부가 되고자 한다. 이들은 함께 손을 앞으로 뻗어 맞잡았다. 마리아는 요셉의 손에 자신의 손을 올리고 요셉은 아래에서 마리아의 손을 받쳐주는 모습이다. 전통적인 남녀 관계의 전형이다. 요셉은 마리아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언제까지나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하고 지켜줄 것을 다짐하고 있는 것 같다.

 

마리아는 다소곳한 자세로 눈은 약간 아래로 향하면서 요셉의 아내로서 신실함을 지킬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이들의 결혼을 보증하고 축복하는 이는 제사장이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하나님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남녀가 부부가 되어 평생을 사는 것이 어려운 시대일수록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구해야 한다. 각 자 살아온 두 사람이 한 마음 한 몸이 되어 산다는 것은 주님의 은총이 없이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요셉과 마리아의 세기적 결혼을 너무 멋진 천사가 나팔을 불며 축하하고 있다. 그것은 최후의 심판을 고지하는 나팔과 비슷하다. 결혼은 최후의 심판일까?

 

마리아의 결혼 전 임신은 이 모든 거룩함과 아름다움과 희망을 산산이 부셔버리는 끔찍한 불의였다. 용서할 수도 없고 용서해서도 안 되는 죄악이었다. 더군다나 정의로운 요셉이라면 여기서 불의를 심판하고 정의를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요셉은 마리아의 부정을 덮으려 했고, 성경은 이러한 요셉을 의롭다고 평가했다.

왜 그랬을까.

2) 해품달과 정품사

20121~3, ‘해를 품은 달이라는 사극이 방영되었는데 20회 마지막 방송은 시청률이 42%가 넘었다. 대단한 인기를 누린 작품이었다. 나는 드라마는 못 보았지만 해를 품은 달을 줄여서 해품달이라고 언론에서 말하던 것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달인 여성 주인공이 해인 남성 주인공 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인가? 어쨌든 상식적으로 달은 해의 빛을 반사하면서 존재하기에 달이 해에 종속된다. 그래서 보통은 달을 품은 해가 되어야 맞는데 이것은 반대로 달이 해를 품고 있었다고 한다. 조선왕조시대에 왕인 한 남성을 신분이 전혀 다른 한 여성 무녀가 오히려 더 넓고 깊은 품으로 품고 있었다니 제목부터 흥미진진하지 않은가!

 

정의와 사랑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이 두 가치가 서로 대립되는 것은 아니고 아주 근본부터 연결되어 있지만 실제 삶에서는 사랑과 정의가 충돌하는 경우가 많다. 정의에 치중하면 사랑이 엷어지고 사랑으로 관대하다보면 정의가 흐려져 무질서와 혼란에 빠지기 때문이다. 굳이 따진다면 기독교는 무엇이 무엇을 품고 있다고 보아야 할까? 기독교 이전의 유대교는 정의에 더 무게 중심을 두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복수동태법(復讐同態法)이 사회 정의의 근간이었고, 이스라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의는 곧 법을 중시하는 태도이며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은 이 법의 준수에서 구원의 길을 찾고 있었다.

 

예수님은 여기에 반기를 들었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에 따른 정의의 원리만 가지고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고 단언하셨다. 정의는 반드시 필요하지만, 사랑에 의해서 밑받침되고 사랑에 의해서 품어진 정의여야만 진정한 구원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는 정의를 품은 사랑-정품사를 추구한다.

 

3) 예수님의 복음 : 사랑

정의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예수님이 굳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아도 되었고 굳이 유대교와 다른 기독교 복음을 새롭게 선포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유대교의 율법과 정의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었기에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셨고 새로운 진리, 즉 복음을 선포하셨다. 그래서 기독교의 진리를 하나로 잘라서 말하라 하면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물론 기독교의 사랑은 정의를 배제한 것이 아니라 정의를 품고 있는 사랑이다.

 

 

3. 인간으로 오시는 하나님

 

1) 부조리(不條理) 신이 인간이 되다!

1960년대 서구에서 시작된 실존주의 철학이 전 세계를 강타했을 때, 가장 충격적인 선언은 세상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사회와 인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코 조리 있지 못하다, 부조리(不條理)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항변이었다. 우리들 자신이나 인간이 만든 세상의 구조나 원리는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경우가 많다. 이성과 합리를 최고의 가치로 추구하는 현대 서구문명의 입장에서 보면 깜짝 놀랄 주장이다.

인류 역사 상 가장 부조리한 사건은 바로 예수님의 탄생이다. 신이 인간이 되다니, 이것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가능하지 않은 일이며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듯이 신은 신이요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본질이 전혀 다른 신이 인간이 되었다는 선언이 기독교 복음의 첫 음성이다.

 

2) 십자가 : 정의롭지 못하다.

더군다나 우리가 믿고 증언하는 예수님의 삶에서 우리를 구원하는 핵심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이다. 이건 정말 부조리하고 불의한 사건이다. 세상에 사랑을 증언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가난하고 힘없고 병든 자를 사랑한 사람이 오히려 죄인으로 억울하게 몰려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것이 복음의 핵심인데 이것은 정말 정의롭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분이라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정의롭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셨다.

그러므로 정의로 판단하면 기독교 복음은 전혀 세상을 구원할 수 없다. 가장 어리석고 무능한 것이 기독교다. 그런데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것은 정의의 관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십자가 죽음이 그 어떤 것으로도 가능하지 않은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이다. 이런 기독교 신앙이 그리스-로마 시대나 현대에나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걸림돌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의를 유보할 수 있다는 기독교 진리가 정말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다고 믿고 대답하는 사람들이다.

 

3) 사랑의 하나님

더 나아가 요한 일서는 이렇게 단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요일 4:16)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특히 구약의 율법과 여러 예언자들이 정의의 하나님을 보여주고 강조했다면 율법과 예언의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본래부터 사랑이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은 정의를 배제한 사랑이 아니다. 정의가 무너지면 기독교는 생명을 잃어버린다. 그런데 그 정의가 하나님의 사랑에 기초하여 생성된 정의라는 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우리에게 아기의 모습으로 탄생하시는 구세주 예수님은 정의를 품은 사랑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사랑 위에서 우리의 형제자매와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려고 기도하면서 애써야 한다.

사랑이 세상을 구원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최대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기다리며 영접하는 사람들이다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의 사랑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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