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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4-2) - " 여호와, 우리의 의 " / 김은승 목사 > 대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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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대림절(4-2) - " 여호와, 우리의 의 " / 김은승 목사

관리자 2019-12-21 (토) 11:17 4년전 1698  

본문) 렘 23:5-8, 요일 4:13-21, 마 1:18-25


보통 사람이 하지 못할 희생적인 일을 행한 사람을 가리켜 의인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회에서든지 의로운 사람은 높임을 받습니다. 일본 지하철에서 취객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이수현씨를 사람들은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그 외에도 여러 사고 현장에서 자기 목숨을 아끼지않고 사람들을 구해낸 의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회는 이런 의인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희생하고 있는 그 힘에 의해 지탱되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성경은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 하나가 돋아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치하면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우리는 이 의로운 가지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어서 빨리 예수님께서 오셔서 이 갈등 많은 땅에 평화를 주시면 좋겠다고 우리들은 생각합니다.


과연 예수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신다면 어떻게 통치하실까요? 처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는 구유 위 가장 낮은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다시 오실 때도 그와 같은 모습일까요? 대개 우리는 천군 천사를 거느리고 심판자로 오시는 주님을 꿈꾸고 있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이 또다시 십자가에 달리신다면 어떨까요? 누구도 그런 예수님을 기대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공평과 정의는 그런 모습이 아닙니다. 의로운 사람이 높임을 받고, 약한 자나 강한 자나 동등하게 취급받는 그런 사회가 되어야 정의롭다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실 지는 의문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의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의로운 가지가 다윗에게서 돋아난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이 다스렸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생각합니다. 오실 메시아는 다윗같은 위대한 임금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도 다윗에게서 의로운 임금이 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다윗이 의로운 사람이었습니까? 성경은 다윗의 불완전함을 굳이 감추려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피를 많이 흘린 사람이라서 하나님의 성전을 짓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평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을 의로운 사람으로 인정하시고 메시아의 뿌리로 삼으신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다윗은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회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붙잡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뜻 묻기를 좋아했습니다. 전쟁을 하기 전 늘 하나님께 먼저 물었습니다. 사울을 죽일 기회가 왔을 때에도, 자기 뜻대로 일을 도모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고 선지자로부터 질타를 받았을 때, 다윗은 회개했습니다. 자식들이 반란을 일으켜 피난을 다니면서도 분노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오늘 마태복음의 본문에 등장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그렇습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을 요셉이 들었습니다. 자기 아이가 아닌 것을 요셉은 압니다. 요셉은 의로운사람이라 약혼자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으려고, 가만히 파혼하려 하였다고 했습니다.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떠나보내려 했다는 뜻입니다. 본디 이 일은 요셉이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의로운사람이 간음한 여인에게 장가들 수는 없었습니다. 율법이 그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마리아를 드러내지 않고 보낸다 할지라도, 마리아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부정행위를 한 사람으로 곧 드러나게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위 바르게 살겠다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요셉이 한 것처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자기 의로움을 지키기 위해 자주 이렇게 합니다. 더러운 것이 손에 묻으면 물로 깨끗이 씻어내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 삶에 때 묻히기를 무척 싫어합니다. 이런 우스개 소리가 있습니다. 독일 사람들은 법을 잘 지키기로 유명합니다. 너무나 준법정신이 강한 나머지 역 내에 사고가 발생해도 손에 표가 없으면 개찰구를 뛰어넘어가지 못합니다. 사고를 입은 사람을 돕는 일과 표를 내고 개찰구를 통과해야 하는 규정이 충돌할 때, ‘의로움이 발목을 잡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의롭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셉의 의로움은 다른 데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자기 인생에 도전이 될지라도 요셉은 자기를 굽혀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 했습니다. 이것이 가당한 일이겠습니까? 누구의 씨인지도 모를 아기를 가진 여인을 어떻게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습니까? 그것은 율법에도 위배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에 요셉은 하나님 앞에 굴복했습니다. 돼지고기를 삼키는 일보다 더 끔찍한 일을 요셉은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요셉은 마리아를 살리고 예수를 살렸습니다. 자기 자신이 부정하게 되는 일을 감수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자기 몸을 내놓았습니다. 자기를 버려 생명을 살리는 일이 요셉을 통해 먼저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사람은 요셉처럼 자기를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의로움을 붙잡는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율법에 얽매여 진정한 하나님의 명령을 외면했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손을 더럽힐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랑의 기쁨을 맛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같이 밥을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나눔의 기쁨을 경험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로 들어가는 기쁨은 오직 자기를 버릴 때에 가능하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시간이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는 것은 사람의 질서를 허물고 하나님의 의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 때에도 사람의 의로움을 고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규정을 어기신 것은 율법이 의미 없어서 그랬던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은 할례를 받았고, 절기도 지켰습니다. 성전세도 내셨습니다. 그러나 그것들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었습니다. 소외 당하던 자들에게 관심이라고 하는 생수를 공급하는 일이었습니다. 자기를 희생제물로 삼기까지 사람들이 짊어지고 있는 죄의 멍에를 벗겨주는 일이 중요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요한의 서신은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시인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 안에 계시고,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고 알려줍니다.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을 시인하겠습니까?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는 표징입니다. 성경은 두려움 없는 사랑으로 우리 믿음을 고백하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인간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처럼, 자기 몸에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도 담대하게 사랑하는 삶으로 하나님의 요청에 응답해야 하겠습니다.


요한은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를 형제 자매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혈연을 넘어서는 개념이라는 것은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로 이질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 공동체 안에서 같은 밥상에 앉아 밥을 먹는 정도의 일은 해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조금 더 나아가야 되겠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이 형제로 여기신 우리 자신들을 보십시오.


성경이 말하는 형제자매란 한 배에서 났다는 의미를 가지고는 있지만 실은 가인과 아벨처럼 서로 다른 사람들입니다. 야곱과 요셉처럼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입니다. 선한 뜻을 헤아려주기는커녕 음해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십자가에 달기까지 미워하고 분노하고 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사랑해야 할 형제자매는 그런 사람들까지 포함하고 있습니다. 고결하고 순수해서 존경스럽기까지 한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그랬듯이 참으로 어리석고 완고하며 불쾌한 사람들입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라고 해서 미워한다면 그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하나님께서 돋게 하신 의로운 가지는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의로움은 우리가 생각하던 율법적 정결함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더러운 것을 자기 몸에 담아서 희생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구원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을 향해 내미는 사랑의 손길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사람들이 상상하지 못하던 하나님 나라의 지평을 열어주었습니다. 모든 억압과 소외에서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은 출애굽의 하나님이 아니라 탈 바벨론의 하나님으로 고백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 의의 세계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몸을 억누르는 현대사회의 혼돈에서부터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경쟁과 갈등을 부추기며, 맘모니즘의 질서에 복종하기를 강요하는 현실을 이겨내야 하겠습니다. 이 사회는 결코 사랑할 수 없고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을 형제 자매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나의 의로움으로 인정하고,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이 시대에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운 가지로 거듭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이 시간이 하나님 나라의 문을 활짝 여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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