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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3-1) - '그 날'이 옵니다 / 이성호 목사 (포항을 사랑하는 교회) > 대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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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대림절(3-1) - '그 날'이 옵니다 / 이성호 목사 (포항을 사랑하는 교회)

관리자 2019-12-13 (금) 08:08 4년전 1941  

본문) 사 62:10-12, 요 1:19-28, 히 11:32-12:2

 

 

1. ‘그날’의 찬가(사 62:10-12)

 

한자로 ‘오심을 기다린다’는 의미를 가진 대림(待臨)절은 대림’(待臨)이라는 말 그대로 주님께서 사람들 가운데 임하심을 선포하며 기다리는 때입니다.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 그대로, 주님 오심이 임박하였음을 알리므로써 우리 모두가 주님을 맞이한다는 고백의 절기입니다. 이 대림절은 로마인들의 언어였던 라틴어 ‘adventus domini’(주가 오신다)라는 말에서 기원합니다. 제국의 황제가 지나가는 길에 앞선 전령이 “adventus domini!”라고 외치면,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왕을 맞이할 준비를 했던 겁니다. 

 

오늘 구약본문은 “성문으로 나아가라”는 외침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10절의 이 외침은 전령이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선포로서, 잃어버린 이들의 귀환을 알리는 “깃발을 들라”는 지시어로 종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패망하여 적국에 끌려간 이스라엘의 아들들이 돌아오는 ‘그날’을 보증하셨습니다. 죽은 것 같았고, 실패한 것 같았고, 끝난 것 같았으나, 마침내 다시 세워지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백성’(12절)으로 부르십니다. 그날은 축제의 날이요 영광의 날입니다. 

 

그러나 잃은 자 같은, 버림받은 자 같은 이스라엘을 되찾는 ‘그날’의 찬가에는 자칫 자나치기 쉬운, 선행되어야 할 요구가 존재합니다. 그것은 땅끝까지 선포되는 ‘구원’과 ‘상급’ ‘보응’의 날(11절)을 맞이하게 될, 우리를 향한 “길을 닦으라” “돌을 제하라”입니다.      

 

저는 이 “길을 닦으라”는 요구에 더 민감해집니다. “돌을 제하라”는 말씀에 가슴이 더욱 뜨거워집니다. 혹자는 거룩한 백성의 회복과 부흥이 임박했음에 방점을 찍을 수 있겠으나, 본문을 읽으면 읽을수록 영광의 그날을 위해 우리가 우선해야 할 지점이 또렷히 보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심기보다는 거두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거두려는 사람만 있는 곳이야말로 지옥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요 1:19-28)

 

그때에 ‘외치는 자의 소리’(23절), 세례요한이 등장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심판과 축복을 선포합니다. 약속의 메시야가 임하는 날은, ‘높음’과 ‘많음’과 ‘큼’을 뽐내는 자들에게는 심판입니다. 그러나 ‘약함’과 ‘궁핍’과 ‘작음’을 고백하는 이들에게는 축복의 날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울법이 그들의 입장을 지지해 준다고 자신했지만, 요한은 오시는 예수님 자신이 말씀이며(1:14 상반절),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이고(1:14 하반절), 따라서 그분을 거부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를 거부하는 것임을 확증합니다. 

세례요한은 고합니다. 그가 곧 “내 뒤에 오신다”(27절)  

 

저는 지금까지 이와 같은 탁월한 교회력 본문을 접한 기억이 없습니다. 대림절을 표현하는 어떤 설명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없으면 그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귀환에 성공한 이스라엘은 여전히 어둠에서 깨어나지 않은 채, 약속의 말씀만을 붙잡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을 구원해 줄 분, 로마에서 해방시켜 줄 ‘메시야의 도래’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본분을 깨닫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길’을 닦지도 ‘돌’을 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저 언약 백성이라는 허상에 사로잡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 개신교회의 모습이 오버랩됩니다. 높아지려 하고, 크게 되려는 것을 놓지 않으며, 많음을 꿈꾸는 그것입니다. 부흥은 간구하나 낮아짐은 거부하는, 비움은 멀리하지만 채워지기를 소망하는, 거짓 영광에 매몰되어가는 ‘그들’(19절)입니다. 그들은 바로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24절)들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길’을 외면하면서도 구원의 ‘그날’을 기대하는 어쩌면 우리를 가리키는 또 다른 표현이 아닐런지요?  

   

 

3. 증인된 사람들(히 11:32-12:2)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그날은 포로된 이스라엘이 해방되는 날(이사야), 자고함과 헛된 꿈에 부풀려진 이들에게 구원을 길을 여시는 예수그리스도의 날(요한복음), 장차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 우편에 앉는 영광의 그날(12:2)입니다. 그날을 맞이하는 이들은 기드온과 바락, 삼손과 입다, 다윗과 사무엘과 선지자들이 걸은 길을 가는 이들(11:32)입니다. 

 

또한 믿음으로 나라를 이기기도 했으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했고(33절),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되기도 하고(34절), 심한 고문을 받되 구걸하여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고(35절), 조롱과 책찍(36절), 죽음 앞에도 굴하지 않았으며, 궁핍과 가난과 학대를 피하지 않는(37절),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증인(38절)입니다. 

 

영광은 바라나 조롱을 피하는 이들에게는 허락될 수 없는 그날은 여호와의 날입니다. 이스라엘의 진정한 영웅들은 궁핍과 고난, 죽임을 당하는 어떠한 운명도 가로막지 못하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의 본문은 가난하기때문에 선한 것이 아니라, 선하기 때문에 가난할 수 있는 이들을 향한 선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희생과 부끄러움을 개이치 아니하는(12:2) ‘길을 닦는 이’요, ‘돌을 제하는 이’들입니다. 장차 여러분들이 누리게 될 영광인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드려야하겠습니다. 오늘의 현장은 어떠한가요? 칭찬은 기대하지만 눈물은 거절합니다. 찬사는 구하나 궁핍은 피합니다. 커짐은 성공이지만 작아짐은 실패로 여깁니다. 교회마다 목회자마다 커짐은 외치지만 낮아짐은 피합니다. 부끄럽게도 모든 종교 가운데 한국의 개신교회만이 ‘상향이동’을 합니다. 저는 단 한번도 개신교 목회자의 ‘하향이동’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셨다”는 무당같은 변명으로 농촌에서 도심으로,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로 자랑스럽게 이동합니다. 그 속은 돈과 명예입니다. 기장의 위대한 전통은 무참히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그러했듯 ‘길을 닦을 때’입니다, ‘돌을 제할 때’입니다. 구원의 날, 해방의 날, 영광의 날은 십자가를 참는 이들에게는 축복의 날이나, 높음을 좋아하고 커짐을 꿈꾸는 자들에게는 심판의 날입니다. 

 

그날이 옵니다. 그날을 앙망하며 길을 닦는 ‘경건한 백성’인 여러분의 인내(12:1)위에 하나님의 차고 넘치는 은혜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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