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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2-2) - " 오소서 평화의 왕이여 " / 김진수 목사 > 대림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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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대림절(2-2) - " 오소서 평화의 왕이여 " / 김진수 목사

관리자 2019-12-06 (금) 16:40 4년전 1852  

본문) 2:1-13/ 11:25-32/ 19:28-40 대림절둘째주일 

 

추워졌습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영하 10도로 내려갈 만큼 추웠습니다. 겨울이 되면 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집니다. 밖에 나들이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땅이 얼어붙어서 미끄러집니다. 낙상환자들이 생깁니다. 요즈음은 눈으로 식별이 안 되는 결빙도로(블랙 아이스)에서 많은 사고가 일어납니다. 겨울이 되면 농사도 못 짓습니다. 불 땐 방 안에서 새끼를 꼬며 보내야 합니다. 실외공사가 어려워집니다. 건축현장에서는 겨울 아침마다 불 피워 언 손 녹이는 게 일입니다. 눈이 많이 쌓이면 아침 출근이 어려워집니다. 수도관이 얼어서 동파되고 혈관성질환이 급증해서 병원가시는 분들이 많아집니다. 학교도 방학합니다, 그런데 추운 겨울이 와서 일어나는 이 모든 어려운 문제들은 꽃피는 봄이 오면 끝납니다. 따뜻한 봄이 오면 겨울 추위로 일어난 모든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지난 대림절 첫 주일에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어둠속에 있는 소망 없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예수님이 다니엘의 세 친구가 풀무 불에 던져진 그 불구덩이 속에 “신의 아들 같은 모습으로 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셨고(3:13-28),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세상가운데로 파송하셔서 이 세상을 구원하셨으며(10:16-33), 역사의 마지막 종말의 날에는 심판 주로 오셔서 끝내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심판하심으로 우리를 영원히 구원해(18:21-24) 주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지난주에 이어서 계속되는 말씀입니다. 이제는 이 땅에 오신 예수는 어떤 분인가? 를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그분이 누구냐에 따라서 우리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꽃피는 봄 같은 분이 오시면 겨울 같이 꽁꽁 얼어붙었던 삶에 싹이 돋아나고 꽃이 핍니다. 새로운 소망의 삶으로 변합니다.

 

척량 줄을 잡고 계신 분(2:1-13)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 온 유대인들은 소수에 불과했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강한 반대세력이 주위에 도사리고 있었고 소수의 유대공동체 안에서도 낙심과 절망의 탄식이 흘러나왔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유대공동체가 염려했던 것은 성전재건이었습니다. 돈도, 힘도, 권세도 없는 초라한 포로 귀환자들의 힘으로 어떻게 예루살렘 성전을 중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척량 줄을 잡은 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2:1). 성전을 척량하는 자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척량 줄은 중건하는 성전의 크기와 모양을 결정하는 도구이며 그것을 잡은 자에 의해 건축이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척량 줄을 잡은 자가 어떤 의지와 구상을 가지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척량 줄은 잡은 자가 줄을 긋고 점을 찍는 대로 건축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척량 줄을 들고 무너진 예루살렘을 향해 가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는 이미 화석류나무 사이에 서계셨던 분(1:8)이며 장차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실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포로 귀환한 유대공동체가 우려했던 두 번째 일은 예루살렘의 회복이었습니다. 귀환한 유대인들의 수가 고작 5만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수백만으로도 망했는데 5만의 수로 어떻게 유대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급히 또 다른 천사(2:3)를 보내셔서 예루살렘을 척량하러 달려가는 분을 따라가는 ‘해설천사’를 향해 “소년(스가랴)”에게 이렇게 말하라고 하십니다.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2:4)” 하나님은 장차 예루살렘에 주의 은총이 차고 넘쳐흘러 울타리를 넘어 그 복과 은총이 온 세계로 흘러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저 초라한 초대 기독교 공동체에 성령이 임하실 때 예루살렘 120문도로부터 시작하여 온 세계 열방에 주의 복음을 전하는 자로 세우시지 않았습니까?

 

귀환한 유대공동체가 두려워했던 세 번째 일은 예루살렘을 향한 강대국들의 위협이었습니다. 무기도 군대도 어떤 보호 장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가랴에게 “내가 그 사면에서 불 성곽(2:5)”이 되 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안전한 곳은 저 바벨론의 품속에 남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힘이나 권세가 아닙니다. 참으로 안전한 곳은 사방에 강한 대적들이 진치고 있는 예루살렘에 있어도 오직 하나님이 지키시는 “불 성곽”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불 성곽 안에 있는 사람은 무너뜨릴 자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초라한 유대공동체에 친히 임하실 분은 다름 아닌 “척량 줄을 잡은 분, 울타리를 칠 수 없도록 번성케 하시는 분, 불 성곽으로 둘러싸 주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성을 세우시는데 누가 막겠습니까? 창조주 하나님이 세워주시면 얼마나 크게 번성하시겠습니까? 만군(萬軍)의 주 여호와가 불로 둘러싸서 지키시는데 얼마나 안전하겠습니까?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8:31)

 

어린 나귀를 타신 왕(19:28-40)

 

왕은 스스로 걷지 않습니다. 왕은 무엇인가를 타고 다니는 분, 온 천하를 다스리고 명령하고 통치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왕은 신하를 움직이고 군대를 움직이고 사람을 움직이고 마병을 움직이고 모든 나라를 다스립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것은 예수님이 예언된 메시야, 왕이심을 공적으로 나타내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며 전쟁에서 타는 말이 아니라 평화시대에 농부들이나 타는 “나귀”, 그것도 “어린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왕, 메시야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제자의 온 무리가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38) 이미 누가는 예수님이 이 땅에 탄생하실 때 천사들이 부른 노래를 기록했습니다. “하늘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2:14)” 예수님은 이미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셨고(2) 이제는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19)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왕”이라는 말에 놀라 제자들을 자제시키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을 제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는 지금이 평화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제국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평화를 깨뜨리고 유사, 사이비 평화를 세웠습니다. 그것은 무기나 칼로 강압적으로 만드는 평화입니다. 깡패의 주먹 앞에서 잠시 거짓평화가 유지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참 평화는 무기나 칼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칼과 무기로 만드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금방 무너질 평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힘으로 만드는 평화가 아닌 희생과 십자가로 평화를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참 평화는 누군가의 희생으로 만들어집니다. 희생 없는 평화는 거짓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를 타십니다. 그리고 이름 모를 나귀 주인의 희생을 통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희생하는 자의 이름은 본래 알려지지 않으니까요! 그리고 마침내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죽이시는 희생을 통해 참 평화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교회는 평화의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평화를 위해 존재합니다. 무엇인가를 성취하기 위해 평화를 깨는 것은 거짓입니다. 평화를 깰 만큼 소중한 것은 없습니다. 평화는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의 목적입니다. 이 평화를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이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으며 이 평화의 나라를 이루시기 위해 마지막 날 주님이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교회는 평화를 위하여, 평화롭게, 평화를 향해 나가야 합니다.

 

알 수 없는 신비하신 분(11:25-32)

 

우리 가운데 오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신비의 하나님이십니다.(11:25) 그의 지혜를 측량할 수 없고 그의 긍휼과 자비를 헤아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열방의 복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나게 하시고 복음의 꽃이 피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잠시 우둔하게 하사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게 하십니다.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수천 년 동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온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죽임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깨버리게 하시고 오히려 주의 복음이 그동안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 없이 떠나 살던 이방사람들에게 퍼져가게 하십니다(11:25). 얼마나 모순된 일입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이제 이방인의 수가 충만하게 차게 될 때(25), 이제는 하나님의 언약대로(59:20이하, 27:9이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다시 이스라엘에게로 향하여 가게 하십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 언약의 백성을 구해 내셔서 이방인들에게 베푸셨던 긍휼로 이제 이스라엘이 긍휼을 얻게 하십니다(11:31). 아시겠습니까? 유대인들도 자기 의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은 많은 사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 두십니까?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함입니다.(32) 없어보아야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건강을 잃어보아야 건강의 소중함을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떠나보아야 하나님의 소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저주 속에 있어보아야 축복의 은총을 압니다. 어둠속에 있어야 빛을 압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습니다. 모두가 우리 주님의 긍휼입니다. 자비입니다.

 

대림절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합니다. 우리에게 오신 예수는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가 맞이해야 할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의 인생의 척량 줄을 잡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의 환경에 따라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의 척량 줄을 잡고 계신 그 분에게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신 평화의 왕이십니다. 평화가 있는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은 신비로우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환난이 겪습니다. 욥의 고난은 다름 아닌 이해할 수 없는 고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신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일, 죽음에서 부활하신 일은 인간의 합리적인 이성으로는 이해 불가한 일입니다. 상식적으로는 우리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는 존재이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 불가한 신비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 신비 속에 상상 못할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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