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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창조절(6-1) - " 먹이시고 지키시는 창조주 예수님 " / 최병학 목사

관리자 2020-10-08 (목) 15:42 3년전 1043  

본문) 신 32:7-14 행 14:8-18 막 8:1-9


1. 7병2어로 이방인까지 먹이시는 예수님


지난 주 말씀을 통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 몸을 입고 찾아오신 예수님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2,000년 전 제자들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생명의 말씀이었으며, 하나님께서 다윗과 맺은 언약대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도 빛 가운데 거하기 위해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말씀을 사모’하며 또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대로 일용할 양식을 주심에, 그리고 죄를 사해주심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세 본문 말씀은 이렇게 빛 가운데 사는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께서 친히 먹이시고 돌보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은 이스라엘 사람들뿐만이 아닙니다. 이방인들도 해당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기 때문입니다(요 3:16). 이렇게 이스라엘 백성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먹이시는 말씀이 오늘 복음서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5병2어(마 15:32-39; 막6:30-44; 눅 9:10-17; 요 6:1-14)’와 비슷한 ‘7병2어(마 15:32; 막 8:1-10)’ 기적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 무렵에 또 큰 무리가 있어 먹을 것이 없는지라.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 (막 8:1-3)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대답하되,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막 8:4)”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굶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느냐? 이르되, 일곱이로소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무리를 명하여 땅에 앉게 하시고 떡 일곱 개를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어 나누어 주게 하시니, 제자들이 무리에게 나누어 주더라.” (막 8:5-6)

 

예수님께서 떡 일곱 개를 축사하시고 제자들을 통해 무리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생선 두 마리도 나누어 주십니다. “또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는지라. 이에 축복하시고 명하사 이것도 나누어 주게 하시니,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 일곱 광주리를 거두었으며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더라(막 8:7-9a).” 이렇게 칠병이어로 굶주린 무리를 배불리 먹이셨던 것입니다. 여기서 칠병이어 기적은 남은 조각이 일곱 광주리에, 먹은 자는 여자와 어린아이 외에 사천 명이었습니다. 반면 오병이어 기적은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이고, 먹은 이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입니다. 


사실 오병이어와 칠병이어는 다른 사건입니다. 먼저 마태복음의 오병이어는 빈들에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어 병자를 고치시고 날이 저물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칠병이어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근처 산에 올라가 많은 이들을 고치시고 사흘을 계시다가 멀리서 따라온 굶주린 무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칠병이어로 배불리 먹게 하신 기적입니다.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4복음서에 다 나오는 오병이어 사건은 주 대상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먹이시는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유대인을 위한 메시아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칠병이어 사건은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도 행하신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그 중에는 멀리서 온 사람들도 있느니라(막 8:3b).”고 하시는데, 바로 ‘멀리서 온 사람들’이 이방인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인 마태복음에는 이 말이 없습니다. 빠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마가복음의 칠병이어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이스라엘과 유대를 넘어 이방인들까지 먹이시는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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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루스로 만든 작은 바구니와 사람이 들어갈 정도의 광주리


그리고 자세히 보면, 남은 조각을 담은 그릇이 다르죠? ‘바구니(코피노스)’와 ‘광주리(스퓌리스)’입니다. 코피노스는 파피루스나 갈대 잎 등을 엮어 만든 둥근 그릇입니다. 스퓌리스는 바구니 보다 커서 좀 더 많은 물건을 담을 수 있는데, 그 크기가 바울이 다메섹 성을 탈출할 때 타고 내려올 정도의 크기입니다(행 9:25).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도 바구니와 광주리를 구분하셨습니다.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바구니(코피노스)이며,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 주운 것이 몇 광주리(스퓌리스)이던 것을 기억지 못하느냐?(마 16:9-10)”


여기서 크기의 차이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숫자의 차이입니다. 숫자의 상징적 의미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데,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을 배불리 먹이고 남은 열두 바구니는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이방인들을 배불리 먹이고 남은 일곱 광주리는 가나안 땅에 거주하던 일곱 족속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로 헷 족속, 기르가스 족속, 아모리 족속, 가나안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입니다. 신명기 말씀을 살펴볼까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인도하사 네가 가서 차지할 땅으로 들이시고 네 앞에서 여러 민족 헷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 곧 너보다 많고 힘이 센 일곱 족속을 쫓아내실 때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게 넘겨 네게 치게 하시리니, 그 때에 너는 그들을 진멸할 것이라.” (신 7:1-2a)


구약 모세 시대에는 진멸의 대상이었던 일곱 족속이 이제 예수님 시대에는 구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진멸의 대상이었던 가나안 땅 이방인들까지도 먹이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우리는 오늘 칠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엿볼 수 있는 것입니다. 


2. 눈동자같이 지키시는 하나님


창조주이신 하나님(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자기 백성(과 이방인)을 먹이실 뿐만이 아니라, 또한 눈동자같이 지켜주십니다. 구약의 말씀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먼저 모세는 출애굽 2세대들에게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에 관해 노래하며, 그들에게 옛일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신 32:7).” 여기서 ‘역대의 연대’는 옛날의 날들, 또는 옛적시대라는 뜻으로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출애굽 2세대들이 태어나기 전의 일이죠? 따라서 그들의 아버지와 어른들에게 물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역대의 연대를 모세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신 32:8-10)


민족과 인종, 그리고 백성들이 경계를 짓고 살지만, 그들 모두를 여호와께서 눈동자같이 지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자기 백성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뿐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까지 포함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사랑을 모세는 조금 더 쉽게 설명합니다.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신 3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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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가 새끼를 보호하듯이


오직 하나님만이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이끄시고 보살피신다는 것입니다. 다른 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모세는 다시 한 번 반복합니다.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신 32:13-14) 


사실 오늘 본문 신명기 32장 말씀은 그 유명한 ‘모세의 노래’입니다. 주제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상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완악성과 불순종을 언급하며 여호와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합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말씀에서 사도 바울 역시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말씀을 선포합니다.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행 14:15b-17)


모든 민족들이 자기 길을 가도록 하나님께서 방임하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비를 내려 결실을 맺게 하시고 음식과 기쁨으로 지켜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렇고, 바울 당시 루스드라 사람들도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지켜주심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우상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아니라 기적을 행하는 선교사 바울과 바나바를 섬기려고 합니다. 


3. 하나님 대신 다른 것을 섬기는 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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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고니온과 루스드라, 더베


사도행전의 말씀을 볼까요? 바울과 바나바 두 선교사가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의 이고니온과 루가오니아 지방의 두 성인 루스드라와 더베 등을 다니며 1차 선교 여행을 할 때 일입니다. 루스드라는 소아시아 평야지대의 구릉(丘陵, 산보다 낮은 언덕)에 위치한 중요한 성읍 도시였으나, 현재는 작은 마을입니다. 이 루스드라에서 북서쪽으로 32km 떨어진 곳에 이고니온이 있고, 동쪽으로 96km 떨어진 곳에 더베 성이 있습니다. 루스드라는 이 두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에 위치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디모데의 고향이 여기입니다. 아무튼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서 발을 쓰지 못해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는 기적을 보이자,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고 합니다. 말씀을 볼까요?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앉아 있는데 나면서 걷지 못하게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이르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걷는지라.” (행 14: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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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 쓰지 못해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는 이적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해,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그 말씀을 받았고, 심령의 변화를 일으킵니다. 따라서 바울이 그를 보니 구원받을 믿음이 그 속에 있어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발을 쓰지 못하는 그 사람이 믿음대로 일어나 걷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복음을 듣고 변화된 그 사람의 내면을 보았지만, 루스드라 사람들은 겉모습의 변화, 곧 걷지 못한 이가 걷게 되는 외형적 모습만을 보았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더라.” (행 14: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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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 반 오스트 1세 <필레몬과 바우키스와 함께 있는 제우스와 헤르메스> 



여기서 제우스(로마는 주피터)는 그리스의 주신(主神)입니다. 또한 제우스의 아들이자 전령 신인 헤르메스(로마는 메르쿠리우스)는 웅변의 신으로 유명한 신입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헤르메스로 오해했음으로 보아, 아마도 1차 선교여행 당시는 바울이 말을 잘했나 봅니다. 아무튼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 두 사람을 사람의 형상을 입은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이런 오해에는 전이해가 있습니다. 


신화에 따르면 제우스와 헤르메스가 사람의 모습(나그네)으로 루스드라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루스드라의 필레몬과 바우키스라는 노부부 외에는 다른 모든 사람들은 나그네를 냉대했습니다. 창세기 19장에도 소돔과 고모라를 방문했던 두 천사를 사람들이 냉대하죠?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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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디우스(B.C.43년-A.D.17)의 『변신이야기』 (민음사, 2017)에 따르면, 제우스와 헤르메스는 루스드라의 수천 개의 문을 두드렸지만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는 루스드라 사람들에게 분노한 제우스와 헤르메스는 필레몬과 바우키스 두 사람만은 복을 주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홍수로 심판했다고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유황불로 심판받았죠?(창 19:24-25) 따라서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동성에 관한 성폭력(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동성애 개념)’이 아니라, 이렇게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은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서양 사상의 두 흐름인 히브리 사상과 헬레니즘 사상 모두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 사상의 맥락에서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통해, 또한 팔레몬과 바우키스가 나그네를 환대하여 복을 받았다는 헬레니즘 사상을 통해, 우리는 두 사상 모두 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루스드라 주민들은 이렇게 기적을 행하는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으로 오해하여 숭배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말씀을 볼까요? 공동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성 밖에 있는 제우스 신당의 사제는 황소 몇 마리와 화환을 성문 앞으로 가지고 나와서 사람들과 함께 사도들에게 제사를 지내려고(행 14:13)”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이렇게 만류합니다. “여러분,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만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여 여러분이 이런 헛된 우상을 버리고 살아 계신 하느님께 돌아오게 하려고 왔을 따름입니다(행 14: 14-15a, 공동번역).”


앞서 칠병이어 기적 이후에도 예수님께서 무리를 먹이신 다음, “예수께서 그들을 흩어 보내(막 8:9b)”셨죠? 본질이 아닌 겉모습, 내용이 아닌 형식에 치우치면 이렇게 우상에 빠지기 쉽습니다. 아무튼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도 똑같은 사람이라고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행 14:18)”하였습니다. 


4.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


마르틴 루터를 이은 제 2세대 종교개혁자인 멜랑크톤(Melanchthons)은 온건한 개혁정책을 펼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본질적인 것(The essential, 구원에 필수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The peripheral, 구원에 필수적이지 않은 것)이 있는데, 이 두 개를 똑같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즉 본질적인 것은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지만, 비본질적인 것은 때에 따라서는 양보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본질적인 것은 지키되, 비본질적인 것에는 관용과 포용성이 필요합니다. 목숨을 내주어도 타협할 수 없는 신앙의 본질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또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따라서 17세기의 신학자 멜데니우스(R. Meldenius)가 선언하였고, 동시대 개혁 교회 목사였던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에 의해 널리 알려진 기독교 격언인,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모든 것에는 사랑을!”(In essentials unity, In non-essentials liberty, In all things charity)이라는 말은 지금도 유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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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데니우스의 표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비본질적인 것으로 여야가 논쟁을 하고 있고, 또 종교가 비본질적인 것에 목숨을 걸고 광장에 나가고 있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혼탁한 시대에 모든 것에 사랑을 담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본질에 붙잡힘 되어, 모든 비본질적인 것을 끌어안고 포용하며 열린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먹이시고 눈동자같이 지켜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이 결실의 계절 가을에 인격적으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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