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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창조절(4-1) - " 그럼에도 불굴하고 감사 " / 이병일 목사 (한가위감사주일)

관리자 2020-09-24 (목) 09:54 3년전 1121  

본문) 욥 37:14~24, 롬 9:14~26, 마 14:22~33


올해 우리들의 삶을 돌이켜보면 여러 가지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해를 입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가을의 풍요로움이라고 말하기엔 안타깝고 아쉬운 점이 더 많이 떠오릅니다. 그럼에도 불굴하고 여러분은 어떤 내용으로, 무엇을 어떻게 감사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추석을 맞이하여 한가위감사주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봄과 여름에 수고한 결실에 대하여 감사했습니다. 물론 사람들이 수고하지만, 농사의 70-80%는 자연의 기후가 결정하므로 자연과 하늘에 대하여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농사를 거의 짓지 않지만, 지금 살아 있는 것에 대한 감사를 드립니다.


저도 한가위감사주일을 준비하면서 ‘나는 무엇을 감사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우선 사람에 대한 감사입니다. 가족과 교회를 비롯하여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합니다. 평범하고 때로는 보잘것없는 사람이 지금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엔 자연에 대한 감사입니다. 자연을 느끼고 그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 하느님의 섭리를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도 사람과 자연에 대한 감사입니다. 텃밭에서 일하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인 일이 아니라 즐기면서도 할 수 있는 영성활동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감사합니다. 이러한 감사는 모든 관계를 여유롭게 하는 시작입니다. 자연과의 관계는 고사하고 ‘사람들의 공동체’조차도 날로 각박해져 숨 쉴 틈이 없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나’만이 아닌 함께 나누며 사는 여유를 다시 되찾아야 합니다.


오늘 욥기 본문은 엘리후가 욥을 향해 말하는 마지막 조언입니다. 이것은 욥과 세 친구의 대화 그리고 엘리후의 조언으로 이어진 고난에 대한 모든 논쟁의 마지막 부분이기도 합니다. 엘리후는 욥에게 “정신을 가다듬어서, 하느님이 하시는 신기한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조언합니다. 느닷없이 다가온 고난에 대하여 욥은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항변하면서, 때로는 자기를 변호하면서 고난의 이유를 이해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한편으로는 욥의 입장에서 위로하면 보듬어야 할 필요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3자의 입장에서 단호하게 조언하고 충고할 필요도 있습니다. 엘리후는 고난의 때에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보라고 조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올해에는 세계적으로 그리고 한반도에서도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모든 사람의 발이 묶이고 따라서 경제적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게다가 50여 일 동안의 장마와 폭우와 연이어 다가온 태풍들에 의해서 한반도의 곳곳이 물과 바람에 의해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러한 자연재해와 바이러스는 그 이유야 어떠하든지 엄연히 우리에게 다가온 현실이고 고난입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자기의 현실에서 일어난 일에 대하여 날마다 성찰하며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 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모든 삶이 위축되면서 이제는 우리의 삶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단순한 자연재해를 넘어서 인류의 생존마저도 위협하고 있는 기후위기 앞에서 이제는 삶의 지향과 문명의 근본을 돌이켜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이해가 되지 않을 때는 말을 많이 하기보다는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서 깨닫기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가만히 서 있다는 것은 침묵하는 것이고 참으면서 자기를 헤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이해되지 않을 때는 가만히 침묵하며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더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 때 믿음으로 감사하며 지켜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있어 우리가 이해할 수 없을 때 그 때는 불평할 때가 아니라 꿇어 엎드릴 때입니다. 이유를 모를 때 그 때는 원망할 때가 아니라 꿇어 엎드릴 때입니다. 가만히 하느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단지 꿇어 엎드려 크신 하느님 앞에 찬양하며 나가야 합니다.


마태복음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바다 건너편으로 보냅니다. 예수님은 땅에 홀로 남아 무리들을 돌려보낸 뒤에 기도합니다. 한 밤중에 바다 가운데 있는 제자들은 앞으로 나가기 위해 노를 젓느라고 너무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람이 그들을 “반대하여” 불어왔기 때문입니다.


성서에서 바다는 흔히 환난과 시련을 가져다줍니다. 바다는 ‘태고의 혼돈’을 상징합니다. 이 혼돈의 물은 무제한적인 카오스와 통제불능의 장소로서 사탄적 혼란의 영역입니다. 제자들이 시험을 당하고 위험을 느낄 때에 예수님의 능력으로 위기를 모면하기도 합니다. 바다는 유대인의 땅과 이방인의 땅을 가르는 경계선이 되며, 그것을 건너는 것은 그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됩니다. 마태복음 본문에서도 바다는 제자들을 괴롭히고 고문하는 장소입니다.


바다, 밤 그리고 바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서 우리 주변에서 언제나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우리의 삶이 언제나 그렇듯이 이 세계는 죽음으로 우리를 유혹하기도 합니다. 바람을 거슬러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힘들고 지쳤을 때에는 그 자리에서 안주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끼리끼리 모여서 편안한 삶을 영위하라고 손짓합니다. 잘못된 세상을 거슬러 인류를 해방하기 위해, 모든 생명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용감한 젊은 예언자 예수님을, 이 세계 속에서 살면서 따라가기엔 너무 어렵습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성난 파도, 술수와 모략으로 유혹하는 어두움, 적극적으로 대적하며 길을 막는 바람이 있는 한 작은 예수가 되어 예수님이 가신 길을 헐떡이며 좇아가기에도 벅찹니다.


그러나 이 세계는 우리를 걸려 넘어지게도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터전이기에 살아 있는 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입니다. 예수님은 바다를 통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을 허물었고, 밤에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용기와 힘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바람으로 제자들에게 거룩한 영을 부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다와 땅의 경계선에서, 바다에 배를 띄워 놓고 그 곳에서 땅에 있는 무리들을 향해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실은 새로운 목적지를 향한 과정이며, 그 곳에 바로 우리가 헤치고 걸어갈 길이 있습니다.


로마서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현실 속에서도 하느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을 ‘내 백성’이라고 하겠다. 내가 사랑하지 않던 백성을 ‘사랑하는 백성’이라고 하겠다.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그 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베푸셨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그 사랑은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부르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라 일컬어 주셨으니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서 창조 이야기에서 하느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생명을 주셨다는 것이 사랑의 시작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생명이 살기에 적합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일하신다는 고백은 여러 가지 조건으로 실의에 빠져 있는 개인들에게 새로운 의지를 불러일으키며 그들의 삶을 파괴하는 모든 위협을 극복해 나가도록 북돋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응답은 감사뿐입니다.


“당신이 손수 빚어 만드신 세상이기에 공평하신 당신의 호흡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누가 씨앗을 뿌려도 생명의 대를 잇게 하는 바로 그 신비한 진리는 우리의 가슴에 새로운 씨앗이 되어 움을 트게 합니다. 젊은 여름 날 철없이 나대는 발길 앞에서 당신은 김을 매십니다. 돌맹이를 집어내십니다. 그리고 조용히 물고를 대어 당신이 바라는 형상을 빚을 수 있게 가슴을 촉촉이 적셔 주십니다. 이제 우리의 모습이 영글어 지고 바램의 결실로 매듭지어질 때 당신의 공의는 낫을 대십니다. 가라지는 골라 불에 던지십니다. 알곡이 된 성숙한 삶은 당신의 품 안에 거두십니다. 한톨 한톨 다시 씨앗이 되는 기쁨을 우리게 내리시는 당신의 섭리를 노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문인귀의 <감사할 이유> 중에서)


우리가 아무리 감사의 조건을 따지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려고 하지만, 감사의 기도가 잘 나오지 않는 현실이 분명히 있습니다. 잘못된 제도와 정책, 자본의 횡포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고, 인권이 무시되고, 생명이 파괴되는 일이 눈앞에서 더 많이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얻은 것, 성취한 것만을 가지고 감사를 하게 되면, 우리의 감사는 늘 부족합니다.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가진 것을 남과 비교하게 될 것이고, 내가 얻지 못한 것들을 집착하게 될 것이고, 더 많이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한탄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이 무한하게 확장된 우리의 욕심은 우리를 감사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진정한 감사는 우리의 삶이 하느님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 옵니다. 우리의 삶 속에 하느님이 계시고, 우리의 삶 순간순간에 자연의 도움이 있고, 우리의 생명은 다른 생명의 희생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가치 있음을 깨닫는 데에서 옵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에서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말은 이것입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데살로니가전서 5:18) 모든 일,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과거에 일어났던 일이나, 현재에 진행되고 있는 일이나, 미래에 다가올 모든 일에 대해서 감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일을 감사함으로 자기를 돌아보고, 현재의 일을 감사함으로 어려움을 헤쳐 나갈 힘을 얻고, 미래의 일을 감사함으로 기쁨을 선취합니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감사할 일이 없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한 마음을 품고 기뻐하십시오. 과거가 다르게 보이고, 현재가 살만 하고, 미래가 밝을 것입니다. 모든 일에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살면서 감사합시다.


“감사는 미래 진행형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과거에 있었던 일 때문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사는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를 풍성하게 만듭니다. 감사는 어쩌다 찾아오는 일시적이고 개별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또한 어떤 일을 마무리할 때 찾아오는 감동만도 아닙니다. 감사는 결과가 아니라 시작입니다. 감사하는 순간, 눈이 열려 삶 자체를 귀하고 아름다운 선물로 보게 됩니다. 감사는 과거나 현재 완료형이 아니라 미래 진행형입니다. 감사하는 순간, 감사가 가득한 새로운 미래가 열리기 때문입니다.”(정용철의 <사랑의 인사> 중에서)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섭리에 감사하고, 풍성한 먹을거리를 내는 자연과 함께 땀 흘린 사람들 모두에게 감사하고, 우리의 피 속에 면면히 흐르는 선조들의 역사와 전통에 감사합시다. 우리가 성취하여 이룬 것 때문에, 우리가 소유하여 가지게 된 것 때문에, 기쁨과 넉넉함과 행복 때문에 감사하는 것을 넘어서 우리의 삶 자체가 하느님의 은혜이고 생명의 희생임을 깨달음으로써 감사합시다. 비록 완전히 이루지 못했더라도, 넉넉하게 가지지 못했더라도, 슬픔과 부족함과 갈등이 있더라도 그것은 그저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 스쳐가는 과정임을 깨달음으로써 감사합시다. 그러한 감사가 한 사람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드리는 감사이기를 빕니다.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감사이기를 빕니다. 감사하기 위해 마음을 모으면 더 온전한 감사가 될 것입니다. 그것이 사건이고 역사입니다. 서로에게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기를 빕니다. 여러분과 함께 예배드릴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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