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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4-2) - " 밤 사경과 같은 우리 삶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 / 장효수 목사 (한가위감사주일) > 창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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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창조절(4-2) - " 밤 사경과 같은 우리 삶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 / 장효수 목사 (한가위감사주일)

관리자 2020-09-25 (금) 08:11 3년전 1066  

본문) 37:14~24, 9:14~26, 14:22~33

 

1. 선선한 바람, 흰구름과 푸른 하늘, 물들기 시작한 나뭇잎들과 길가에 흩날리는 낙엽들이 이미 우리 안에 가을이 와 있음을 알려줍니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는 신기하기만 합니다. 지난 여름 우리를 힘들게 했던 폭우도, 우리를 위협했던 태풍도 언제 우리에게 왔었나 할 정도로 지나가고 있습니다. 마치 바닷가 모래밭에 그림을 그리면 파도에 의해 지워지고, 그 모래밭에 새로운 그림을 담을 수 있는 새 캠퍼스가 주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아름다운 가을이 사랑하는 모든 교우들에게 임하기 바랍니다. 아름다운 가을을 만들어 가기 바라고, 하나님 허락하신 작품과 같은 가을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이 아름다운 가을에 오늘 한가위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사랑하는 온 가족들이 기쁨으로 만나는 추석을 기다리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흩어져 있던 모든 가족들이 고향에 함께 모여 그 동안의 삶을 함께 나누고, 위로하고 격려하며 새로운 힘을 얻어 자기의 일터로 돌아가는 이번 해의 추석은 그러하지를 못할 것입니다. 우리를 여전히 짓누르고 있는 코로나 팬더믹 때문입니다.

3. 이런 우리의 현실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생각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만남과 나눔을 통해 삶을 나누며, 삶의 관계를 만들어 가는 일상의 삶이 이렇게 제한되고, 부담되고, 서로 회피할 줄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혹시 모를 전염 때문에 서로의 얼굴을 가려야 하는 마스크가 우리의 마음마저도 가로막고, 서로 의심해야 하는 불편하고 불쾌한 상황을 상상해본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런 현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고, 어떤 변화가 있을지 어느 누구도 확실하게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온 세상이 염려하고 두려워합니다.

4. 우리 믿는 자들에게 소중하고 생명과 같이 지켜왔던 교회 예배를 함께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한국교회 역사에 있어 초유의 일입니다. 각 개교회 그리고 가족들에게 진정 놀랍기도 하고, 믿는자로서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이자 상황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모임의 공동체이고, 그 모임을 통해 교회의 존재를 확인하고, 나아갈 방향을 나누며,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들이 눈에 보이지도 않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연기되고, 취소되며, 타의에 의해 통제되는 지금 교회공동체의 삶은 교회의 미래를 고민하게 하고 있습니다.

5. 이런 우리 삶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Why?’라는 질문을 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지금 코로나 상황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사회과학적으로, 정치적으로 분석하고, 해석하고 대안을 만들어 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 가운데 인류는 끊임없이 why’를 외치고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어느 정도 예측하고, 이런 상황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충격이 덜 하지만, 그럼에도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우리의 사회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6. 코로나 팬더믹 현상에 대하여 라고 하는 질문은 우리 믿는 자들이 더욱 깊은 숨으로 내뱉어내고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우리 가정과 교회에 그리고 세상에 일어나고 있는지 기도하는 마음으로, 때로는 푸념으로 하나님께 그리고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7. 하나님의 창조역사와 하나님의 섭리를 배우고 말씀을 듣는 창조절 넷째주일의 세 본문은 우리의 라고 하는 질문에 대하여 말씀을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묵상하고, 고민하며, 결단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8. 왜 그런가 하면, 우리의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일들이 지금 우리 시대에만 그리고 우리에게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오랜 하나님의 역사에서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우리보다도 더 심각한 이해하지 못할 일들을 성경은 증언하기 때문입니다.

9. 우리 인간은 인과응보의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때는 무엇인가 분명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의 합리적인 사고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생각입니다. 성경의 오랜 역사 가운데 많은 신앙의 사람들은 그 사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역사 앞에 반응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10. 그런데 성경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그런 인과응보적인 삶만이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선한 삶으로 인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악한 삶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반복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역사에서 많은 사건들은 우리가 인지하고 예상할 수 없는,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응보적인 생각을 했던 믿음의 사람들이 당황하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났었습니다.

11. 그날, 오천명을 오병이어로 먹이셨던 예수님은 저녁이 되었을 때, 제자들을 재촉하셔서 배를 타고 예수님보다 앞서서 호수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 건너편 동네 게네사렛에서 불쌍한 환자들을 치료하시는 주님의 사역을 감당하기 위함이었습니다.

12. 그런데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배를 타고 출발했던 그들에게 어둠 속에서 큰 바람이 불었고(6:18) 파도가 일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그 배에서 큰 바람으로 힘겨워했고, 도저히 나갈 수 없는 곤란함에 처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그 배에서 내리지도, 피하지도 못하고, 큰 물결로 인해 고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13, 마태는 이 때를 밤 사경이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저녁을 4등분 하는데, 4경이라고 하는 것은 새벽 3시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호수 가운데에서 큰 바람이 불어치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이 상황 앞에 제자들은 염려하고 두려워했습니다.

14. 더욱이 제자들이 당황했던 것은 이렇게 바다에 나오게 된 것이 자신들의 뜻이나 결정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시작하시고, 주님께서 말씀하셔서, 주님 뜻대로 출발했는데, 육지에서 수 리나 떨어져 있고, 바람이 거스르는 상황 속에서, 바람과 거센 파도로 고난을 당하는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15. 마가복음 435절에서 주님께서 사역하실 때 주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가십니다. 예수님은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때 큰 광풍이 불었습니다.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거의 침몰 상황이고, 배만 침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명까지도 위협받는 상황이었습니다.

16.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는데도 광풍이 불었고, 그들의 생명이 위협받는 심각한 상황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재촉하시고 말씀하셨는데도 큰 바람이 불어 고난에 처해있고, 주님이 함께 타고 가시는데도 생명의 위협, 극한 상황이 있다는 것입니다.

17. 이때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상황 속에서 질문을 합니다. ‘, why’. 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납니까?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욕심을 부려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재촉하신 것인데, 주님도 우리와 함께 계신데, 왜 그런 거대한 광풍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질문을 합니다.

18. 이 상황은 때때로 우리에게도 일어나는 삶의 한 부분입니다. 우리가 사역을 할 때 분명히 주님을 위한 사역이고, 주님께서 지금 뜻하셔서 우리가 순종하여 감당하는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바람으로 우리가 흔들리고, 거센 물결로 넘어지기도 하며, 두려움으로 낙심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19.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주님은 사도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의 인과응보적인 사고 속에서 판단하고 생각하는 것 그 너머(beyond)에 하나님의 뜻, 섭리가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라고 질문하지만, 그 질문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들이 깨닫지 못하는 주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20. 그릇을 만드는 토기장이에게 흙 한 덩이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귀한 데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한 데 쓸 그릇을 만들 선택과 권리가 있습니다. 그 토기장이가 귀한 그릇을 만들고, 천한 그릇을 만든다고 하여도, 그 흙들은 토기장이에게, 왜 그렇게 만들었느냐고 질문할 수 없습니다. 모든 그릇들은 토기장이의 마음대로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쓰임을 받는 흙들이 쓰임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하고, 반문을 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21. 욥은 더욱 선명하게 고백합니다. 욥 자신이 이유도 없이 자신과 가족들의 삶이 무참하게 무너졌을 때, 비참하게 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불만과 불평을 넘어서는 고독의 자리와 외로움의 자리에 있었습니다. 인과응보의 사고를 가지고 있었던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도 없이 그의 삶이 와르르 무너졌을 때,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22. 이때 그의 친구 엘리후를 통해, “하나님의 오묘하고 경이로운 행위를 인간이 어떻게 알 수 있느냐”, 도전과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으로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인간이 모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의로움으로 무장된 사람일수록 더욱 이해를 못합니다. 범죄했을 때, 형벌을 받는 것이기 때문에, 어려움과 고난을 당하는 것은 큰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절대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23. 욥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은, 의인도 고난을 당할 수 있다, 선한 일을 하고, 하려는 사람도 삶의 여정에서는 어려움도 겪고, 고난도 겪고, 넘어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고난은 무의미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 죄 없으셨던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이 선명하게 말씀하십니다.

24. 우리에게 주어지는 삶의 환경과 도전 그리고 고난이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지만, 주님은 절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배에서 실패를 했던 베드로가 물에 빠져드는, 죽음에 빠져드는 상황에서 그를 포기하지 않고, 자비의 손을 뻗어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간직하도록 합시다.

2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낼 수 있겠습니까?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위험이나,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끊을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코로나 팬더믹과 기후변화로 인한 자연의 역습과 같은 거대한 바람과 물결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긍휼을 간구하기 바랍니다.

26. 이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과 은혜가 모든 가족들에게 임해서 복된 믿음의 가정이 되고,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주님의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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