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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창조절(3-1) - "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20-09-17 (목) 21:10 3년전 1230  

본문) 창 2:18-25, 엡  5:21절~6:4, 막 10:1~16


“주일이 되면 함께 모여서 손잡고 반갑게 인사하며 서로 평화를 빌어주고, 마음을 드높여 찬송하고 말씀을 나누고, 같이 밥 먹고 설거지도 하고….” 우리가 늘 그렇게 해왔던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집에서 휴대전화나 컴퓨터를 보며 예배드리고, 교회에서 모일 때도 무슨 복면 가왕도 아닌데 마스크를 써야 하지요. 반가워도 서로 손잡지 못하고 주먹질을 해야 합니다. 찬송도 가능한 한 나지막이 부르라지요? 무엇보다 남신도들은 설거지를 하지 못해서 손이 근질근질한데, 할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밥 먹으러 온다(?)는 분들은 너무 실망이 큽니다. 그렇게 우리는, 늘 해왔고 또 언제나 그렇게 하리라 생각했던 日常을 잃어버렸습니다. 하지 못하게 되니까,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 우리 곁에 늘 있어서 그 소중함을 모르고 사는 소소한 것들이야말로 정말 가치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신앙으로 산다는 것은, 그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을 은총의 선물로 알고, 기뻐하고 감사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요? 무엇보다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 우리의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우리 교우들이야말로 참으로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에베소서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에베소서는 바울이 에베소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쓴 편지지요. 그런데 바울은 어떤 처지에 있었을까요? 우선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3:1, 4:1) 바울이 옥에 갇힌 이유는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옥에 갇혀서 환란(3:13)을 당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슬에 매여 있다(6:20)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전하다가 투옥되어 사슬에 묶여 환란을 당하고 있습니다. 복음 전도가 벽에 부딪힌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이 옥에 갇혀 있는데, 교회에는 그리스도를 잘못 가르치는 자들이 들어왔습니다. 몰래 들어온 그들은 온갖 속임수와 기묘한 술수와 헛된 말로 그리스도인을 미혹합니다. 특히 소아시아의 부유한 도시 에베소에는 아데미 여신의 신전이 있습니다.(행 19:27) 이방 풍토에서 많은 그리스도인이 미혹을 받고 방탕과 방종에 빠져가고 있었습니다. 특히 영혼만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몸을 방탕에 맡기는 것(4:19)을 수치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그렇게 배우지 않았다(4:20)고 경고하지요. 그들에게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잘못을 깨우쳐주고 싶지만, 사슬에 묶인 바울은 그럴 수도 없습니다.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절박한 심정으로 간곡하게(4:17) 권고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남편과 아내, 그리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주목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줍니다. 흔히 세상이 각박하고 흉흉해지면, 사이비 종파들이 많이 나타나지요. 그런데 그 사이비 종파들에는 한 가지 공통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가정을 부정합니다. 종말을 강조하면서 가정을 버리라고 하지요. 부모와 자녀가 척을 지게 하고 남편과 아내가 원수가 되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서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바울은 먼저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말합니다. 남편과 아내는 가정의 기초지요. 그런데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그 당시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요? 남편은 주인, 곧 소유자이고, 아내는 남편에게 귀속된 소유물/재산입니다. 소유주와 소유물의 관계, 이것이 그 당시의 일반적인 생각이지요.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일방적인 소유와 지배의 관계입니다. 얼핏 보면, 바울의 가르침도 당시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따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지요. 그것도 그리스도에게 하듯 순종하라고 합니다. 이거 강력한 가부장제를 말하는 걸까요? 아닙니다. 바울의 말은 끝까지 다 들어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남편에게도 말하지요.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남편에게, 그리스도가 교회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주심같이 하라고 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거, 아내를 위하여 죽으라는 말이지요? 그 당시의 일반적인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생각하면, 바울의 가르침의 방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순종하는’ 쌍방교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는’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악한 때’를 살아가는 에베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무엇보다 그들의 가정을 소중히 지키라고 했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 소소한 일상을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내라는 것입니다. 악한 때일수록, 그 소소한 일상을 버리고 떠날 것이 아니라 소중하고 거룩하게 지켜내야 합니다. 바울은 우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말했지요.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가정도 또 하나의 성전이며 교회입니다.


마가복음 11장에 이르면, 예수님은 드디어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그렇게 갈릴리로부터 예루살렘에 이르는 복음의 길을 생각하면, 예루살렘 입성 직전의 10장은 아주 중요합니다. 특히 10장은 예수님의 두 번째 수난 예고와 세 번째 수난 예고 사이에 있지요. 긴장감이 감도는 분위기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고, 십자가 고난의 길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하고 긴박한 때에, 예수님은 ‘남편과 아내’, 그리고 ‘어린이’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아내/여자와 어린이의 문제가 아주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먼저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렇게 물었지요.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 이 질문에는 그들의 생각이 숨어 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버릴 수 있다’, ‘남편이 아내의 주인이다’, 이것이 그들의 생각입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반문하셨지요.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했느냐?” 율법에는 뭐라고 했느냐는 것이지요. 스스로 율법의 대가며 모세의 제자라 자부하는 그들이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이혼증서를 써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 모세는 버려도 된다고 허락했다는 말이지요. 이혼증서도 남자가 쓰고 버리는 것도 남자니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에게 예수님은, 모세는 너희의 완악함 때문에 이 계명을 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모세의 계명은 본디 버리라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버릴 수 없지만, 완악한 남자들이 버릴 때는 아내에게 증서를 써주어서, 다른 길을 열어주라는 것이다, 그 말입니다. 모세의 율법도 버리는 남편이 아니라 버림받는 아내를 보호하는 데 방점이 있다는 말이지요.


이렇게 모세의 율법에 대한 그들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고 나서, 예수님은 모세보다 앞선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신 하나님의 뜻,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본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고,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사람을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서 쓰다듬어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이 긴박한 때에 어린아이까지 데리고 온 이 사람들은 생각이 있는 걸까요? 그런데 그것을 본 예수님은 노하셨습니다. 어린아이가 예수님에게 오지 못하게 막는 것은 예수님이 노하실 일입니다. 어린이가 예수님에게 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가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성서 말씀으로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지으신 이야기를 함께 읽었습니다. 창세기를 펼치면 하늘과 땅과 거기 가득한 온 생명을 지으시는 창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하나님은 창조하신 것을 보면서 ‘참 좋다’고 말씀하시지요. 빛이 생기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고’,(1:4) 뭍과 바다를 보시니 ‘좋았고’(10절), 푸른 초목을 보시니 ‘좋았고’(12절), 해와 달과 별을 보시니 ‘좋았고’(18절) 물고기와 날개 달린 새들을 보시니 ‘좋았고’(21절), 들짐승과 집짐승을 만드시고 ‘좋았고’(25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고 ‘좋았다’(31절) 하십니다. 창조의 이야기는 계속 ‘참 좋다’는 하나님의 탄성으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좋지 않다’ 하시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무엇일까요? 그토록 창조의 모든 것을 좋다고 하시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지 않다고 하신,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남자가 혼자 있는 것’(2:18)이었습니다. 그렇게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은 하나님께서는, 그를 돕는 사람, 곧 그에게 알맞은 짝을 만들기로 하셨습니다.


남자만으로는 하나님의 창조가 아직 완성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남자에게 알맞은 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남자의 짝으로 알맞을까요? 과연 누가 남자를 ‘도울’ 수 있을까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여기서 ‘돕는다’는 말은 단순히 보필하고 보조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서는 하나님을 인간을 ‘돕는 분’(꼬엘)이라고 말하지요. 돕는다는 말은 구원한다는 뜻도 되고, 완성한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남자를 ‘도울’ 사람은, 아직은 보기에 좋지 않은, 아직은 온전하지 못한 남자를 보기 좋게 하는 사람입니다. 남자를 구원할 사람이기도 하지요.


하나님은 먼저 남자의 짝 후보로 짐승들과 새를 데려왔습니다. 그 사람은 그 동물들에게 하나하나 이름을 붙여 주었지요. 그렇지만 거기에는 남자의 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사람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뽑아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만든 여자를 남자에게 데려오셨지요. 그러자 그 남자가 말하였습니다.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이쉬)에게서 나왔으니 여자(이샤)라고 부르겠다.” 바로 그토록 찾던 짝, 비로소 남자를 완성하고 구원하는 사람, 여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여자를 창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는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고, 서로 다른 사람이 함께 더불어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오늘은 창조절 셋째 주일입니다. 코로나와 긴 장마와 태풍을 겪으면서도, 하늘은 파랗게 드높아가고 산천은 곱게 물들기 시작했습니다. 들판에는 오곡이 황금빛으로 익어가고 있지요. 이 아름다운 자연, 이 신비한 일상은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합니까?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사람은 창조의 정점이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말은 우리를 한없이 겸손하게, 그리고 더없이 당당하게 합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피조물과 나란히 함께 더불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남자와 여자로, 어른과 아이로, 서로 다른 사람으로 나란히 함께 더불어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서로 돕고 함께 완성하며 살 수 있도록,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채워주시고, 감싸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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