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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창조절(10-2) - " 가장 큰 사랑을 실천하려면 " / 최부옥 목사

관리자 2019-11-01 (금) 21:34 4년전 1885  

본문) 삼하 1:17-27, 요15:12-17, 계14:13-15:4

 

지난 주, 우리 기독교계에는 매우 대조(對照)되는 두 장면이 펼쳐졌다. 문 대통령이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시골에 내려가 현직 대통령답지 않게 매우 조촐하지만 경건하게 평소 섬기던 부산의 성당에서 교회장으로 가신 어머니를 보내드리는 모습을 통하여, 온 국민적 감동과 위로를 견인하는 장면이 있었다. 더 놀라웠던 것은 고인이 평소 간병하던 병원에서도, 그녀가 대통령의 어머니인 줄을 전혀 몰랐다는 점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대통령 가족이란 표시를 전혀 내지 아니하고, 오직 범인(凡人)으로 소중한 믿음만을 간직하며, 평온한 생을 보낸 것이다. 

 

그런가하면, 이 상중(喪中)에도 광화문과 청와대 광장입구에서는 요즈음 한창 그 이름이 뜨고 있는(?) 전광훈씨(교단에서 제명됨)가 그를 맹신적으로 추종하는 무리들에게 대통령을 악담하고 저주하며 온갖 수모를 안기는 거친 언행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의 행적만으로는 도저히 기독교 성직자일 수가 없는 행태를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기독교사회문제연구소의 기독교인 여론조사에서도 거의 90%가 그런 전씨의 행위를 거부하고 부끄러워하는 일인데도, 마치 자기가 기독교를 대표하는 의인이요 예언자인 듯 처신하고 있어서 너무 통탄스럽다. 

 

같은 기독교라도, 같은 신앙인이라도, 어찌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참으로 안타깝다! 대통령이 섬기는 천주교는 사회적 무게감을 더욱 강화될 것으로 보이는 반면에, 그나마 영적 기반이 취약해진 한국 개신교는 그 위기가 더욱 가중될 것 같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들도 곧 고립되겠지만, 그러나 괴물 되어 날뛰는 그들의 후유증은 제일 야당의 비호아래, 더욱 커질 것 같아 큰 걱정이다. 교회의 책임이 크고, 신학교들의 잘못된 신앙교육이 책망을 당해야 마땅하다. 

 

기독교의 정체성을 다시 생각한다.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이기 위한 기조가 무엇일까? 사랑이다! 사랑의 색채와 동력을 보전할 때, 기독교와 교회는 역동한다. 이것을 살리는 곳은 부흥한다. 하지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사랑을 빼앗기고 무시한 행태에 빠지면, 교회와 성도는 모두 몰락한다. 요즈음 우리 교회들을 보면, 이 사랑의 몰락 때문에 위기에 빠진 교회들이 너무 많다. 사랑도 아가페여야 하는데, 그것을 못하니까 에로스 쪽으로 빠져 들고 있다. 어이없다!

 

창조절 열 번째 주일을 맞이한 우리는, 마침 우리의 본질인 진정한 사랑에 대하여 듣게 된다. 그러기에 오늘 세 본문 말씀에서 우리는 다시금 우리를 살려낼 진정한 사랑을 발견하고 그 방법을 익혀서, 반드시 사랑의 사람들로 거듭나도록 해야 하겠다. 그러면 우리가 오늘 듣게 될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설교에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13절)이란 대목을 언급하셨다. 사랑도 가장 큰 사랑이 바로 자기 친구를 위해 목숨을 내 놓은 사랑에 있음을 선명하게 밝혀 주신 것이다. 이는 사랑도 사랑 나름이란 말씀도 되고, 사랑도 질적 차이가 엄존하고 있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누가 그 큰 사랑의 실천자일까? 그리고 그 사랑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이 점에서 우리는 우선, 예수님 자신을 그 최고의 사랑의 실천자로 지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당신이 그 사랑의 세계를 아시고, 그 세계를 모범(模範)으로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친히 하늘 영광을 내려놓고 이 낮은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오셔서 모든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고 또 그들의 삶의 애환(哀歡)을 함께 나누시면서, 나중에는 그런 모습에 극단적으로 시샘하던 당시의 종교인들과 기득권층들의 미움과 증오를 받아, 십자가에 처형당하시는 자리에 서있으셨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친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제대로 내어 놓으셨다. 

 

그러면, 주님의 그런 큰 사랑에 우리도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물론 우리도 주님처럼 살면 될 것이다. 그러려면 좀 더 살펴보아야 할 일이 있다. 예수 안에는 그렇게 사시려는 동인(動因)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분명히 있다. 오늘 본문들에서 그 해답으로 찾을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 함께 찾아보자. 

 

우선 스스로에게 묻자. 나는 신앙인으로서 나의 생명보다 하나님 여호와를 더 우선하고 존중히 여기고 섬기고 있는가? 나는 내 주장과 입장과 식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을 더 우선하고 순종하며 사는가? 나는 내 것보다도 하나님의 것을 더 소중히 여기며 섬기고 사는가? 만일, 이런 질문들에 대하여 ‘예’라고 답할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 사는 존재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하여 ‘아니요’라고 답할 수밖에 없는 수준이라면, 그는 결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낙제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 그런지-, 이제 주어진 세 본문 말씀들을 통하여 확인해 보도록 하자. 

구약의 다윗의 활의 노래에서 보여 준, 사울 왕과 그의 아들 요나단을 향한 깊은 추모와 애정의 글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물론 요나단 왕자를 위한 높은 차원의 애도는 당연하다. 요나단으로부터 너무도 기이한 사랑을 받았던 다윗이었기 때문이다(26절). 하지만 사울 왕을 향한 찬사와 평가는 특별하다. 다윗은 사울에게 계속 쫓기며 살았고, 자신을 죽이려고 계속 추격하며 괴롭게 하였던 원수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다윗이 어찌 그리 슬퍼하며 애도할 수 있나? 

 

혹자는 다윗의 정치인의 처세술로 보기도 한다. 전사한 자들에 대한 부담도 덜게 된 것도 이유가 되고, 남은 백성들에게 자신의 너그러운 관용과 품을 선양(宣揚)하므로서, 자신의 대권의 기반을 닦게 되는 데에도 유익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이 부분은 어떤가? 다윗이 이 조가를 온 백성에게 보급하기 전에 취했던 한 조치, 즉 죽어가는 사울 왕의 요청으로, 사울을 자기 칼로 쳐 죽인 후, 그의 유품들을 취하여 다윗에게 넘겨주었던 이방인 아말렉 젊은이를 다윗이 공개적으로 처형한 사건 말이다(삼하1:1-16참조). 어찌 보면 다윗에게는 자신의 큰 짐을 덜어준 공로자일 수 있는 그에게 다윗은 왜 그런 몰인정하고 과격한 조치를 취했을까? 물론 확실한 점이 있다. 그의 그런 행위는 결코 자신에게 유.불리를 따져서 결정하는 세속 인간들이 취하는 정치적 결단의 산물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바로 그가 하나님 앞에서 목숨 걸고 지켜온 신앙의 원칙과 고백 때문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친히 기름 부어 직임(職任)을 부여하신 그의 종의 문제는, 하나님 자신이 직접 처리하실 일이지 인간의 손에 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떤 경우에도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역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다윗의 이 원칙은 그때 아말렉 젊은이에게 만의 적용한 것이 아니었다. 먼저 자신부터 목숨 걸고 지켜 온 원칙이었다. 자기를 쫓는 사울 왕이 허점을 보이자, 몇 차례 그를 간단히 죽일 수 있는 기회들이 주어졌으나, 다윗은 주변의 ‘처지하자’는 강력한 요청을 그 때마다 강력이 거부했다. ‘자기는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종에게 절대 손대지 않는다’는 신앙의 원칙을 고집한 것이다. 그 바람에 다윗은 사울에게 계속 좇기며 고생하였다. 그래도 후회나 원망하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께서 선하게 처리하실 줄 믿고, 하나님 손에 맡긴 것이다. 

 

다윗의 이런 행동을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상 물정이나 인간 사회를 전혀 모르는 바보인가, 아니면 참 신앙인인가? 참 고집스러운 다윗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평가를 어떻게 하든, 그는 목숨 걸고 그 원칙을 자신부터 지켰고, 온 백성들에게도 그 신앙고백 속에서 하나 되기를 원하였다. 하나님 중심, 그의 말씀 중심, 우리는 그의 충성스러운 백성이길 원하였다! 그랬기에, 하나님과 그를 존중하는 일을 제일의 의로 삶의 원칙으로 삼고 살아온 다윗에게는 하나님 사랑과 인간사랑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었고, 가볍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하나님은 다윗을 그의 마음에 둔 종으로 선택하셨고, 그가 범죄 하였을 때에도 회개하도록 하시면서, 끝까지 버리지 아니하신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인간으로 세상에 보내실 때, 그 다윗의 후손(핏줄)으로 오시게 길도 여신 것이다. 그 뿐 아니다. 이스라엘의 수천 년 역사에서 오직 다윗만이 그들의 대표적 왕으로 공인하셨다. 

 

복음서의 경우도 그렇다. 다윗의 후손되어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예수께서도 언제나 그의 모든 삶은 당신을 이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 하나님 중심이셨다. 제자들에게 교육시킬 때에도,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일관되게 강조하셨다(마6:33). 하늘 아버지의 뜻과 그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은 죄인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내어주셨으며,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무한 포용하고 용서하며 사랑하실 수 있으셨다. 제자들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것들을 내세우려고 해서는 안 됨을 강조하셨다. 하나님 우선주의를 절대 강조하신 것이다.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일도, 스스로의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성령의 도우심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계명(명령)으로 받고(12,17절), 그의 뜻을 절대 순복하는 태도에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런 사람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를 모세를 대하듯 하시고, 다윗을 대하듯 하신다. 당신의 아들이신 예수의 친구로도 영접해 주신다. 그러면서, 우리를 더욱 사랑해 주시고, 우리가 구하는 모든 것을 기꺼이 응답해 주시기도 하신다(13-16절)

 

계시록의 증언은 ‘주 안에서 죽은 자는 복이 있다’(13절)과 선언한다! 이것은 죽음이 우리에게 모든 것의 끝이 아님을 선언한 것이고, 죽음을 넘어 복을 누릴 세계가 확실히 존재함을 알려 준 생명의 말씀이다. 얼마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내용인가! 하지만 그 복은 아무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님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고백 때문에, 자신의 모든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고, 나중에는 목숨까지도 내려 놓아야했던 이들에게만 약속된 복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우리 모두도 최후의 그 날을 기다린다. 우리는 모두 대기(待機)표를 받아 논 존재들이다. 그날에 나를 심판할 심판관도 이미 결정되어 있다. 바로 내가 이 세상에서 행하고 산 모든 행위와 언어들이 주 앞에서 나를 심판하거나 변호해 줄 증인으로 나와 마주할 것이다(13.하 참조). 아, 누가 그런 순간을 면할 수 있을까? 아무도 없다! 그러기에 내 삶은 중요하다. 

 

남한산성의 동료 순교자들의 버려진 시신들을 돌보다가, 미움을 받아 자신도 순교한 의인, 피에타 한덕윤의 천상에서의 찬양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짐승의 미혹에 대항하고 그것 때문에 죽임을 당한 이들이 하늘의 천상에서 의로우신 여호와의 심판을 찬양하고, 그가 펼치신 승리의 역사를 모세의 찬양처럼 어린 양의 찬양처럼, 노래하는 천상의 무리에 이 글을 읽고 믿음을 함께 고백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나도 참여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15:2-4절 참조). 

 

다시 주님이 말씀하신 ‘가장 큰 사랑’에 주목하자. 사랑만 남을 것이다. 우리 영혼의 타락을 부추기는 세속의 갖가지 흔들기에 현혹되지 말자. 못된 적 그리스도에게 휘말려들지 말자. 내 마음이 미움과 저주와 대립에 휘말리지 말도록 기도하자. 오직 하나님과 이웃 사랑하는 일에 전념하자. 그 일이 가능하도록, 예수처럼, 다윗처럼, 한덕윤 처럼-, 오직 하나님 중심과 그의 말씀에 순복하는 일을 제일 의(義)로 삼고 살아가자. 다윗처럼 원칙을 가진 신앙인으로 굳게 서자. 그럴 때, 그리스도의 의로운 손이 우리 모두와 한국교회에까지도 구원을 베푸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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