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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8-1) - " 욕망의 갈림길 " / 이순태 목사 > 창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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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창조절(8-1) - " 욕망의 갈림길 " / 이순태 목사

관리자 2019-10-18 (금) 16:01 4년전 1618  

본문) 삼상 8:1-22, 롬 7:5-13, 마 11:16-24

  

1.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저절로 생겨난 것인가? 옷이나 밥이 그저 우연히 생긴 것인가? 집이 저절로 세워지고 자동차가 저절로 굴러가는가? 다 만든 사람이 있지 않은가? 하물며 우주만물, 신묘막측한 자연의 신비를 보면서도 그것들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생각하는 것이 과연 이성적인 판단인가? 옷 하나도 만든 자가 있듯이 자연만물도 다 만든 분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찌 그리 무지몽매한가? 옷을 만든 자가 있다는 것은 확신하면서, 그보다 더 만들기 어려운 우주만물은 저절로 생겨났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이 구원하시려고 손을 내미는데도 하나님의 손길을 뿌리친다. 하나님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그야말로 캄캄한 밤이다. 우리는 이런 세태를 오늘 본문에서 발견할 수 있다. 

  

2. ① 먼저 구약 본문을 보니, 사무엘이 등장한다. 어느날 이스라엘 장로들이 모두 모여 사무엘을 찾아와서 이렇게 요청을 하였다.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간단히 말해서 우리에게 왕을 세워주시오! 

  그러면 갑작스레 왕을 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동안 사무엘은 예언자이면서 제사장, 그리고 사사로서 이스라엘에 정치적인 안정을 가져다 주었다. 그래서 사무엘이 살아 있는 동안 그렇게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감히 넘보지 못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 성읍들을 순회하면서 백성에게 영적 교훈을 가르쳤다(삼상 7:16).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이제 사무엘도 늙게 되었다. 그러자 사무엘이 맡고 있던 사사의 역할을 그의 두 아들들(요엘, 아비야)이 이어받아, 백성들의 소송을 판결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터졌다. 이들이 뇌물을 받고 재판을 하는 것이다. 이런 부패는 신정체제에 큰 위기를 초래하였다. 

  장로들은 사무엘을 찾아와 한 건의를 하였다. “우리에게 왕을 세워주시오!” 그러나 사무엘 아들들의 부패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이었다. 핵심적인 이유는 다른데 있었다. 그것은 그동안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을 거절하는 것이다. 왕을 세워 달라는 장로들의 요구를 사무엘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이제까지 사무엘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고자 애를 썼다. 그런데 이제 주변 나라들과 같이 되고 싶다? 이건 아니었다. 답답한 마음으로 사무엘은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기도 중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이는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정복 후 사무엘 때까지 약 200년동안 사사들의 통치를 받으며 살았다. 사사들은 평소에는 내부의 행정이나 재판을 맡아 해결하였는데, 외부의 침략이 있으면 백성을 동원하여 전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사사시대에 왕이 없었느냐? 하면 꼭 그런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이셨다. 그런데 이제 새로이 왕을 세워달라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을 왕으로 섬기겠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백성이 사무엘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린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요구는 어쩌면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출애굽 이후부터 사무엘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들을 섬겨 왔다. 지금 왕을 세워 달라는 요구 역시 그런 우상숭배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다. 

  ②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요구를 기뻐하지 않으시면서도 일단 허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신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어떤 일을 허락하셨다고 그 일을 항상 기뻐하시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왕을 세워달라는 백성의 요구에 응하시면서 사무엘에게 왕정정치의 폐해에 대해 미리 알릴 것을 명하셨다. 군주제란 불평등과 계층화를 조장함으로써, 출애굽 이전의 노예생활로 회귀되는 제도가 된다. 왕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의 자유보다는 인간 아래에서 종노릇을 선택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사무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삼상 8:19절 이하에서 계속 주장했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와 같이 되어 우리를 위해 싸워줄 왕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백성들이 왕을 요구하는 본심을 볼 수 있다. 전쟁의 승리를 위해 왕이 있어야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왕의 요구는 기존에 이스라엘이 고수해 온 신앙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전쟁을 위해 왕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이제 이스라엘의 전쟁은 왕이 주도하는 전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전쟁은 하나님의 소관이 아니라, 인간적인 군사력과 전쟁 지도력에 달려 있으며, 전쟁의 승패 역시 하나님과 연관 짓지 않겠다는 주장이다. 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방향으로 나아갔을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보다는, 하나님의 도우심보다는 자신들의 욕망에 눈이 어두어졌기 때문이다. 욕망에 눈꺼풀이 가리우면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욕망만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어 버린다. 

    

 2) 그러면 예수님은 인간의 세태를 어떻게 표현하셨는가? 

  ①첫째로, 이웃에 대해 무관심, 무감동으로 대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아이들의 놀이를 예로 들면서 그것을 설명하신다. 아이들이 ‘혼인잔치 놀이’를 하면서 피리를 분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그에 대해 도무지 반응이 없다. 즐거워하지도 않고 춤도 추지 않는다. 또한 ‘장례식 놀이’를 하는데도 역시 반응이 없다. 슬피 울지도 않고 가슴도 치지 않는다. 그야말로 무관심, 무감동이다. 

  예수님이 지적한 인간 세태 둘째는, 남을 비난하고 깎아내리는데 익숙한 것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1: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 남을 비방하고 깎아내리려는 풍조이다. 세례 요한은 금욕주의적 성향이 강하였다. 그는 광야에 거하면서 야생꿀과 메뚜기를 먹으면서 살았다. 포도주도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가리켜 뭐라고 했는가? ‘귀신 들렸다’ ‘미쳤다’

  그런데 예수님은 음식을 잘 잡수셨고, 포도주도 즐거이 드셨다. 그러자 이전에 세례요한을 보고 ‘귀신들렸다, 미쳤다’ 라고 욕하던 사람들이 예수님더러 뭐라고 하는가?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 이라며 흉을 보았다. 게다가 사람들이 다 기피하는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예수님을 손가락질하였다. 즉 이 세대의 풍조는 사회의 주변부에 처한 사람들을 공공연히 무시하고, 또한 다른 사람을 욕하고 깎아내리는 데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반대파의 잘한 면은 보지 않고 잘못한 것만 크게 드러내어 비난하는 행태는 정치인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남을 칭찬하고 격려하는 말이 많은지, 남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말이 많은지 스스로 되돌아보아야 한다. 하루에 얼마나 남을 칭찬하는가? 

  ②인간 세태 셋째 특징은, 예수님에 대해 귀와 눈을 막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권능을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는 것에 대해 통탄해 하셨다. 고라신, 뱃새다, 그리고 가버나움이 그 대상이 되는데, 그중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선교 사역의 중심지였다. 예수님은 공생애의 많은 시간을 가버나움에서 보내셨다. 그러나 오늘날 가버나움이라는 도시는 없다. 예수님 당시 가버나움은 무역도시로서, 남쪽으로는 아프리카로, 북쪽으로는 시리아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도시였다. 그러나 지금은 회당의 돌기둥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다. 

  가버나움은 무역이 흥하고 부요하니 하늘에까지 높아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주님은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심판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고 말씀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가버나움 사람들은 복음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이들은 주님의 복음을 듣고도 회개치 않았을까? 그들의 눈의 초점이 자신들의 욕망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3. ①이런 인간의 행태를 아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라를 주셨다. ‘토라’를 우리말 성경에서는 율법이라고 번역하지만, 사실은 법적인 의미보다는 ‘가르침, 교훈’의 의미가 더 강하다. 그렇다면 토라의 역할은 무엇인가? 로마서 7:7,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즉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이 죄인가를 깨닫게 해 준다. 율법이 없을 때는 죄인 줄도 모르고 거리낌없이 살았다. 그런데 율법에 비추어 보니 나의 말과 행동이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이 죄인가, 무엇이 죄가 아닌가를 알려주는 지침서이다. 

  ②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가? 어떤 것이 죄인 것을 알았다. 그러면 그런 죄로부터 벗어나야 하는데, 실제의 삶을 보면 수시로 거짓말하고 남을 미워하고 시기한다. 머리로는 죄인 줄 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과 손발은 죄를 범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롬 7:19절은 이렇게 기술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바로 죄로 오염된 욕망 때문이다. 이 죄로 범벅된 자아는 그것이 거짓인 줄 모르고, 자신의 본질로 간주한다. 그래서 죄의 욕망에서 벗어나면 나라는 존재는 없어지는 줄 알고, 그 욕망을 붙잡는다.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은 롬 7: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외친다. 

  사도 바울은 초기에 기록한 고린도전서 15:9절에서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고백하였다. 중기의 기록인 에베소서 3:8절에서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라고 고백하였다. 그러다가 말기에 기록한 디모데전서 1:15절에서는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고백한다. 어찌된 영문인지 시간이 흘러가면서 점점 그 강도가 커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빛에 점점 깊이 들어갈수록 더 밝은 빛이 내게 비추게 되고, 더 많은 죄가 보이게 된 것이다. 어두운 데서는 자신의 더러운 것을 모른다! 그런데 밝은 빛에 나아가보니 내 죄가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빛을, 율법을 없앨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죽는 것이다. 나의 거짓된 자아가 죽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 나의 욕망 내려놓고, 내 죄를 인정할 때 주님은 우리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신다. 그리고 우리 빈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욕망으로 채우신다. 우리의 마음은 텅 빈채 살아갈 수 없다. 무언가 욕망을 가지면서 살아가게 된다. 문제는 그것이 세속적인 욕망인가, 거룩한 욕망인가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가? 잠시 지나갈 육신의 장막을 위한 욕망으로 살지 말고, 주님이 주신 소명, 생명 살리는 거룩한 욕망으로 살가시길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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