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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해] 창조절(4-1) - " 풍랑 가운데 우리는 붙드시는 하나님 " / 김유준 목사

관리자 2026-09-25 (금) 01:21 1시간전 3  

본문) 욥37:14-24, 마14:22-33, 롬9:14-26 


Ⅰ. 들어가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천고마비의 계절에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면 마음이 넓어집니다. 우리가 염려하며 살아가는 동안에도 계절은 바뀌고, 햇빛은 곡식을 익히며, 땅은 생명을 길러냅니다. 창조절은 이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마음을 멈추고, 우리를 살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아름다운 하늘 아래 우리의 삶이 늘 평안한 것은 아닙니다. 인생에는 열심히 노를 저어도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시간이 있습니다. 해야 할 일을 다 하고, 기도도 하고,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형편은 좀처럼 달라지지 않습니다.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에게는 거듭되는 불합격이, 가족을 돌보는 이에게는 끝이 보이지 않는 책임이, 빚과 주거 문제로 지친 가정에는 다가오는 한 달이 거센 맞바람처럼 느껴집니다.


그런 날에는 바람보다 더 두려운 생각이 찾아옵니다. ‘혹시 나만 혼자 남겨진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 나를 잊으신 것은 아닐까?’ 오늘 말씀은 바로 그 자리에서 우리를 만나십니다. 욥기는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창조주의 지혜와 공의를 들려줍니다. 마태복음은 풍랑 가운데 찾아오셔서 물에 빠지는 제자를 붙드시는 예수님을 보여줍니다. 로마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근거가 하나님의 긍휼에 있음을 선포합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아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긍휼로 붙드셔서 함께 살아갈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창조절의 감사는 이 하나님의 손길을 알아보는 데서 깊어집니다.


Ⅱ. 다 헤아릴 수 없어도 공의로운 창조주를 신뢰하십시오.


욥기 37장 14절은 말씀합니다. “욥이여 이것을 듣고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오묘한 일을 깨달으라.” 여기서 “서라”는 히브리어 ‘아모드’(עֲמֹד)인데, 고난에 관한 질문을 포기하라는 뜻으로 읽기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안다는 성급한 판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일에 귀 기울이라는 초대로 받아야 합니다. “깨달으라”는 ‘히트보넨’(הִתְבּוֹנֵן)인데, 이 깨달음은 정답을 서둘러 찾아내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자신의 앎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는지를 배우는 깊은 숙고입니다. 멈추어 서서 주의 깊게 살피라는 뜻입니다. ‘오묘한 일’인 ‘니플레오트’(נִפְלְא֬וֹת)는 인간의 이해와 능력을 넘어서는 놀라운 일들을 가리킵니다. 이어지는 번개와 구름, 남풍과 하늘에 관한 질문들은 우리가 이 세계의 주인이 아님을 일깨웁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숨 쉬며 살아가지만, 생명의 모든 조건을 스스로 만들거나 지켜 낼 수는 없습니다.


16절은 지식이 완전하신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18절의 금속 거울처럼 단단한 하늘은 고대의 시적 표현으로 창조 세계의 장엄함을 드러냅니다. 19~22절에서는 하나님에 관하여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어도, 그것이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가만히 서라”는 말씀 앞에서 먼저 멈추어야 할 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다 설명할 수 있다는 우리의 확신입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면서도 마음이 무너지는 부모에게, 병상에서 밤을 지새우는 이에게, 생계를 걱정하며 잠들지 못하는 사람에게 우리가 쉽게 이유를 붙일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모든 사정을 설명할 능력보다, 설명되지 않는 고통 곁에 머무를 사랑을 우리에게 요구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끝내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23절은 하나님께서 “정의나 무한한 공의를 굽히지 아니하심”을 고백합니다. ‘미쉬파트’(מִשְׁפָּט)는 “정의와 공정한 판단”을 의미하며, ‘체다카’(צְדָקָה)는 “마음을 같이 하는 의로움”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공의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이유로 세상의 불의와 폭력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은 공의를 굽히지 않으시는 분이기에, 우리는 불의 앞에서 탄식하며 그분께 호소할 수 있습니다. 24절의 경외는 이러한 신뢰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기에 절망에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동시에 맡겨진 삶을 부지런히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땅과 생명을 함부로 다룰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도, 이웃의 삶도, 다음 세대가 살아갈 세계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창조절의 감사는 생명을 존중하고 돌보는 책임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그 책임은 우리의 유한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맡겨진 생명을 사랑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마태복음은 이 신뢰에 놀라운 얼굴을 보여줍니다.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는 창조주의 권능이, 풍랑 가운데 제자들에게 다가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Ⅲ. 풍랑 가운데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그 손을 의지하십시오.


마태복음 14장 22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에 태우시고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십니다. 오병이어의 놀라운 기적을 체험한 무리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상황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제자들을 재촉하여 건너편에 건너가게 하시고 무리를 흩으셨습니다. 주옥같은 말씀과 함께 모두가 다 배불리 먹고 난 후의 엄청난 기적을 경험한 무리의 찬사와 칭송을 뒤로 한 채, 예수님은 산에 올라가 홀로 기도하십니다. 사람들의 찬사와 칭송보다 참된 고독의 자리로 나아가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한 사귐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을 따라 떠난 제자들의 배가 거센 바람과 물결을 만납니다. 사실 제자들은 불순종하여 그 자리에 간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보내신 길 위에서 어려움을 만났습니다. 그러므로 삶에 풍랑이 일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하지 마십시오.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도 고난을 겪습니다. 고난의 유무가 하나님의 사랑을 재는 잣대가 될 수는 없습니다. 24절은 배가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했다고 기록합니다. 헬라어 ‘바사니조메논’(βασανιζόμενον)이 괴롭힘과 고통을 나타내는 동사가 배에 사용된 것은 물결에 거세게 시달리는 상황을 생생하게 드러내어, 제자들의 두려움이 실제적인 위기에서 비롯되었음을 느끼게 합니다. 배에 관한 표현이지만, 그 안에서 애쓰는 제자들의 처지도 떠올리게 합니다. 


밤 사경, 대략 새벽 3~6시 사이에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십니다. 제자들의 긴 밤 속으로 주님께서 들어오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바다를 다스리시는 분으로 증언합니다. 예수님의 걸음은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는 묘기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제자들을 위협하는 바다 위로 창조주의 권위를 지니신 분이 다가오십니다. 이 이야기는 결국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을 보고 유령이라고 생각하여 두려워합니다. 너무 지치고 무서울 때는 다가오는 도움조차 알아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27절에서 그런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안심하라”는 ‘타르세이테’(Θαρσεῖτε)는 용기를 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용기는 제자들이 스스로 만들어 내야 할 자신감이 아니라, 그들에게 다가오신 주님 자신과 그분의 도우심을 의지할 때 얻는 담대함입니다. 그 용기의 근거는 가운데 놓인 “나니”,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로 소개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계시하신 말씀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바다 위에 서 계신 예수님의 행동은 우리의 고난 가운데 함께 하고 계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게 합니다. 제자들이 용기를 얻을 근거는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바람은 그치지 않았습니다. 풍랑이 잦아드는 것은 32절에서 주님과 베드로가 배에 오른 뒤입니다. 주님의 안심시키시는 음성은 그보다 먼저 들립니다. 형편이 다 정리되어야만 주님을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 앞에서도 우리를 부르시는 그분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이시거든 물 위로 오라고 명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오라” 하시자 그는 배에서 내려 예수님께로 걸어갑니다. 베드로를 움직인 것은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는 순간, 그는 물에 빠집니다. 주님을 향한 발걸음도 흔들림이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 베드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두려움 속에서 주저앉아 본 사람은 그의 마음을 압니다. 용기를 내어 시작했지만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 앞에서 자신감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외칩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체계적이고 긴 기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처지를 숨기지 않고 주님께 있는 그대로 내어놓는 간구입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을 때 부를 수 있는 이름이 있다는 것, 이것이 은혜입니다.


31절에서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십니다. ‘붙잡으셨다’는 ‘에펠라베토’(ἐπελάβετο)입니다. 이 동사는 주님의 긍휼이 위로의 말과 함께 생명을 구하는 구체적인 손길로 주어짐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이 순서를 놓치지 마십시오. 주님은 베드로를 붙잡으신 뒤 그의 믿음을 물으십니다. 베드로의 흔들림을 바로잡으시지만, 그를 물속에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를 살린 것은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그의 능력이 아니라, 흔들리는 그를 붙드신 주님의 손이었습니다. 믿음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이 의지하는 분이 누구인지 분명히 하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의 강도를 바라보다가 또 낙심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시선을 그분 자신에게 돌리십니다.


예수님과 베드로가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칩니다. 그리고 배 안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절하며 고백합니다.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베드로의 성공담이나 실패담이 아닙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아보고 경배하는 장면입니다. 위기를 건너온 공동체의 중심에 하나님의 아들이 계십니다. 이 말씀은 모든 기도에 즉각적인 형편의 해결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누구를 의지해야 하는지는 분명히 보여줍니다. 물 위에서 제자를 붙드신 분은 마침내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시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죄와 두려움, 생명과 미래를 맡깁니다.


Ⅳ. 긍휼로 붙들린 사람은 다른 이의 손을 붙드는 공동체를 이룹니다.


로마서 9장 14절에서 바울은 묻습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리고 대답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욥기에서 고백한 하나님의 공의가 여기에서도 확인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말할 때 우리는 그분의 의로우심과 선하심을 함께 기억해야 합니다. 로마서 9장은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바울의 큰 근심과 고통으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의 구원과 멸망을 무심하게 분류하고 있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을 품고 하나님의 약속을 묻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 마음으로 이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15절에서 바울은 출애굽기 33장 19절을 인용합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이 말씀의 배경에는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의 배반이 있습니다. 백성이 자신의 신실함으로 다시 기회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이 배반한 백성에게도 다시 살아갈 길을 열었습니다. 그래서 16절은 구원의 근거가 원하는 자나 달음박질하는 자에게 있지 않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 있다고 선언합니다. 우리의 결심과 노력은 소중하지만, 하나님께 은혜를 요구할 공로가 될 수 없습니다. 물에 빠지는 베드로를 붙드신 손길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내세울 것은 자신의 대단함보다, 우리에게 베풀어진 주님의 긍휼입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긍휼이 죄와 억압을 용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책임은 사라지지 않으며, 억압자의 저항도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무너뜨리지 못합니다.


19절부터 21절의 토기장이 비유는 구원의 주도권이 창조주께 있음을 강조합니다. 피조물이 하나님을 자기 기준 안에 가둘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이 하나님의 자리에 서서 다른 사람을 천한 그릇으로 낙인찍을 권한을 얻는 것은 아닙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도, 부유한 사람도 같은 진흙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22절과 23절에는 심판과 함께 ‘오래 참으심’, 곧 ‘마크로튀미아’(μακροθυμία)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악에 무관심하거나 심판할 능력이 없어서 생기는 지연이 아니라, 의로운 진노를 억제하시면서 자신의 구원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주권적인 인내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인내와 긍휼의 풍성함을 말합니다. 이 장이 동족의 구원을 향한 깊은 근심으로 시작된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으로 다른 사람의 운명을 성급히 판정하기보다, 우리를 오래 참아 주신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이어 바울은 선언합니다.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그리고 호세아의 회복 약속을 인용합니다.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던 말씀이 유대인과 이방인을 부르시는 은혜를 증언하는 자리에 놓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우리가 그어 놓은 경계를 넘어 새로운 백성을 부르십니다.


여기에 교회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 번도 흔들리지 않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두려워하고 실패하면서도 주님의 긍휼로 다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무너질 때, 그를 평가하는 말보다 붙드는 손이 먼저 나가야 합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이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가라앉고 있는 사람에게는 먼저 숨 쉴 자리가 필요합니다. 취업하지 못한 청년에게 결과를 재촉하기 전에 격려의 한마디가 필요하고, 빚으로 지친 가정에 생활 태도를 훈계하기 전에 사정을 듣고,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이웃에게 자격을 묻기 전에 안전한 자리를 내어주어야 합니다. 돌봄은 상대를 우리의 우월함 아래 두는 일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이웃으로 대하는 일입니다.


어려움에 빠지는 사람을 붙드는 사랑은, 사람들이 계속 어려움에 빠지게 되는 조건에도 관심을 가지게 됨니다. 당장 생계를 돕는 일과 함께 정당한 임금, 안전한 주거, 배움의 기회, 쉴 권리가 보장되는 사회를 위해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생명을 위협하는 환경 훼손을 줄이고 창조 세계를 돌보는 일도 이 사랑 안에 있습니다. 구체적인 제도와 방법은 신중하게 논의하되, 약한 이들의 삶을 외면하지 않는 방향은 분명해야 합니다. 개인의 회개와 죄 사함은 이 모든 실천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구원받은 우리는 소유와 관계를 포함한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립니다. 사회적 실천으로 구원을 사는 것이 아니라, 받은 구원의 은혜가 이웃에게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Ⅴ. 나가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교회가 그 손길을 닮아가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사람이 사정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공동체, 청년이 성과를 증명하지 않아도 환영받는 공동체,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 예산과 시간을 꾸준히 내어놓는 공동체가 됩시다. 한 사람의 짐을 함께 지는 작은 실천이 교회의 지속적인 습관이 되게 합시다.


마음이 지친 분은 마음을 내려놓고, 모든 짐을 혼자 붙들려던 손을 잠시 펴십시오. 공의로운 창조주께 여러분의 삶을 맡기십시오. 기도를 잘 정리할 힘조차 없다면 베드로의 간구를 드리십시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두려움을 숨기지 말고 주님께 아뢰십시오. 그리고 곁에 있는 믿음의 사람에게도 손을 내미십시오. 서로의 도움을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모두 은혜로 살아갑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공의를 굽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풍랑 가운데 제자에게 다가와 그를 붙드십니다. 긍휼의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백성으로 부르십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붙들린 손으로 이웃을 붙드는 교회가 됩시다. 우리의 예배가 공의와 사랑의 삶으로 이어지고, 우리의 공동체를 통해 누군가가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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