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삼하 1:17-27 요 15:12-17 계 14:13-15:4
1. 지금 우리 시대에 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힘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면, 사람들은 첫 번째를 정보 및 지식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한 지식, 정보등이 중요한 사회 발전과 사회 안정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인공지능, 빅데이터등 첨단 기술이 하루 하루 다르게 변화하는 상황에서의 생각입니다. 하나를 더 말하라고 한다면, 경제적 동기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돈이고 돈의 논리입니다. 역사를 움직여 온 동력이 결국은 이해득실과 돈이라는 입장입니다. 최근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정보와 과학기술 그리고 돈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 사회가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변화한다는 것은 생각과 사고의 변화이고 경향성입니다. 우리의 시대에서 정보와 지식 그리고 돈이라고 하는 힘은 점점 더 강해질 수 있습니다.
2. 그러나 우리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로서 진정 이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힘이 무엇인가 질문했을 때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이 세상을 진정 돌아가게 하는 힘이 무엇인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 세상을 돌아가게 하는 힘은 사랑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고, 공감하지 못하겠지만, 진정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은 눈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정보와 지식처럼 헤아릴 수 없고, 돈처럼 손으로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세상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그리고 미래에도 이 세상을 진정 돌아가게 하는 힘은 사랑입니다.
3. 지금 우리 시대는 많은 힘듦과 갈등이 있습니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공동체, 인간과 자연, 국가와 국가간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시대 속에서 정보와 지식 그리고 돈이 지배하고 영향력이 있는 세상에서, 누가 더 많은 정보와 지식 그리고 돈을 소유하느냐 하는 경쟁주의와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이 모든 문제들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세상 사람들 가운데 사랑이 약화되고, 그 사랑이 없기 때문이며, 그 사랑을 외면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점점 메마른 세상이 될 것이며, 불행해질 것이고, 고통스러울 것입니다.
4. 그런 우리에게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메마른 세상을 회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들고, 고통과 불행의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거룩한 목표이자 전략인 사랑을 가르쳐 주십니다.
5. 사무엘하 1장의 말씀은 다윗이 사울왕과 요나단의 죽음을 듣고 애가를 부르는 장면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욕하는 블레셋 골리앗 장군을 무너뜨렸을 때, 그를 부르고 선택한 것은 사울왕이었습니다. 그를 불러 자신이 아플 때 음악으로 위로를 받았던 사람이 바로 사울입니다.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넘어뜨리려는 이방인들과 전쟁을 할 때, 그 전쟁터에 보냈던 사람이 바로 사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시기심과 교만으로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지 못했던 사울왕은 끝내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로 인정되고 있다고 생각하며 질투했던 사울왕은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했습니다.
6. 왕궁에서도 다윗을 죽이려고 했고, 다윗이 도망하였을 때, 군사들을 동원하여 다윗을 잡아 죽이려 했는데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을 공격하여 생명을 빼앗을 수 있는 여러 상황이 있었음에도, 다윗은 사울왕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울왕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요나단의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7. 사울은 다윗을 수없이 죽이려 했던 원수였지만, 다윗은 그를 미워하지 않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그토록 괴롭히고 죽이려 했던 사울왕과 그의 진실한 친구인 요나단이 죽었을 때, 인간적으로 본다면, 사울의 죽음을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이었던 다윗은 자신의 복수심이나 사적인 감정을 넘어섭니다. 다윗은 이 조가에서 사울왕의 허물을 덮고, 그의 용맹함을 칭송합니다. 원수까지도 품은 다윗의 사랑을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8. 이 다윗의 사랑은 우리에게 용서할 수 없는 원수까지도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애도하고 인간적인 존엄성을 인정하는 믿음의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다윗처럼, 나를 힘들게 했던 이들까지도 주님의 마음으로 품고 사랑한 적이 있었는지 우리 자신들을 돌아봅시다. 좋은 관계일 때, 나에게 잘해주고, 이익을 주는 사람들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여러 상황으로, 아니면 상대방의 부족함과 탐욕 그리고 교만함으로 우리를 힘들게 하고, 손해를 끼치고, 마음을 상하게 하였을 때, 그때 우리는 다윗처럼,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졌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했다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9. 요한계시록 14장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그들의 수고가 그치고, 그들의 행한 일이 따르리로다.” (계 14:13)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받는 복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들이 수고를 그쳤을 때, 안식하게 되는데, 그들의 행한 일에 대한 열매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10. 주안에서 죽는 자들이라는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사랑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주님의 뜻을 따라 주님의 길, 그 사랑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주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라는 말씀은 세상의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인내하며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이며, 이들의 승리는 곧 사랑의 계명을 지킨 삶의 결과입니다. 환난 속에서도 서로를 사랑하고 붙들어 주었기에, 그 수고가 헛되지 않고, 영원한 안식과 승리로 이어집니다. 결국 인생이 끝날 때 우리가 이 땅에 남기는 것은 사랑의 행한 일들뿐입니다. 인간이 평생 추구하고, 최선의 노력을 다해 만들려고 했었던 재산과 명예는 다 사라집니다. 그러나 사랑의 수고는 하나님께 기억된다는 주님의 선포입니다. 15장 3절의 말씀처럼, 주님의 길은 의롭고 참되다고 말씀하십니다.
11.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는가 설명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 방법은 주님을 내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을 모시면, 내 안에 주님의 기쁨이 임하게 되면, 내가 진정 기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스스로 기쁨을 만들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이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 주님의 계명이 무엇인가 하면,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계명을 지키면, 그 때 우리 안에 기쁨이 풍성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12.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주님은 마지막 설교를 하시면서 사랑에 관한 말씀을 열여섯 절이나 할애하면서 반복하셨습니다. 심지어는, 만일 너희가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너희를 보고 내 제자라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흐릿해진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내가 교회에 다닌다, 내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여도, 세상은 우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13.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와 같이’라는 말을 예수님은 많이 사용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였기에, 잘 설명하고 싶었던 마음을 가지고 있으셨습니다. 주님이 사랑하셨던 것과 같이 하면, 기쁨의 근원이 되는 서로 사랑하는 것을 이루어간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여기에서 말하는 너희는 누구입니까? 후에는 이 말씀을 듣는 초대교회 교인들이었고, 그 후에는 성경을 읽는 모든 사람, 지금은 우리도 포함되는 말이 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지칭한 사람들은 그 말씀을 듣고 있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14. 주님이 말씀하실 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내가 제자들을, 베드로를, 야고보를, 도마를 사랑하였던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제자들, 베드로는 어떠하였겠습니까? 그 제자들은 허물이 많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문제가 많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가리운 적도 있었습니다. 로마 병사가 예수님을 잡으러 왔을 때, 무서워서 그 제자들은 모두 도망갔습니다. 배신을 했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을 기대하면서 장관자리를 요구했었던 허물이 많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가까이 오지 못하고, 멀리서 쳐다보았던 그리고 도망가서 숨어버렸던 제자들입니다. 그런 문제가 많은 제자들,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제자들을 주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길을 버리고, 자기의 본래의 길, 어부의 길로 되돌아왔을 때, 예수님은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라면 배신에 분노하여 꾸중하고 혼내고, 아니면 관계를 끊었을텐데, 우리 주님은 그런 마음 갖지 않고 먼저 찾아와 그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셨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그런 제자들을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5. 1943년 여수순천 반란사건이 있었을 때, 그 지역에서 나환자들이 모여있던 애양원에서 그들을 섬기고 있던 손양원 목사님의 아들들, 순천사범과 순천중학교에 다니던 동인이와 동신이가 좌익학생들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이때 이 소식을 듣고 실신을 했다고 합니다. 그 후에 범인 안재선이 잡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 딸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두 오빠는 천국 갔으나, 두 오빠를 죽인 자는 지옥 갈 것이 분명한데, 내 전도하는 자로서 지옥으로 가는 그를 보고만 있으란 말이냐? ’ 그리고 계엄군 본부를 찾아갑니다. 그때 마침 체포된 좌익학생들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다가, 피투성이가 되어있던 안재선을 만나게 되었고, 계엄군 사령관에게 울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석방이 되었습니다. 그런 마음과 사랑이 어디에서 나왔겠습니까? 그가 믿었던 그리고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16. 문제와 허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사랑한 것 같이 세상 사람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은 끝까지 책임지는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자리에서 제자들에게 마지막 잔과 빵을 나누실 때, 그들을 사랑하셨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끝가지 사랑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변함이 있는 사랑이 아니라, 변함이 없이 끝까지 주님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끝까지 사랑하시고, 세상의 죄를 책임지셨던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은 단순히 사형이 아니라, 세상 죄에 대하여 책임을 지시는 주님의 마음, 그 자체였습니다.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에 대하여 책임감, 영적책임감을 가지고 사랑하셨던 것과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사랑을 하면, 그렇게 생명을 내 놓으면,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뜻대로 하지 못하는 종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그대로 할 수 있는 친구로 불러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주님이 제자들과 사람들을 사랑한 것 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진정 기쁨이 가득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교회가 주님이 사랑하듯이 사랑하면, 교회 안에 기쁨이 차고 넘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주님이 제자들을 사랑한 것 같이 세상의 사람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을 사랑하면, 진정 복된 민족이 될 것입니다.
17. 사랑하는 믿음의 성도 여러분, 주님이 그러하였듯이 서로 사랑합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고 도와주실 것이며, 복된 삶으로 이끌어 가실 것이고, 천국의 삶으로 인도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