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 3:1-14, 22-24, 롬 5:12-21, 마 18:1-14
셋째해 창조절 첫째주일을 맞이하며 새롭게 시작하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생각하며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이 무엇인지 묵상하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 구약(창 3:1-14, 22-24)
주께서 주신 오늘! 하나님께서는 범죄에서 대해서는 징계하시지만 인간 구원을 위해서 구원의 빛을 비추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뱀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가장 간교한 들짐승 중의 하나로 에덴동산에서 사단의 도구로 이용되어 유혹의 상징인 사단과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1). 에덴 동산에서 행복하게 생활하던 아담과 하와에게 사단의 시험이 찾아왔습니다. 뱀은 먼저 여자인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녀를 미혹하였습니다. 뱀의 미혹에 넘어간 하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그 열매를 주어 먹게 하였습니다(2-6).
범죄의 결과 아담과 하와에게 찾아온 것은 수치심으로 아담은 스스로 '벗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는 범죄 이전까지는 벗었지만 벗은 줄 몰랐으나 죄로 인하여 오염된 인간은 바야흐로 수치라는 것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가운데 숨게되었습니다(7). 범죄한 아담에게 찾아온 것은 범죄함으로 자신에게 가져올 결과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 스스로 비참하고 왜소하게 만들어 점차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8-10). 범죄한 아담을 찾아오신 하나님은 먼저 엄히 그의 죄를 책망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모든 책임을 하와와 하나님께 돌린 데 비해 하와는 그것을 뱀에게 돌렸습니다(11-13).
하나님께서는 뱀에 대해서는 흙으로 식물을 삼고 여자와 원수가 되는 저주를 하였습니다. 뱀에 대한 가혹한 저주는 곧 그리스도를 대적할 사단에 대한 저주로서 장차 그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치명상을 입을 것임을 예고한 것입니다(14-15). 그리고 아담과 하와에게 저주하셨습니다. 하와에게는 잉태하는 고통과 자녀를 생산하는 수고를 더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을 사모해야 하고 남편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담에게는 노동의 수고와 죽음에 대한 선고입니다(16-19). 그러나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무거운 징계를 하신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써 범죄한 인간을 향한 당신의 자비를 나타내셨습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기 위해서는 동물의 희생이 필요했으며 이것이 인간의 죄를 속하는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20-21).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즐거움의 동산에서 그들을 쫓아내시고 화엄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시므로 동산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동쪽으로부터 오는 생명 나무를 취하는 길을 두심으로 참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내심을 받아 홀로 버림을 당하는 심판을 통해 말씀으로 뒤집어엎어 생명 나무와 하나 되는 길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라고 하신 것은 말씀이신 자신을 주시겠는 선언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만 생명의 길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길 인줄 믿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 복음서(마 18:1-14)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 가르치시고, 앞의 성전세 사건에서는 예수님이 자신과 제자들을 세금을 낼 필요가 없는 왕의 아들들로 비유하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 계속 오해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 왕이 되시면 자신들이 왕의 아들들처럼 높아질 줄 알고 서로 서열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린 아이 한 명을 제자들 사이에 세우시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린아이 같이 자기를 낮춰야 한다.’, ‘어린 아이를 영접해야 한다.’, ‘작은 자를 실족하지 않게 해야 한다.’, ‘한 마리 양과 같은 작은 자를 잃어버리지 않아야 한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본문에는 어린 아이가 많이 언급됩니다. 그래서 어린이주일 같은 때에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특별히 여기신다.’, ‘어린 아이들에게서 배우자.’는 내용으로 본문이 설교 되곤 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어린 아이들을 소중히 생각하고 어린이의 특성이 믿음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또 어린 아이가 죄가 없고, 깨끗하고, 겸손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누구에게도 존경을 받거나 부러워할만한 힘과 지위를 가지지 않는다는 점을 사용해서 교훈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싸우고 있는 서열과 권력 같은 것과 전혀 무관하고, 그런 것을 얻을 자격도 없는 어린 아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 하나님 나라 백성은 누가 봐도 대단한 것이 없는 어린 애처럼 별 볼일 없는 자신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것,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되는 것은 무슨 권력을 부리고 뽐내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구원 얻는 것, 성도가 되는 것은 세상의 어떤 귀한 것을 얻는 것보다 큰 혜택을 입는 것이지만 그것이 나를 남보다 더 높고, 탁월한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 못 받은 자들을 우습게 여기고, 나보다 신앙이 안 좋아 보이는 사람들과 비교하면서 우쭐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남들보다 높은지 낮은지를 비교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내가 예수 오래 믿은 것, 예수님과 얼마나 더 가까운가, 얼마나 더 잘 믿느냐가 저들보다 나를 높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구원하시고, 복음전도를 위해 특별한 능력과 권한을 주셨지만 그것들은 그 자신들을 우쭐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과분한 은혜에 어쩔 줄 몰라 벌벌 떨면서 주님을 위해서 일하게 만드는 이유가 되었어야 합니다. 제자들은 서로 자기가 높다고 싸울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시는 다양한 은혜와 특권과 칭호와 약속들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은혜들이 내게 걸맞지 않다는 생각, 감당할 수 없다는 부끄러움과 두려움 때문에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 서신서(롬 5:12-21)
예수님께서 경건하지 않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아들의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에게 이러한 엄청난 결과를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특별하다는 것은 알지만 어떻게 한 사람의 죽음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도 아닌데,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도 아닌데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면서 계속해서 영향을 줄 수 있을까요?
그것도 단순히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감동이나 삶의 도전이나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예수님의 그 죽으심이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을 바꿀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인해 어떻게 나의 현재와 미래, 나의 영원이 완전히 바뀌게 되는 걸까요? 2천 년 전에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이스라엘 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벌어진 예수님의 죽으심, 그것이 어떻게 세상의 악을 이기는 사건이 되고 어떻게 모든 인류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 될 수 있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한 사람을 말합니다. 그 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바울은 아담을 통해서 어떻게 한 사람의 죽음이 모든 사람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바울이 4장에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설명하기 위해 아브라함을 이야기 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바울이 아담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지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범법한 것입니다. 그리고 율법이 주어지기 전까지 아담으로부터 모세 때까지의 사람들은 아담과 같이 범법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들도 범죄 했고 그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2:12에서 말씀했습니다.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우리는 그 모습을 창세기에서 노아의 홍수와 소돔과 고모라를 보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게 될 것을 알면서도 불순종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은 순종하면 죽게 될 것을 알면서도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순종하셨기에 예수님의 순종은 우리의 순종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그 의로운 행위가 모든 것을 바꾸었습니다. 그 넘치는 은혜가 우리의 모든 죄를 덮었고 그 생명이 죽음을 이겼습니다. 우리의 시작은 죄였고 우리의 끝은 영원한 죽음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것, 그 시작과 끝, 그 모두를 바꾸셨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시작과 끝없는 생명을 허락하셨습니다.
마무리하며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아담 안에 있는 당신 자신을 보라. 당신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지만, 죄인이라고 선포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 자신을 보라. 당신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지만, 의인이라고 선포되었다.’ 한 사람 때문에, 우리가 영원히 죽게 되었지만, 한 사람 덕분에,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은혜입니다. 우리는 아무 것도 한 일 없이 이 모든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은혜에 안에서 만족하며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구원의 주권은 하나님께 있으나 사람을 통해, 서로를 통해 구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영혼을 잃어버리지 않고, 구원할 수 있도록 주의하고 겸손하게 섬기고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을 원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 받은 자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우리 안의 선하지 않은 양심, 거짓된 믿음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참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의 교훈을 겸손히 배우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택을 통해 오늘도 복된 날이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