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잠3:13-23, 눅6:39-45, 약3:13-18
샬롬!
창조절 열한째주일을 지키며 예배하는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의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추수감사주일을 한 주 앞두고 있는 우리들에게 오늘 본문에서는 “지혜”라는 단어 부각되고 있습니다. 세본문 전체에서 11번의 “지혜”를 사용하고 있는데요. 구약(잠 3:13~23)에서는 7회, 서신서 (약 3:13~18)는 4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복음서 (눅 6:39~45)에서는 지혜라는 단어를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 지혜로운 사람의 행실과 열매를 설명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함께 본문을 살펴보며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 말씀을 통해 깨닫고 은혜 나누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구약(잠 3:13~23)
3장에서는 지혜를 갖는 것이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에 대한 송가가 기록되어 지혜를 얻으려는 노력이 얼마나 중요하고 유익한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혜를 얻은 자는 복되다”는 선언으로 시작하여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다”는 말로 끝나는 이 단락은 지혜가 인간에게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선언하는 부분입니다. 지혜는 은, 진주와 같은 세상의 재산보다 귀할 뿐 아니라 장수와 부귀와 즐거움과 평강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갖고자 하는 것에는 재산이나 건강이나 귀함, 즉 명예와 안전, 평화 등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비결이 바로 지혜라는 것입니다. 돈을 얻으려고, 명예를 얻으려고 애쓰기보다 지혜를 얻으려고 애쓸 때 그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솔로몬은 앞에서 한 말을 증명하려는 듯이 온 땅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세상만물의 근원이 하나님의 지혜이므로, 지혜를 얻을 수 있으면 결국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것이 그 무엇보다 우선하는 이유입니다. 솔로몬의 네 번째 교훈을 시작하면서 다시 “내 아들아”가 등장합니다. 지혜야말로 바로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요소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생명과 안전을 보장하는 지혜의 구체적인 내용들이 이후에 이어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혜를 가지는 자는 무엇보다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서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특히 악인에게, 다른 사람들에게 닥치는 멸망이나 재앙을 보면서 나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는 자들은 그런 두려움에 붙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는 무모한 위험에 들어가지 않고,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바를 따르기 때문에, 그리고 매사에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 서신서 (약 3:13~18)
그리스도인은 언어와 행실에서 세상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사는 기준으로 살지 않고,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의 언어생활에 대해서 언급 하였고, 오늘 본문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 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성경 내용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스스로를 지혜롭게 여기고 총명하게 생각하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지식을 가지고 다른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진리를 설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말씀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실생활에서는 사람들과 다투고 분쟁을 일으키는 자가 되었다는데 있습니다.
야고보는 사랑의 메시지를 가르치면서도 다툼과 분쟁의 주범이 되고 있는 자들의 어리석고 악한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참으로 자신들이 가르치는 말씀을 진리로 여기고 있다면 마땅히 삶에서도 분쟁과 다툼이 아닌, 온유함으로 상대방을 대하는 지혜를 나타낼 것입니다. 여기서 온유함이란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서 있는 심령의 상태를 말합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 있으면, 어떻게 스스로 지혜 있고 총명한 자라고 자랑하며 형제들과 다툼을 일으키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심령을 가지고 “내가 옳고 너는 틀리다.”하고 비난하고 분쟁을 일으키겠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총명을 가진 자일수록 더욱 형제들 앞에서는 온유한 성품을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내 견해와 내 주장이 옳다고 상대방에게 시비를 걸고 다툼을 일으키며 싸우는 것은 결국 스스로 미련한 자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 차례 하나님의 자녀 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다투고 분쟁하는 것을 강하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 시기와 시샘이 있고 다툼과 분쟁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마음에 참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주신 지혜는 성결합니다. 도덕적으로 보나 영적으로 보나 결함이 없습니다. 다투고 분쟁하는 것은 어느 면모로 보나 옳지 않기 때문에 성결한 지혜가 아닙니다. 그 다음 하나님께서 주신 참 지혜의 모습을 보니 ‘화평, 관용, 양순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 합니다. 쉽게 말하면, 상대방에 대하여 존중할 줄 아는 자세입니다. 상대방의 논리가 나와 다르더라도 화를 내지 않는 성품 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마음이며, 다른 이의 어려운 형편을 보고 그에게 실제적으로 도움을 베푸는 것 입니다.
참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합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는 교회 성도들에게 ‘화평케’하는 삶을 살 것을 강조했습니다. ‘화평’이란 무엇입니까? 타인을 존중히 여기고 그를 이해하는 삶, 이것이 바로 ‘화평’의 삶입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의 약점과 단점을 비난하거나 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서로의 약함을 품어주고 감싸주고 이해해주고, 서로 더 잘 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고, 힘내라고 위로해주고… 그렇게 우리가 함께 화평한 모습으로 교회를 세워나가는 모습을 보고 세상은 우리를 향해 “그래 저 사람들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구나!” 하고 반응할 것입니다.
◈ 복음서 (눅 6:39~45)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경험이 그로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와 사랑을 하게하며,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다른 사람을 정죄함 없이 대하며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그는 또한 제자로서 살아가야 하는데, 예수님은 본문에서 분명하게 제자의 삶이 무엇인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먼저는 제자로서의 분별력,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제자로서 혹은 지도자로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없듯이 앞날을 인지하지 못하고 되어 질 일을 알지 못한다면 그는 제자로서 자질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자로서 앞을 볼 수 없고, 우리가 따르는 사람 또한 장님인 지도자인줄 모르고 있다면, 우리는 그를 따라가다가 구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자는 눈을 뜨고 무엇이 옳고 그릇된 것인지에 대한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바른 기준을 갖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제자는 자신이 따를 수 있는 모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우리에게 기준으로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온전히 예수님처럼 살아갈 수는 없지만 되어 질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면에서 제자로서 온전한 삶을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훈련을 통하여 만들어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 행하고, 그의 행동의 의미를 이해하고 예수님의 삶을 모델로 훈련하다 보면 언젠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있는 자신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제자로서 소경이 아닌 눈 뜬 자로서 옳고 그름이 무엇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잣대로 분별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듯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보이지 않는 티끌 같은 잘못을 보고 무엇이라 하기 전에, 내 눈에 있는 들보와 같은 부족함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데에 시간을 들일 것이 아니라, 완전하지 않은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바라보는데 시간을 사용해야 합니다. 자신의 들보를 보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대한 깨달음이 필요하고 성령 하나님의 조명하심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제자로서 나의 완전을 가로 막고 있는 교만과 자만의 들보를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계속해서 나무와 열매의 관계를 통해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안과 밖,” 마음과 행동, 말과 행동이 같아야 함을 말씀하셨습니다. 반대로 위선자의 의미는 안과 밖이 다른 자입니다. 제자로서 리더의 위치에 있는자는 더욱 더 자신의 마음과 말과 행동이 일치되게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선한 자나 악한 자는 그 쌓은 것에서 선이건 악이건 낸다고 말씀하셨듯이, 마음 안에 무엇으로 쌓을 것인지를 신중히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쌓을 것은 앞서서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경험하고, 그 사랑과 용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가에 관한 것입니다. 자신의 죄의 깊이를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용서의 깊이를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에 감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해서 용납하고 용서하는 깊이 또한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제자로서 사랑과 은혜와 용서와 관용 등을 마음에 심으면 그 열매도 아름답게 맺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제자로서 살아가는 다짐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인정하고 그 진리의 삶 안에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하고, 그 교제 안에서 타인에 대한 사랑과 이해와 배려, 용납함을 배운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가 굳건한 반석이 되심은 그 진리의 삶이 흔들리지 않고, 마지막 심판에 그 진리의 초석이 우리를 굳건하게 심판을 견디게 해 주고 영생의 기쁨을 누리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주를 사랑하는 자는 주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주님의 삶을 따르는 자입니다.
마무리하면서
실제로 한국 교회 안에서 성도가 다른 성도들을 고소해서 법정에 서게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런 다툼과 분쟁 속에서 교회는 얼마나 큰 상처를 받고 있습니까? 또한 그런 교회를 보며 세상은 얼마나 하나님을 욕하고 무시하고 있습니까? 교회가 분열하고 싸우는 모습들을 보며, 교회에 등을 돌린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속해 있는 가정의 모습은 어떤 모습입니까?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은 또 어떤 모습입니까? 화평한 공동체 입니까? 아니면 다툼과 분쟁이 있는 곳입니까? 우리가 더욱 화평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 우리가 오늘 해야 할 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먼저 위로부터 온 지혜로 화평하게 되기 위해 지혜로운 삶을 살기를 결단해야합니다. 지혜로은 삶은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해주는 것입니다. 서로 계속해서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진실한 하늘의 화평이 머무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가정, 주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