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민 20:1~12, 약 3:1~12, 마 18:1~9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은 모세와 아론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 결정적 이유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세가 출애굽의 역사를 인도했다는 사실을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모세와 동행하셨고, 놀라운 능력으로 모세를 도우셨기에 큰 어려움 없이 출애굽의 사명을 수행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실상 출애굽이라는 문제는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그 이유는 430년 노예 생활에 적응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설득하고, 추동하여 출애굽이라는 진취적인 행동으로 이끄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430년이라는 시간은 사람들을 매우 소극적이고, 부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 시간입니다. 초기에는 다시 예전의 자유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망을 품을 수 있지만, 430년의 시간은 그런 가능성마저 무너뜨릴 수 있는 긴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소위 노예근성이 알게 모르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배하여 사람들을 매우 소극적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 현실에 완전히 적응된 이들을 설득해서 출애굽의 여정으로 나오게 한다는 것 결코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속성은 출애굽의 여정 중에 겪었던 작은 시련과 고난에도 하나님과 모세를 향한 원망과 불평으로 드러났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또 하나 출애굽의 큰 장애물은 스스로 신의 아들이라 자부하며, 강력한 군대를 바탕으로 이집트를 통치 했던 바로의 존재입니다. 강력한 전제군주였던 바로를 설득하거나 굴복 시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열가지 재앙을 이집트에 내리셨던 이유가 버로 여기에 있습니다. 열가지 재앙을 통해 이 세상의 진정한 주관자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사실 바로가 열 가지 재앙을 통해 반강제로 하나님께 굴복 하기는 했지만, 그마저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번복하고는 정예 병거와 기마를 앞세워 추격대를 파송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바로의 존재는 출애굽의 가장 큰 걸림돌 중 하나였습니다. 이런 측면을 종합해 볼 때 다양한 문제와 현실을 극복하고 출애굽의 역사를 현실로 만들어낸 모세는 실로 위대한 지도자라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세의 출애굽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현대의 인식은 거꾸로 모세가 그만큼 그 역할을 잘했기 때문이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모든 면에서 그 역할을 부족함 없이 잘 수행하니 주변에서 보기에는 쉽게 보였던 것이죠. 그런데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말씀은 모세가 출애굽의 궁극적 종결점이라 할 수 있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증거합니다.
가만히 오늘의 상황을 들여다봅시다.
오늘 구약의 상황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들의 원망과 불평은 광야에서 물이 떨어져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들의 직면한 현실을 아뢰었다 성경은 증거합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주신 해결책이 ‘반석에 명령하여 물을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모세가 명령하면 단단한 바위에서 물이 나와 모든 백성들의 갈증을 해소될 것이라는 겁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반석 앞으로 모이라 하고하나님의 명령대로 실행하였고, 반석은 이스라엘 백성과 모든 짐승들이 갈증을 해결할 만한 물을 내어주었음을 성경은 증거합니다. 문제는 그 직후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진노하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선언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오늘 말씀 8절에 주목합니다. 갈증으로 죽게 되었다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아뢰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지팡이를 가지고 백성들을 불러 모아 반석에서 물을 내라’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 명령을 받은 모세가 이 명령을 수행하면서 불필요한 말과 행동을 덧붙였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종으로, 대행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가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들에 즉각적으로 응답하시고, 때로는 능력과 기적으로 그의 말과 행동을 뒷받침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모세가 행하는 다양한 기적들을 직접 목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증거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행한 기적과 능력이 모세를 향한 신뢰, 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발전했음을 성경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모세는 평소와 같이 작은 시련에 불평하고 원망하며, 심지어 차라리 이집트에서 죽는게 낫다고 말하는 백성들을 향해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소리쳤음을 증거합니다. 이 지점이 중요합니다. 물론 하나님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바로 바로 징계 하시지 않고 그들의 불평과 원망의 원인을 해소하여 그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만들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반역한 너희여 들으라’는 모세의 외침은 철저히 모세 개인적인 생각과 감정에서 나온 소리였던 것입니다. 물론 상황적으로 따져보면 모세의 이런 표현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먹이셨던 하나님의 은혜는 완전히 잊어 버리고, 지금 물이 없어 힘들고 어려운 상황만을 놓고, 하나님과 모세에게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그들은 과거 이집트에서 지냈던 노예생활이 더 좋았다고 말하고 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소위 배은망덕한 언행을 일삼았던 것입니다. 이를 목격한 모세는 ‘반역의 무리’라는 표현을 통해 그들의 패역함을 지적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모세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반문하며, 자신의 지팡이를 들어 반석을 두 번 쳐서 물이 솟게 했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을 조롱하듯, 마치 물을 솟게 한 것이 모세의 능력인 듯 과시하며 행동했던 것이죠. 이에 하나님은 진노하시며, 모세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평가하고는 ‘모세와 아론은 장차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선언하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볼 때 오늘 하나님의 처분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금껏 모세가 보여준 헌신과 충성을 생각해 보면 한 번쯤은 용서해 주실 만도 한데, 하나님은 단호히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단정적으로 선언하시고, 실제로 들어가지 못했음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하나님은 왜 모세에게 이처럼 엄격하셨을까?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마태복음 18장 말씀에는 제자들의 지위 다툼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 나아온 제자들은 천국에서 누가 크냐 물었음을 성경은 보여줍니다. 기억할 것은 오늘의 상황이 있기 전 예수님은 장차 자신이 겪게 된 고난에 대해 제자들에게 가르치셨다는 점입니다. 장차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가야 하고, 죽음과 부활의 길을 걸어야 할 것이다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그 말씀의 참된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보다는 현실적인 자신들의 문제에 집중하고 있음을 성경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들어가게 될 천국에서 자신들이 차지할 자리, 자신들이 얻게 될 보상에 대한 욕심만을 드러낸 것이죠. 중요한 것은 오늘 예수께 질문하는 그들이 평범한 백성들이 아니라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과 동거동락하며,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기로 결단한 제자들이라는 점입니다. 소위 제자라고 하는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만들어 갈 미래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과 사명감 대신 예수님을 통해 장차 누리게 될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기대를 품고, 예수를 통해 얻게 될 권력, 출세에 대한 욕망만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복음서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어린아이를 통해 제자들의 잘못된 생각과 욕망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지금 품고 있는 제자들의 욕심이 부질없는 것이요, 진정한 권세는 누군가를 지배하고, 억압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복음의 본질은 겸손과 섬김으로 세상을 다스리고 통치하는 것이요, 사랑으로 모두를 포용하는 것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섬김의 본질을 다른 이들에게 굴복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제자들에게, 진정한 섬김은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이요, 사랑이고, 그렇게 섬기는 자라야 하나님이 기뻐하며, 세상으로부터 존경받고, 추앙받는 존재가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뒤이어 등장하는 이야기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에 집중하지 않고, 욕심에 눈이 멀게 된 이들이 마주할 마지막 심판과 징계에 대한 경고입니다. 작은 자의 아픔과 상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사랑하라는 복음의 가르침에 충실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홀대하며, 차별하고, 실족하게 하는 이들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무서운 심판으로 되갚을 것임을 예수님은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의 본질, 제자들의 본질은 질책과 정죄가 아니라 겸손한 섬김과 사랑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서신서를 통해 더욱 강력한 경고와 권면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목격합니다. 오늘 야고보서는 하나님의 대행자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받은 우리들의 책임감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보다 먼저 부름받고, 구원받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경험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세상 앞에 더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야 하고, 말과 행실에서 더욱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를 오늘 야고보서 기자는 비유를 통해 혀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생각 없이 움직이는 세치 혀로 인하여 때로는 불과 같은 큰 피해가 발생하기도 하고, 때로는 생명을 죽이는 독과 악이 되기도 함을 경고합니다. 우리 신체에서 가장 작은 부분을 차지하는 혀의 움직임에 따라 때로는 큰 문제를 야기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선생 된 자, 부름 받은 우리는 매사에 주의하고, 겸손한 모습으로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때로는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음을 강조하며, 모든 면에서 조심하라 권면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교회의 지도자로 선택받은 우리에게 그 혀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찬송하는 자가 될 수도, 저주하는 자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며, 하나님의 형상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에 따라 날마다 찬송하며,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피조물로서 우리는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 들었던 의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모세는 왜 한 번의 실수로 인하여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을까? 복음서와 야고보서의 가르침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거룩한 하나님의 대행자로 부름받은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들의 모델이 되고, 다른 이들의 모범이 되어야 할 존재가 자신의 감정에 따라 행동하고,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여 자신의 능력인 양 포장하는 행위는 용납할 수 없는 잘못이었던 것이죠. 더더군다나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처음으로 하나님을 드러내고, 증거한 지도자였기에 하나님은 보다 엄격한 기준으로 그를 질책하셨던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세 본문의 말씀은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부름받은 우리들, 믿음의 백성들을 향한 경고와 권면이기도 합니다. 출애굽의 위대한 역사를 주도했던 모세의 실수가 그의 인생에 얼마나 큰 상처와 오점을 남겼는지를 보여주며 성경은 우리에게, 끝까지 부름받은 자로서의 초심을 잃지 말라 권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서는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품고 제자가 되겠다 결단한 제자들의 잘못된 욕망에 대해 지적하며, 부름 받은 우리의 본질은 사랑과 섬김이 되어야 함을 비유를 통해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의 작은 자들에게 관심을 두고, 그들의 상처와 아픔에 손 내미는 것이 예수를 따른다고 믿고 고백하는 우리들의 본분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서신서는 교회의 지도자로 택함받은 우리는 다른 이들보다 더 겸손하고, 배려하고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하며,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어야 함을 지적하고 권면했던 것입니다.
오늘이 절기상으로는 추수감사주일입니다. 감사하라는 감사주일에 불평하고 원망할 것이 훨씬 더 많은 것도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안의 감사를 찾아 봅니다.
오늘 수학능력 시험을 끝낸 수험생들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예배에 참석할 수 있게 됨에 감사합니다.
이제 곧 12월을 맞이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절을 맞이하게 됨도 감사합니다.
추수감사절이라는 절기가 있어 반강제로라도 감사하게 하심도 감사요, 감사의 시간을 갖게 하심도 감사합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각 가정이 정성스레 준비한 추수 감사 물품을 제단에 드릴 수 있으니 이 또한 감사입니다.
추수감사절을 맞아 정성으로 예물을 준비하여 드리게 하시니 이 또한 감사입니다.
추수감사절을 통해 불평과 원망 대신 감사의 마음을 품게 하시니 이것이 무엇보다 큰 감사입니다.
한 해를 감사함으로 정리하고, 마무리 할 수 있는 추수감사절이 있으니 이것이야 말로 진짜 감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불행은 가난도 아니요, 실패도 아니요, 감사를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감사의 제목이 주변에 넘쳐나는데 그것을 보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에 쌓여 사는 것이야 말로 진짜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세 본문 말씀은 부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지녀야 할 올바른 태도를 가르쳐 줍니다. 부름 받은 우리는 모든 말과 행동을 살펴 하나님의 영광을 드높여야 하는 존재요, 겸손히 이웃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존재며, 우리 말과 행동의 무게를 알고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거룩한 대행자로서의 본분대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불평하고 원망하는 이 때 우리는, 감사의 제목을 찾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거룩한 대행자로 택함받은 우리들의 본분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함께 예배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감사함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높이는 거룩한 주의 대행자로 살아가시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