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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절(11-2) - " 아름다운 구원 " / 이훈삼 목사 > 창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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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창조절(11-2) - " 아름다운 구원 " / 이훈삼 목사

관리자 2022-11-11 (금) 08:30 1년전 448  

본문) 고전 3:10~15, 왕상 8:12~30, 마 12:1~8


1. 건축에서 중요한 것


가끔 마음이 지칠 때면 2015년 아내와 함께 열흘 간 머물렀던 피렌체를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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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미니아토 알 몬테


도시 자체가 문화유산인 피렌체는 정말 명소가 많지만 그 중에서도 내 맘 속에 가장 깊이 가라앉아 있는 곳은 미켈란젤로 언덕 뒤에 숨어 있는 ‘산 미니아토 알 몬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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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이 성당 안으로 들어갔을 때 덮쳐오는 서늘함과 어두움은 찬란한 고딕양식 건물과는 사뭇 달랐다.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지는 아치, 나무로 만든 평면 천장 그리고 벽에 남은 흐릿한 대형 프레스코화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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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더 깊은 생각으로 이끄는 것은 성당 앞마당에 펼쳐진 공동묘지였다. 어린아이로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죽음의 거처 앞에서는 인생과 세월의 무상한 구름이 슬그머니 피어오른다. 이렇게 고요함과 서글픔이 교차하는 자리에서 바라본 노을 지는 피렌체는 아름다움 자체였다. 그냥 멍하니 앉아 몇 시간 동안 역사와 삶과 죽음을 매만졌던 느낌을 가끔씩 다시 꺼내는 것만으로도 피렌체 여행은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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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린아이의 무덤 앞을 지나고 있었고 죽음의 공간을 수평으로 가로지른 선 너머에는 도시의 일상이 숨 쉬고 있었다. 모든 길은 이곳으로 통한다는 두오모 성당과 시 청사인 베키오 궁이 당당하게 서 있는 피렌체 중심을 아르논 강이 유유히 흐르고 그 중간에 베키오 다리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우피치 미술관이 놓여 있다. 14~16세기, 새로운 세계를 탐구했던 단테‧미켈란젤로‧갈릴레오‧마키아벨리·사보나롤라 등 인류의 개척자들이 저 길에서 걷고 뛰고 소리쳤을 것이다.


피렌체는 세계적인 관광도시로서 건축이나 수리에 대해서까지 시 당국이 엄격하게 규제하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오래된 건물들이 잘 보전되어 있다. 르네상스 이전에 세워진 건물들이 아직도 건재하니 보통 500년 이상 된 것들이다. 우리도 조선시대나 그 이전의 건물들이 남아있긴 하지만 숫자가 그리 많지는 않아서 아쉽다. 건물의 수명에 직접 연관 있는 것은 역시 재료다. 서양은 예로부터 돌로 지은 건물이 많았다. 지을 때는 엄청난 노동력과 위험이 따르지만 한번 지어놓으면 쉽게 소실되지 않는다. 돌로 지은 건물은 하중을 견뎌야하니 벽이 넓고 창문이 좁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유럽 건물의 창문은 우리와 달리 대개 세로로 길쭉하다. 장구한 세월을 견뎌온 건물 앞에 서면 각각 건물이 지니고 있을 저마다의 역사에 한편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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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동북아 국가들은 건축 재료로서 돌보다는 나무를 선호했다. 나무‧흙‧짚들은 농경사회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도 산이 많고 산에는 돌이 많지만 돌 중에서도 우리나라에 흔한 화강암은 재질이 강해서 가공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반면 나무는 구하기도 가공하기도 쉬워서 건축 재료로서 널리 사용되었다. 단 목재는 화재‧습기‧곤충에 약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나름대로 나무에 기름도 칠하고 바닥과 마루 사이에 공간을 두어 습기를 막아보기도 했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우리는 어느 곳에나 전통이 살아있는 건물보다는 근대 콘크리트 건물 숲에서 힘들게 호흡하고 있다.


나이를 먹을수록 부모님이 그리워진다. 내가 그 나이가 되어가면서 그런 것 같다. 도시도 국가도 연륜을 더할수록 선대의 역사를 그리워할 것이다.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는 것들은 무엇이든지 그 존재 자체로 모두 소중하다.


2. 고린도교회의 중직자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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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교회는 바울이 AD 50년대에 개척한 교회다. 기독교 체계가 아직 세워지지 않은 시대에 유대교나 기독교 전통이 없는 그리스-로마 문화권의 도시에 전혀 낯선 기독교회가 세워진 것 자체가 기적이다. 바울이 그곳에서 머물면서 오랫동안 목회했다면 훨씬 안정된 교회를 만들었겠지만 바울은 한 곳에 머물 수 없었고 계속해서 선교를 다녀야했기에 바울이 없는 고린도교회는 여러 가지 혼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바울과 고린도교회 교인들


그 중에서도 오늘 본문은 고린도교회 안에서 발생한 문제에 대해 바울이 편지를 써서 처방을 내리고 권면하는 것이다. 이 글을 받는 고린도교인들은 어느 정도 신앙이 있는 중직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사이에 서로 의견이 안 맞아서 분열을 겪고 있었다. 바울로서는 참으로 안타깝고 속상한 일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교회가 외부로부터 박해를 받는다면 고통스럽긴 해도 덜 아프다. 목회자에게 가장 힘든 것은 교인들이 서로 반목하고 분쟁할 때다. 외부의 핍박은 서로 하나 되어 이겨나갈 수 있지만 교회 내부의 갈등은 그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상처가 크다.


바울은 우리의 신앙을 건축에 비유한다.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세운 것도 건축과 같고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이 신앙생활 하는 것도 집을 짓는 것과 같다. 건축가는 잘 지어야 한다. 잘못 지으면 무너지기 쉽고 그것은 곧 개인과 공동체의 파탄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선 건물의 터전을 강조한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울까를 조심할지니라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10~11) 


개인·가정·일터·교회·국가 모든 건물이 세워질 자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다. 주님은 영원하고 안전하며 사랑으로 우리를 보호하는 분이기에 주님 위에 세워지는 건물은 어떤 고난이 와도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건물을 지탱할 터전이 흔들리면 무너지고 만다. 우리의 터전은 예수 그리스도다. 우리가 다음세대에게 교육하는 첫 번째도 우리 자녀들이 다른 것 위에가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 위에 인생을 세우도록 돕는 역할이다. 오늘 바울이 편지하는 고린도교인들은 모두 예수 믿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분열하고 있다. 그래서 이 분열을 극복할 가장 근본적인 권고로서 우리의 터전은 예수 그리스도임을 다시 확인한다. 우리는 부분적으로 다를 수 있어도 기초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다. 삶의 터전을 공유한 공동체다.


두 번째로 바울이 편지에서 사용한 방법은 강력한 경고다. 고린도교회의 중직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 심판을 받을 때 어떤 평가를 받을지 심사숙고하라는 말이다. 바울은 문학적으로 이렇게 표현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 사람의 공적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적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적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12~13)


나중에 하나님이 우리가 지은 인생과 역사의 건축물을 불로 시험할 것이다. 그러면 불에 잘 타서 무너지는 것과 오래 견디는 것으로 나뉠 것이다. 어디에 건물을 지을 것이냐 하는 터전이 가장 중요한데 고린도교인들은 모두 신앙인이니 그리스도 위에 세우는 것은 같다. 그다음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건물을 지을 것이냐에 따라 결과가 판가름 난다. 나무·풀·짚으로 지은 집과 금·은·보석으로 지은 집의 차이는 단지 보기 좋고 나쁘고 뿐이겠는가? 특별히 불의 심판 앞에서 나무·풀·짚으로 지은 집은 삽시간에 타버릴 것이고 금·은·보석으로 지은 집은 견딜 것이다. 바울이 요즘 편지를 썼다면 금·은·보석보다는 콘크리트와 철강으로 비유했을 텐데 당시는 이런 재료가 없었기에 이렇게 비교했다. 건물의 수명은 튼튼한 터전과 재료다. 서양 전통 건물이 오래 보전되는 것도 돌로 지은 것이 많기 때문이고 우리 전통 건물이 취약한 것도 나무·흙·짚으로 지은 건물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 건물 재료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의 터전 위에 있으면 구원은 받는다. 그런데 구원에도 등급이 있다고 표현한다. 학교에서 성적을 산정할 때도 합격과 불합격으로만 나누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ABCD/F로 구분한다. F(Fail)는 불합격이라 다시 강의를 들어야 하고 D학점부터는 합격이긴 하지만 A와 D는 엄연히 다르다. A는 자랑스럽고 D는 부끄러운 합격이다. 바울은 14~15절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적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그 공적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그러나 자신은 구원을 받되 불 가운데서 받은 것 같으리라 


15절 하반절의 개역개정 번역이 명쾌하지 않다. 새 번역은 이렇다.


<표준새번역>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지만, 마치 불 속을 거쳐서 살아나오듯 할 것입니다.


<공동번역> 그 자신은 불 속에서 살아 나오는 사람같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은 문학적 표현으로 지금 우리말로 하면 ‘간신히 구원받는다’는 뜻이다. 합격은 하지만 D학점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터전 위에 세웠으니 구원은 받지만 재료를 잘못 썼기에 나중에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부끄러운 구원을 받는다. 우리 대통령이 애용하는 용어로 말하면 쪽팔리는 구원을 받는다. 그러니 시험에 약한 재질로 건축하지 말고 보석 같은 강한 재질로 건물을 지어야 아름다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중직자들에게 권면하고 있다.


3. 아름다운 구원을 위하여


이스라엘 역사 상 가장 아름답고 호화로운 성전이었다고 하는 솔로몬 성전을 건축하고 솔로몬왕은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드린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그러나 내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며 이 종이 오늘 주 앞에서 부르짖음과 비는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열왕기상 8: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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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이 아무리 튼튼하고 아름답다 해도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이 그 안에 머무르시겠는가. 인간이 만든 모든 것은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모시거나 표현하기에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나 우리는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 우리의 경배를 표현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사랑이 형식에 기울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솔로몬은 그 크고 아름다운 성전을 봉헌하면서 기도드리기를 이 성전이 주님 모시기에 합당치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성전 자체가 아니라 이 성전에 와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은총을 기대하면서 드리는 절실한 믿음의 기도를 들어달라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이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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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도 유명한 안식일 논쟁을 벌였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밭을 지나다가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잘라 먹었더니 바리새인들이 이것을 보고 왜 안식일에 일하지 말랐는데 일하느냐고 비난하였다. 주님은 안식일의 본질이 무엇이냐,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이 율법과 형식에 치우치면 그 본질을 상실한다고 따끔하게 충고하셨다.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점은 인간은 인간의 마음이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나 하나님은 우리 마음 중심을 꿰뚫고 계신다는 것이다. 인간의 법체계는 결과주의다.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을 해칠 의도가 없었더라도 누군가가 나 때문에 해를 입으면 고의가 아니어도 죄가 된다. 인간이 사악한 계획을 세우고 천인공노할 범죄를 실천했어도 성공하지 못했으면 죄를 입증할 수가 없다. 인간은 마음을 정확하게 확인할 수가 없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마음속은 모른다. 그러니 인간 사회는 밖으로 드러나는 모양·행위·결과를 중요시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보니 우리의 삶과 역사가 형식주의로 흐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오래된 신앙인일수록 평생 싸움은 내 신앙이 형식화되어 감동이 사라지는 것이다. 신앙은 습관화가 중요하다. 주일 아침이면 고민할 것 없이 교회 갈 준비를 몸에 익히고 습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동시에 교회 가는 것이 그냥 하나의 습관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신앙은 어떻게 형식주의에 떨어지지 않고 처음 사랑 처음 은혜 받았을 때의 생동감을 잃지 않고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이 핵심이다. 율법주의 신앙이 차라리 편하다. 율법만 지키면 되는 거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매월 용돈 부쳐드리고 한주에 한번 안부 전화하는 것으로 된다면 그게 쉬운 것이다. 진심으로 마음으로부터 공경하고 아쉬워하고 사랑하는 자세를 갖는 것은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이다.


율법적·기계적 신앙을 극복하고 진심어린 하나님 사랑을 회복하라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인데 이를 위해서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성찰하고 새롭게 마음을 다져야 한다. 이것이 쉽지 않다. 이를 위해 성경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로 하나님과 소통하며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성령 충만한 삶을 살려고 할 때만 가능하다. 이것이 나무·풀·짚이 아니라 타지 않는 보화로 건축하는 것이다. 율법적·형식적 신앙도 유지하면 구원받겠지만 좀 부끄러운 구원이 될 것이고 내 마음을 성찰하고 진심으로 주님의 자녀로서 살아가려고 분투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구원을 허락하신다. 인생과 가정과 직장과 사회의 건물을 잘 지어서 구원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신앙인들이 되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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