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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창조절(10-1) - " 놀랍고 기이한 사랑의 노래 " / 김진수 목사

관리자 2022-11-04 (금) 10:42 1년전 371  

본문) 삼하 1:17-27, 계 14:13-15:4, 요 15:12-17


풍성한 가을입니다. 온 땅이 채색 옷을 갈아입은 불타는 단풍과, 풍성했던 한 계절을 마감하고 겸허하게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낙엽이 길가에 쌓이는 계절입니다. 한 시인은 가을 낙엽을 바라보면서 ‘가을의 낭만’을 넘어 ‘가을의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떨어질 때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낙엽이 왜 낮은 데로 떨어지는지를 아는 사람을 사랑하라/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떨어질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 시월의 붉은 달이 지고/ 창밖에 따스한 불빛이 그리운 날/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한 잎 낙엽으로 썩어 다시 봄을 기다리는 사람을 사랑하라”(정호승의 ‘이제는 누구를 사랑하더라도’)


가을에 듣는 불같은 사랑의 노래들


오늘 세 본문에 담겨진 모든 말씀은 “불같은 사랑의 노래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먼저 활의 노래로 알려진 삼하 1:17-27>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사망한 사울과 요나단을 추모하며 다윗이 부른 “사랑의 노래”인데 사울 왕 부자에 대한 다윗의 사랑과, 다윗을 온 맘 다해 사랑했던 요나단의 뜨거운 사랑을 애도하는 노래입니다. 두 번째 노래인 <계시록 14:13-15:4의 말씀>에는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님을 사랑하여 목숨 걸고 모든 고난을 이기고 승리한 알곡성도들의 모습이 나옵니다.(계14:14-16) 이들이 얼마나 주님을 사랑했는지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었습니다.(계14:1) 이들은 불 섞인 유리바다 가에 서서 “두 개의 사랑 노래”를 부릅니다. 하나는 구약시대에 살았던 이들이 모세가 미리암과 함께 불렀던 ‘홍해 도강의 노래’이고, 또 하나는 신약시대에 살았던 이들이 부르는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어린양의 노래’입니다(계15:1-3). 신구약의 모든 구원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승리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노래인 <요한 복음서 요15:12-17의 말씀>은 사도요한이 부르는 “형제 사랑의 노래”입니다. 이 사랑의 노래는 높은 고음을 구사하는 ‘사랑의 아리아’ 같은 노래입니다.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의 수준이 높습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는 사랑, 친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랑, 예수님의 친구가 되는 사랑입니다. 이 세 본문을 연결하면 세상에서 가장 “놀랍고 기이한 사랑”이라는 제목의 시(詩) 한 편이 됩니다.


기이한 사랑의 노래(삼하1:17-27)


오늘 사랑의 노래 1절은 다윗이 부른 사울과 요나단을 향한 기이한 사랑의 노래입니다. 우리는 구약본문에서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이 이성간의 사랑도, 부모자식간의 사랑도, 친구간의 사랑도 뛰어넘는 매우 기이한(탁월한, 상상을 뛰어넘는, 이해 불가한) 사랑(26절)이라는 고백을 듣습니다.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은 다윗을 죽도록 미워합니다. 요나단의 누이 미갈은 다윗을 좋아해서 결혼한 아내지만 다윗의 지나친 하나님사랑 때문에 갈등하는 관계에 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과 왕위계승을 놓고 심각한 대립과 충돌을 피할 수 없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다윗과 요나단은 서로 사랑할 수 없는 모든 여건을 뛰어넘는 사랑을 했고, 여인을 향한 사랑, 혈육 간의 사랑, 어떤 친구의 우애, 그 어떤 사랑보다 더 크고 놀라운 사랑을 했다는 것입니다.(삼상18:1, 19:1, 20:17, 삼하1:26) 요나단은 다윗을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으로 인정했고, 아버지의 살해위험으로부터 그를 보호했으며, 아버지와 함께 전사함으로 다윗시대의 길을 터주는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요나단만이 아닙니다. 다윗 또한 평생 자신을 죽이려 하는 요나단의 아버지 사울을 사랑했습니다. 기이한 사랑입니다.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사울부자의 죽음 앞에서 다윗은 그 부자를 위한 애가를 만들어 전 국민이 추모하도록 하고, 그들의 업적을 칭송하게 했습니다. 사울 왕을 비난하거나 무시하는 언사는 일절 금했습니다. 또한 사울과 요나단의 남은 후손들을 찾아 자신의 왕자들처럼 대했습니다. 이 놀라운 사랑이 사울 추종자들과 다윗추종자들로 갈라진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습니다. 통일왕국시대의 문을 연 것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위기를 극복합니다. 오직 사랑만이 국가적인 재난을 넘어섭니다. 오직 사랑만이 슬픔당한 이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합니다.


지난 한 주간 우리는 또 참혹한 아픔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아름답게 빛을 발해야 할 청소년, 청년들이 한 순간의 재난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참사소식을 듣는 순간 은밀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발 이번에는 교회로부터 ‘죄 때문에 죽었다’는 말 나오지 않게 해 주세요!” 죄 때문이라면 우리 모두가 다 죽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 산화(散花)한 금쪽같은 젊음들이 바로 내 자식이었어야 합니다. 대통령의 자식이 죽은 것이고, 정치인의 자식, 바로 우리 사랑하는 아들, 딸이 죽은 것입니다. 주최자가 없기 때문에 직접적인 치안책임이 없다는 것은 당신 자식이 죽지 않아서 나오는 말입니다. 우리는 고난당한 이들을 오직 사랑으로 끌어안고 위로해야 합니다. 그리고 정직하게 아프더라도 책임소재를 가려내야 합니다. 그래야 앞으로 더 많은 위기를 방지할 수 있습니다.


유혹과 고난을 이기는 사랑의 노래(계14:13-15:4)


사랑의 노래 2절은 거룩한 사랑의 노래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것이 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은혜와 긍휼로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주의 백성들은 유혹을 이기고 고난을 이기는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사랑하십니다. 서신서 본문 계시록14:13-15:4 말씀은 하나님이 마지막 날에 행하시는 ‘사랑의 추수’와 ‘불같은 심판의 추수’를 말씀합니다. 마지막 때에는 두 가지 추수가 있는데 하나는 잘 익은 곡식을 추수하는 “알곡추수”이고(계14:15-16) 다른 하나는 포도를 추수하는 “포도추수”입니다.(계14:17-20)


알곡을 추수하는 분은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신,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잘 익은 곡식은 누구입니까? 예배당에 나오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계 13장에 보면 자신에게 절하지 않는 자를 죽이기까지 하는 짐승에게 굴복하지 않고 그 오른 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지 않은 사람들입니다(계13:15-17). 어떤 고난에도, 유혹에도 하나님 외에는 누구도 무엇도 숭배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으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고 그의 말씀의 원칙을 따라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 땅에서 고난과 핍박을 받아, 눈물과 고통가운데 있지만 마지막 추수의 때에 잘 익은 곡식이 되어 하늘창고에 들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포도송이를 추수하는 이는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아닙니다. ‘다른 천사’입니다. 이 천사가 불을 다스리는 천사의 말을 듣고 낫을 휘둘러 포도송이를 거두어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집니다. 그리고 성 밖에서 그 틀 속에 있는 포도송이를 사정없이 짓밟습니다. 그러자 피가 사방에 퍼집니다. 포도송이에 해당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포악하고 무서운 짐승의 힘에 굴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상을 따라 마귀의 유혹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세상을 즐기며 희희낙락하며 삽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에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과 저주의 포도즙 틀에 밟혀 통곡하게 하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뜻을 행하며 어떤 고난도 이기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자들은 승리의 노래를 부릅니다.(계14:14-16) 그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는(계14:1) 이들은 불 섞인 유리바다를 건넌 후 그 바다 가에 서서 모세가 미리암과 함께 불렀던 ‘홍해 도강의 노래’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어린양의 노래’를 부릅니다(계15:1-3). 승리와 영광의 노래를 부를 것입니다.


형제 사랑의 노래(요15:12-17)


사랑의 노래 마지막 3절은 ‘형제사랑’을 노래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2절)”고 하시면서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13절)”고 하십니다. 요15장에서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 대상은 주님이 사랑한 제자들(요15:9-10), ‘함께 주님을 따르는 형제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형제사랑(φιλαδελφία)에 대한 명령을 자주 듣습니다. 우리는 박애적인 사랑과 형제사랑을 잘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다릅니다. 박애적인 사랑은 그 대상을 구별하거나 제한하지 않는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모든 인류를 향한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이 사랑을 가장 고귀한 사랑으로 추앙합니다. 그러나 형제사랑은 제한적이며 조금은 배타적인 성향을 가집니다. 사랑의 대상이 누구나가 아니라 특별히 구별된 사람, 즉 내 곁에 나와 함께 있는 형제로 제한됩니다. 성경은 이웃사랑도 말씀하시지만 그 대상이 제한된 형제사랑을 매우 자주 요구하셨고(살전4:9, 히13:1, 벧전1:22, 3:8, 요일2:9-10, 3:10,14,16,17, 4:20,21) 오히려 먼저 형제사랑을 실천하고 그 위에 사랑을 더하라고 하십니다(벧후1:7). 왜냐하면 주님을 따르며 그 말씀에 순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온 인류를 사랑하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귀신을 내쫓으신 예수를 비난하여 바알새불을 힘입어 내쫓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 주님은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해질 것이요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마12:25)”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먼저 교회 안에 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사랑하지 못하면 서로 분쟁하게 되고 세상의 웃음꺼리가 될 것입니다.


형제사랑은 친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12절) 누가 친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사람(교회)이 우리가 사랑할 친구입니다. 성격이 안 맞고 의견이 안 맞아도 주님이 그를 사랑하여 구원하셨으니 우리도 그를 사랑해야 합니다. 형제사랑은 제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하는 것입니다.(13절)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요나단이 다윗을 사랑한 것처럼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조건이 셀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뜨겁게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장 친밀한 친구가 되기 위해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14-15절) 형제를 사랑하라는 명령을 지키면 비로소 주님은 우리를 그의 친구, 곧 아버지께 들은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친밀한 친구가 되어 주십니다. 형제사랑으로 많은 이웃사랑의 열매를 맺도록 사랑해야 합니다.(16절) 교회 안에 성도들의 사랑이 풍성할 때 비로소 교회의 담을 넘어 이 세상의 빛이 되고 소망이 되고 선교의 결실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올 가을 풍성한 결실의 계절에 먼저 형제사랑의 풍성한 열매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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