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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창조절(4-1) - " 천국의 열쇠 " / 김거성 목사

관리자 2022-09-23 (금) 00:13 1년전 433  

본문) 신 30:1-5; 골 1:3-14; 눅 12:22-34

 


1. 실마리


 


1980년 8월, 광주항쟁이 무자비한 살상으로 이어졌던 직후였습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몇몇이 2학기 개강 직전에 우리 집에 함께 모여 광주항쟁 이후 민주화운동의 책임과 과제에 관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유인물 제작 배포를 맡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를 실행하기도 전인 다음 주 월요일 아침, 2학기 개강 첫날에 학교에 유인물이 뿌려졌습니다. 이 유인물 사건과 관련하여 후배들이 연행당하고 고문을 당한 끝에 선배들이 뭔가 준비하고 있었다고 불었습니다.


그리고 제 친구들과 저도 경찰에 연행 당했습니다. 입고 있던 모든 옷을 다 벗게 하더니 내의로 눈을 가렸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무한대 팔굽혀펴기, 다음은 몽둥이 찜질... 그리고 난 다음에서야 유인물이 누구 짓인지를 불으라고 추궁했습니다. 그동안 몇 주간의 일정을 모조리 적어내라고 시켰습니다.


지금까지도 저는 그 유인물을 누가 제작, 배포했는지 정말 모릅니다. 그런데 “누구냐, 불어라” 형사들의 추궁에 미칠 지경이었습니다. 며칠씩 잠을 재우지 않고, 주먹으로 또 몽둥이로 패고, 심지어 물고문까지 자행하였습니다. 영장도 없이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22일 동안을 그처럼 당했던 것입니다. 몽둥이로 맞은 곳들 중에서 엉덩이와 허벅지 부분은 피부가 헤어져 짓무른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호실로 보내졌을 때에는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면 속옷이 피부에 붙어있어서 몸을 움직이려면 먼저 속옷을 강제로 떼어 놓아야 했습니다.


처음부터 내가 하려고 했다는 것은 밝혔지만, 계속 고문을 당하면서 나중에는 ‘내가 다 한 일’이라고 인정하고 끝내고 그 자리를 모면해 보고자 했지만, 제게 돌아온 것은 또다시 몽둥이 찜질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제 수첩에 있었던 메모 내용이 유언비어 유포에 해당한다며 즉심에 넘겼고, 서슬 퍼런 계엄령 치하에서 판사는 저와 친구들에게 20일 구류 처분을 내렸습니다.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적어도 피부의 상처가 아물 수 있는 기간이 그들에게 필요했었을 터이지요.


 

이런 고문을 겪으면서 끊임없이 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물음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런 고난을 겪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또 ‘나는 왜 사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제게는 그 물음이 결국 제 삶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천국의 열쇠


 


제가 가르치던 신촌교회 고등부 학생들이 면회를 와서 A. J. 크로닌의 소설『천국의 열쇠』(The Keys of the Kingdom, 1941)를 넣어주고 갔습니다. 이 책을 조사기간의 끄트머리에 서대문경찰서 보호실에서 처음 읽었습니다.


이 『천국의 열쇠』라는 소설, 아직 읽어보지 않은 교우 계시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시작 부분은 “끝머리의 시작”이라는 제목처럼 상당히 지루하고, 또 공감이 쉽지 않은 내용이므로 그냥 대충대충 읽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도 상관이 없습니다. 끝까지 다 읽고 나서 처음 부분을 다시 한 번 읽을 때에야 그 장면과 의미가 제대로, 또 쉽게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은 프랜치스 치셤(Francis Chisholm)이라는, 넓은 마음을 지닌 그렇지만 자신의 출세나 안위를 챙기는 데에는 문외한이고 매우 고지식한, 그런 한 신부입니다. 그는 이른바 교단 정치에 줄서는 것도 모릅니다. 결국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중국의 깡촌 벽지에 선교사로 파견됩니다. 그 이후 치셤 신부가 어떤 수난의 생활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이 소설에서 다른 어떤 장면들보다도 깊이 제 심금을 울린 장면이 있는데, 이것만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치셤 신부는 자신의 중국에서의 30여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이제 귀국하게 되면서, 자신이 처음 미사를 드렸던 자리를 찾아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간절한 기도를 올립니다. “하나님, 행위로서가 아니라 의도로서 심판하여 주옵소서.”


온갖 고문을 당하며 ‘왜 사는가?’라는 물음을 가졌던 20세 초반의 젊은이에게 경찰서 보호실에서 읽은 이 구절이 얼마나 절절하게 다가왔을까요?


 


3. 궁극적 관심


 


폴 틸리히(Paul Tillich)라는 신학자는 이러한 질문을 “궁극적 관심”(the ultimate concern)이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이 ‘궁극적’이란 단어가 말해 주듯, 그것이 하나의 수단이나 다른 목적 실현을 위한 방도가 아닙니다. 마치 “뭣이 중헌디“라는 영화 대사처럼, 가장 중요하고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그러한 관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돈을 버는 일은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 될 수도 있고, 먹고 살기 위한 수단이 되거나, 아니면 다른 지고한 목적을 실현하는 방도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먹고 사는 것도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으로 그치거나 아니면, 어떤 무엇을 누리기 위한 수단과 방도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방도나 수단이 아니라 그런 방도나 수단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자기 자신의 삶의 가장 밑바탕에 깔려 있는 지향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바로 궁극적 관심이라 할 것입니다.


틸리히는 결국 종교란 그런 궁극적 관심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심지어 나치 체제도, 어떤 이념이나 사상도, 또한 물신주의 돈 숭배도 결국 ‘궁극적’ 아니면 ‘준-궁극적’ 관심에 속하며, 그런 의미에서 이들은 모두 ‘종교’ 또는 ‘준-종교’(quasi-religion)라 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4. 책임의 범위


 


우리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을 치셤 신부의 말로 표현한다면, 우리는 행위로서가 아니라 의도로서 심판을 받는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웃과 자연을 향하여 무한한 책임을 부여 받은 유한한 인간 존재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은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도록 만들어 주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 질서입니다. 또한 자연에 대한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우리 인간들을 불러 주셨습니다. 사람들 가운데서 또는 하나님의 피조물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직 절대자이신 하나님 한 분 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부름에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며 살아가겠다고 확인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당연한 책무입니다. 그야말로 실현할 수 없는 무한한 책임을 부여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책임의 범위를 좁게 한정시켜 놓고 마치 스스로 부여된 책임을 모두 완수한 것처럼 허위의식을 가지는 경우가 수없이 많이 발견됩니다. 부유한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여기도록 유도하기도 합니다. 적당하게(!) 가난한 이웃을 위한 구제 활동에도 참여하여 이른바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피해 가려 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우리들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요? 가난한 이웃들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할 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결국 내 책임의 범위는 내가 이미 완수했다는 식의 자만심이 이런 견해에 배어들어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의적으로 자신의 책임의 한계를 좁게 금 그어 놓으려는 시도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교만입니다. 이는 결국 자신의 책임은 완수했다며 스스로 의로움을 내세우고자 하는 전단계요, 그래서 하나님의 자리까지 더욱 높이 올라가고자 하는 인간의 죄악이기 때문입니다.


 


5.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이웃들과 자연에 대한 무한책임을 부여받았음을 인정할 때 사람은 아무도 자신의 완벽함을 내세울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 하더라도 그 ‘무한책임’ 앞에서 우리의 ‘유한실천’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뿐입니다. 자신의 부족함, 하나님 앞에서의 죄됨, 그리고 책임을 게을리 한 ‘악하고 게으른 무익한 종’의 모습을 스스로에게서 발견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치셤 신부처럼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무릎 꿇고 “하나님, 저는 부족한 죄인입니다. 제 행위로서가 아니라 삶의 의도를 보시고 심판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과연 무엇이 ‘궁극적인 관심’이 되어야 하는가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재화들, 다른 피조물들, 권력이나 사회 이념, 또는 제도 등 그 모든 것들이 절대적인 섬김의 대상이 아닙니다. 물론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용납될 수 없습니다.


폴 틸리히의 표현대로 “신앙이란 궁극적 관심에 붙잡힌 상태이다.”라고 할 때, 그처럼 유한한 가치를 지닌 피조물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주인이신 ‘주 하나님’에 붙잡힌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 하나님’에 대한 관심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이며 궁극적인 관심이 될 때, 그 때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삶의 자세’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언제부터인지 그러한 삶의 자세와는 상관없는 이른바 주일에만, 교회 울타리 안에서만 행하는 이른바 ‘신앙생활’로 구원을 얻는 것으로 대체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른바 ‘싸구려 은혜’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그러한 ‘신앙생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공의 가르침과 같이 ‘생활신앙’입니다. 우리의 실천과 책임 수행의 정도는 부끄럽기 짝이 없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영생의 면류관을 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활신앙’으로 새로워져야 합니다. 이 시간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궁극적 관심은 어디에 있어야 하겠습니까? 이단 사이비 교단들의 공통점은 자신들 가르치는 그대로 행하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데 있습니다. 우리의 관심도 그처럼 온통 세상적인 관심에 쏠려 있는 것은 아닙니까?


 


6. 매듭


 


오늘 복음서 본문 눅 12:29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고 찾지 말고, 염려하지 말아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어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골로새서 본문에서 사도는 우리에게 모든 일에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어서,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열쇠는 “나는 천국의 열쇠를 가질 자격이 충분하다.”면서 하나님 앞에 교만함으로 나서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요구대로 실천하지만, 그런 실천에도 불구하고 정말 하나님 앞에서 부족함을 깨닫고 부끄러워하며, “저는 천국의 열쇠를 가질 자격이 없습니다.”라고 하나님께 고백하는 자들,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총으로 주시는 것이 바로 ‘천국의 열쇠’라 하겠습니다. 진정한 복과 저주,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는 바로 우리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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