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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해] 창조절(3-2) - "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 / 남신도회주일 / 서재경 목사

관리자 2022-09-16 (금) 14:28 1년전 415  

본문) 창 12:1~9, 갈 3:1~14, 요 8:53~59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요 8:58)


지난주에 추석 명절을 지냈습니다. 추석은 가을걷이가 시작되는 때지요. 올해는 좀 이른 추석이라서 아직 들판이 푸르지만, 조금 있으면 온통 황금 물결로 출렁일 것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 뙤약볕과 폭우를 견디어낸 농부들에게, 어려운 시절에 땀 흘려 일하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은총을 내려 주셔서 풍성한 결실을 허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태풍 피해로 망연자실한 분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은총이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하나님 품에 계신 우리 부모님과 선조들에게 주님의 평화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대 사람들과 논쟁하신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사람들의 명절인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셨습니다. 초막절은 우리의 추석처럼 곡식을 거둘 때 지키는 명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초막절에 이스라엘 백성은 누구나 집을 떠나 초막을 짓고 이레 동안 지내라고 말씀하셨지요.(레 23:42)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초막을 짓고 지냈던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곡식을 거두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역사를 기리는 중요한 명절이었습니다.


우리는 명절이면 고향으로 가지요. 그래서 해마다 귀성행렬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명절에 어디로 갈까요?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도 명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 세 번 가신 것으로 나오는데, 명절 때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 사람들과 부딪히셨습니다. 첫 번은 유월절에 가셨는데,(2:13) 예루살렘 성전을 숙청하셨습니다. 세 번째 가신 것도 유월절이었고(12:12) 로마 병정들과 성전 경비병들에게 잡혀서 결국 십자가에 달리시게 됩니다. 두 번째 가신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초막절입니다.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가신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과 격렬한 논쟁을 벌이셨습니다.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팽팽한 논쟁이었지요. 결국에는 격분한 유대 사람들이 돌을 들고 치려 해서 예수님이 성전 바깥으로 몸을 피해야 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유대 사람들을 극도로 흥분시킨 그 역린이 무엇입니까? 바로 유대 사람들의 조상 아브라함의 문제였습니다. 이야기는 7장에서 시작되지요. 그런데 사실은 그 이전부터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난입해서 상을 둘러 엎고 채찍을 휘두르며 성전을 허물어버리라 하신 예수님은 이미 유대 사람들에게 공공의 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예수님은 이번 명절에는 예루살렘에 가지 않겠다고 하셨다가, 뒤에 아무도 모르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가자마자 예수님은 유대 사람들과 모세의 율법 문제로 논쟁하시지요. 그리고 마침내 아브라함 문제로 정말 치열한 논쟁을 벌이게 되지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유대 사람들에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따르는 사람이 자유롭다는 말씀이지요. 그러자 유대 사람들이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므로 아무에게도 종노릇 한 일이 없다고 반발합니다. 자신들은 선민이니까, 특별한 민족이니까 자유롭다는 것입니다. 이 씨 조선에서는 전주 이씨니까, 왕의 후손이니까 자유로운 것이지, 어떻게 천방지축이 자유롭게 된다는 말이냐, 그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얘기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자유의 문제’는 ‘죄의 문제’이지 ‘혈통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수긍했을까요? 아닙니다. 유대 사람들은 거듭 앵무새처럼 자신들의 조상이 아브라함이라고 주장합니다. 유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바꾸는 게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공격하기 시작했지요. 자기들이 보기에는 예수 당신은 사마리아 사람이고 귀신들렸다는 것입니다. 부정한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서, 근본을 알 수 없는 수상쩍은 여인을 만났으니, 당신은 틀림없이 사마리아 사람이다, 귀신들린 자들과 함께 돌아다니는 당신이야말로 진짜 귀신들린 사람이 분명하다, 그 말입니다.


그렇게 당신을 공격하는 유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는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하나님만이 나를 심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말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무슨 말씀입니까? 영원하신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이미 죽음을 넘어섰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죽음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했지요. 예수님의 말씀, 곧 아버지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말씀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그 껍데기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말씀이지요.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당신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하다는 말이냐, 당신은 누구냐며 대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라고, 너희가 그토록 찾고 부르는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시라고 말씀하셨지요. 내가 아버지를 모르고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지 않는다면 거짓말쟁이겠지만, 그러나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자녀다, 그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유대 사람들은 끝까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독선에 갇혀서 한 발짝도 나오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 나이 쉰도 못된 주제에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냐고 항변했지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마침내 그들에게 결정적인 말씀을 던지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58절)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 유대 사람들의 분노를 폭발시키는 뇌관을 때리는 말씀이지요. 정말 엄청난 말씀이며 참으로 오묘한 말씀입니다. 이게 무슨 말씀일까요?


우선 먼저, 이 구절을 읽으면서 뭔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성서를 아주 섬세하게 읽는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뭐가 다를까요? 여기 ‘내가 있다’는 이 말의 서체가 다른 글자와는 달리 ‘고딕 체’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는 여기 말고도 고딕 체로 구별해 쓴 곳이 또 있습니다. 앞에 8장 24절과 28절에서도 ‘나는 곧 나’라는 말을 고딕 체로 썼습니다. 58절의 ‘내가 있다’는 말과 24절, 28절의 ‘나는 곧 나’라는 말은 같은 말입니다. 그리스 말로 ‘에고 에이미’(εγω ειμι)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성서에서 누구나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이 말을 일컬어 하나님의 ‘자기표명’(自己表明)이라고 하지요. 오직 하나님만이 ‘나는 나다’하고 말씀하실 수 있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여쭈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나는 곧 나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14)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태초 이전부터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신 말씀, 로고스이지요. 그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 곧 예수님입니다. 그러니까, 태초 이전부터 계신 분이니까, 예수님은 아브라함보다 더 먼저 계신 분이 맞습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는 말씀은 요한복음에서 이상한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 그래서 아브라함보다 더 높고 위대하다, 뭐 그런 얘기일까요? 그러니 아브라함의 자손인 유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 할아버지로 모셔야 한다, 그런 서열을 확정하자는 말일까요? 아니지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그 어떤 혈통과 족보의 우선권을 주장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태초 이전부터 계셨다고 했는데, 그때 예수님은 무엇이었습니까? 로고스, 말씀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십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십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말씀 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계시고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계십니다. ‘말씀 안에서’ 예수님은 태초 이전부터 영원까지 계신 하나님과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입니다. 이것은 다만 신비입니다. 인간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심으로써,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하나님과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놀랍고 신비로운 것은,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가 되는 이 신비는 그리스도인에게도, 우리에게도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지켜서 예수님 안에 있으면, 우리는 또한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 안에서 하나님 안에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듣고 말씀을 알고 말씀을 지킨다면, 우리는 이미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 살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우리가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유대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특권의식을 끝까지 포기하지 못했지요. 그래서 그들은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그게 유대인들만의 특권을 보증하는 등기권리증이라도 되는 것일까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아니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를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백성의 선조로 삼으셨지요. 맞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이야기를 똑바로 마주하면 이야기는 상당히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시면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 여기서 먼저 주목할 것은 떠나라는 것이지요. 고향 땅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유대 사람들이 그토록 죽자고 집착하는 그 혈연을 떠나라는 말입니다. 여기에 그 무슨 배타적 지역주의와 맹목적 혈연주의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런 것들을 떠나라는 것, 단호히 끊어버리라는 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어디 출신이니, 누구의 후손이니 하는 그런 것들로부터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고향과 아비의 집을 떠나는 아브람에게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복은 또 무엇이지요? 큰 민족을 이루어 그 이름을 떨치게 하시고,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겠답니다. 아브람을 축복하는 사람들은 복을 주시고 저주하는 자들에게는 저주를 내리시겠답니다. 정말 이 정도면 복 받은 사람이라 할 만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브람을 부르시어 고향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게 하시고, 그를 큰 민족이 되게 축복하시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신 최종 목적은 아브라함의 후손만 복을 받고 다른 민족들은 다 저주를 받게 하시려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땅에 사는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아브라함은 혈통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운 일로 여겨 주셨다(갈 3:6)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들에게 미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은 혈통으로 난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난 사람들입니다.(갈 3:7)


사랑하는 유대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자랑하면서도 정작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을 거부했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껍데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아집과 독선으로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신 분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라 자처하지요. 그런데 우리가 또다시 저 유대 사람들처럼,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지독히 배타적인 독선에 빠져서 하나님의 자녀들을 거부한다면,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에 내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함으로써, 다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따름으로써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의 놀라운 신비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이 말씀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을 지킬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태초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말씀 안에서 우리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날 동안 생명의 말씀을 따를 수 있도록,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살아가도록, 보혜사 성령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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