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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해] 창조절(10-2) - " 예수께서 주시는 칼 " / 김거성 목사

관리자 2021-11-06 (토) 12:07 2년전 481  

(삼하 23:13-17; 약 4:1-10; 마 10:34-39)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함께 모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또 감사한지 마음 깊이 새기는 오늘 이 자리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1. 성서에서의 상충


 


성서를 읽을 때 가끔씩 우리를 당혹케 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이 나오거나, 심지어 성서 본문들 사이에 서로 충돌되는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럴 때 한 본문은 맞고 다른 본문은 틀렸다 해야 할 것 같은데, 신학자들에게도 이런 구절들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상충의 사례는 칼이냐 보습이냐 하는 문제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욜 3:10에 ”보습을 쳐서 칼을 만들고, 낫을 쳐서 창을 만들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반면에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라는 말씀이 사 2:4, 또 미 4:3에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마 5:9)고 하셨습니다. 또 본문 바로 앞에는 다음과 같이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그 집에 들어갈 때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래서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알맞으면, 너희가 비는 평화가 그 집에 있게 하고, 알맞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되돌아오게 하여라.“(마 10:12-13)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께서 "너희는 내가 땅 위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평화를 일구어야 하는지, 아니면 칼을 준비해야 하는지 혼란스럽게 느껴질 것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의 과제는 평화입니까 아니면 분쟁입니까?


 


1. 세상과 벗하는 신앙인(?)


 


오래전 이야기입니다만, 교인 한 사람이 뇌물을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검찰에 불려갔습니다. 검사가 그 돈의 용처를 묻자 그는 맨 먼저 십일조를 바쳤다고 당당하게 답했다고 합니다. 교인이라고 해서 더 청렴하다거나 법을 잘 준수하는 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잘못된 법이라면 또 모르겠습니다만...


 

"좋은 게 좋은 거야"라는 말이 있습니다. 들어보셨지요? 흔히 그냥 일본말로 ‘유도리(ゆとり) 있게’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법이나 규정대로 하는 대신에 융통성 있게 하자는 뜻으로 쓰이는 말입니다. 뇌물을 건네면서 상대방에게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인데..."라며 다독거리기도 합니다.


약 4장 말씀처럼 육신의 욕심을 부리며 자기의 쾌락을 누리기 위해 다투고 싸우고 살인까지 합니다. 세상과 벗하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기본적인 사회의 도덕이나 윤리 기준조차도 벗어나는 일탈이 스스로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에게서 계속됩니다. 이처럼 신앙과 생활, 신앙과 실천이 서로 어긋나고 오히려 서로 배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스스로 자부하며, 교회에서 여러 중요한 직분을 맡기도 합니다. 물론 교회 출석이나 십일조에도 빠짐이 없고, 교리나 성경 지식도 해박하며, 찬송가도 대부분 다 외우고, 기도도 유창하게 합니다. 이런 생활에 문제가 없는 것일까요? 시간적으로는 일요일 하루만 거룩하게 지내고, 교회 울타리 속에서만 점잖은 언행을 하는 것으로 신앙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세상과 벗하고 탐욕과 짝지으면서도 스스로 신앙인이라 할 수 있을까요?


사회에서는 이런 일들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서 기독교를 비하합니다. 이에 따라 기독교 선교의 지평은 더욱 좁아지고 있는 것이 안타깝지만 우리의 현실 아닙니까?


 


2. 예수의 칼


 


오늘 복음서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평화는 긍정적 의미의 ‘샬롬’이 아닙니다. 세상과 벗하면서, 그저 좋은게 좋은 거라고 하는 자기 합리화나 현상유지(status quo)를 말합니다.


구약성서 삼하 23장 본문에는 다윗과 그의 세 용사가 등장합니다. 세 용사는 산성 요새에 있는 다윗을 위해 블레셋 진을 뚫고 나가 베들레헴 성문 곁에 있는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왔습니다. 다윗은 그 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물을 주님께 부어드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이 물을 제가 어찌 감히 마시겠습니까! 이것은, 목숨을 걸고 다녀온 세 용사의 피가 아닙니까!"(삼하 23:17) 여기 나오는 다윗처럼,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 삼아 만사의 사리를 잘 분별해야 합니다. 자신의 당장의 욕심에 마음이 팔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히 4:12-13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양날 칼보다도 날카로워서, 사람 속을 꿰뚫어 혼과 영을 갈라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놓기 까지 하며,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향을 가려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앞에 모든 것을 드러내 놓아야 합니다.“ 또 눅 2:35은 이렇게 말합니다: "칼이 당신의 마음을 찌를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의 마음 속 생각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칼은 무엇입니까? 이 말씀들이 의미하는 것처럼, 예수께서 주시는 칼은 바로 우리의 생활을 찌르고 갈라내어 진정한 신앙인의 실천인지 아니면 탐욕에 찌든 삶인지를 분별하도록 합니다.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잘못된 풍조에 휩쓸리거나 세상과 벗하는 것을 과감하게 끊어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복종하는지 아니면 악마의 요구를 좇아 탐욕과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지, 우리의 마음속을 갈라 그 생각들을 드러내 보이는 칼입니다.


 


3. 제자의 길


 


이렇게 원칙을 준수하고 탐욕이나 쾌락과 단절하려 할 때에는 우선 주변 사람들이 먼저 나서서 우리 앞을 막아설 수 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야’, ‘그래봐야 당신만 손해야’, ‘당신은 피도 눈물도 없냐?‘,


오늘 마태복음서에 나오는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일 것“이라는 상황이 바로 여기서 빚어질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어머니와 딸과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 맞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본문은 사이비 집단들이 가정을 파괴하며 써먹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메시지의 본질은 예수께서 주시는 칼로 자신의 판단과 실천을 정확하게 재단해 갈 때 가까운 사람들로부터도 반대에 직면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칼이 자신의 판단을 좌우하고, 그 판단의 바탕에서 실천하는 것은 제자들에게 가장 근본적으로 요구되는 일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것“(마 10:38)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제자도, 즉 제자의 길입니다.


 


4. 생활신앙으로


 


장공 김재준 목사는 신앙인은 ‘신앙생활’을 넘어 ‘생활신앙’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1) 일상생활과 서로 어그러져 동떨어진 신앙생활이란 것이 따로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참된 신앙인이냐 아니냐 하는 여부를 가르는 기준은 바로 그 신앙이 삶 속에서 온전하게 실천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하는데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진정한 빛의 자녀답게 살 것을 함께 다짐합시다. 예수께서 주시는 날선 칼이 우리의 폐부를 찌르고 갈라서 우리의 속마음을 드러내 보이게 해야 합니다. 생활과 신앙의 이중성이라는 위선이 아니라, 겉과 속이 한결같은 생활신앙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자의 길입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칼로 우리의 생활에서 모든 탐욕과 쾌락을 지향하는 생각들을 도려내고 온전하게 생활신앙으로 거듭나며, 이 세계와 우리들 모두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진정한 평화를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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