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창조절(10-1) - "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신앙 " / 신솔문 목사 > 창조절

본문 바로가기

창조절 HOME > 설교올리기 > 창조절

[둘째해] 창조절(10-1) - "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신앙 " / 신솔문 목사

관리자 2021-11-05 (금) 11:58 2년전 595  

본문: 삼하 23:13~17, 약 4:1~10, 마 10:34~39


 


1.


 

“가정(假定)을 전제로 답변할 수 없다”는 말을 어디선가 들어보셨을 겁니다. 정치인들이 난처한 질문을 빠져나갈 때 흔히 쓰는 말입니다. 무게감 있는 표현이지만 사실은 틀린 말입니다. 법조인 출신 정치인들이 법정에서 사용되는 단어를 ‘조립’해서 이 말을 유행시킨 것으로 보이나, 세계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해는 고사하고, 법리를 형성해주는 논증 이론에도 피상적 지식에 머물러 있는 우리나라 ‘법-기술자’들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가정이 이렇게 오해되고 오용될 때가 많지만 요긴하게 사용될 때도 많습니다. 귀류법의 증명 과정이 아름다운 이유도 가정을 전제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정해보고 생각해보는 것은 자기 자신의 진심(眞心)을 헤아릴 때도 진가를 발휘합니다. 자신의 신앙심을 헤아려볼 수 있는 이 테스트도 가정을 이용한 방법입니다. 성도 여러분의 진심을 한번 확인해보십시오.


 

2.


 

[2-1] 어떤 사람이 성도 여러분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고 합시다. “만일 예수내구주 신앙을 버린다면 돈 천 원을 주겠다!”


 

모욕감이 드실 겁니다. 천 원이라는 말에서 장난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도 신앙의 가치를 감히 천 원이라니! 그러면 돈의 액수를 조금 더 올려보겠습니다. “신앙을 버리면 백만 원을 주겠습니다.” 여전히 모욕적이지요? 어차피 가정적 상황이니 팍 쓰겠습니다. “신앙을 버리면 10억 원 주겠습니다!”


 

이제는 마음에서 ‘어’하는 느낌이 드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즉각적으로 ‘안 돼!’가 아니라 아주 짧지만, 마음속에서 미세한 갈등이 생긴 것이지요. 10억이 우리에게는 큰돈이기 때문입니다. 테스트는 이제부터 본격적입니다. 강도를 더 올려보겠습니다. “신앙을 버리면 100억 원을 주겠습니다! 100억 원 가지고는 불안하신가요? 파격적으로 1,000억 원을 드리겠습니다. 이래도 신앙을 팔지 않겠습니까?”


 

이 제안은 좀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물질적인 복을 얻기 위해 예수 믿는 분이라면 이 제안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예수님 없이도 목표에 도달할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감사하게도 신령한 복을 추구하는 대부분 신자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래도 신앙을 팔지 않겠다!”


 

이것을 보면 부지불식간에 지니고 있는 우리 신앙의 깊이는 상당한 것 같습니다.


 

[2-2] 이 세상의 복은 전통적으로 오복(五福)으로 정리됩니다. 그중 공통적인 것 세 가지는 수(壽), 부(富), 강녕(康寧)입니다. 오래 살고, 돈 많고, 평안(신체 건강 포함)한 것입니다. 앞에서 해본 신앙 테스트에서는 많은 돈으로 우리의 신앙 강도를 헤아려보았습니다. 오래 사는 것과 평안함은 거래에 넣지 않았지요. 오늘 마태복음을 일종의 테스트로 이해한다면, 이 말씀은 성도 여러분에게 테스트 강도를 높여서 평안함과 목숨까지 신앙을 위해 포기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안녕(평안)”을 가져다주는 기본 환경은 가정입니다. 오늘 말씀은 가정을 통해 누리는 평안함을 잃게 되더라도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지 성도 여러분에게 묻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자기 십자가를 질 때 겪게 되는 고난을 감수할 수 있는지 묻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지 성도 여러분에게 묻고 있습니다.


 

 천억 원은 어렵지 않게 거절했는데 이것은 쉽지 않을 겁니다. 돈과 달리 사안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위해 이런 것까지 포기할 각오를 해야 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입니다. 우리 신앙의 대상은 절대자입니다. 상대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도 상대적이 아닌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다만, 이러한 각오를 가지는 것이 실제로 포기하는 것을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마다 처하는 상황이 다양해서 실제 상황이 오더라도 일률적인 실천이 나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앙을 지키기 위해 이 세상의 복을 포기할 수 있다는 각오만은 모든 성도들에서 일률적이어야 합니다. 진실한 신앙에서 나타나는 특성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에서는 이러한 각오가 부재한 부실한 신앙을 “두 마음”(1:8)이라고 합니다. 오늘 야고보서 말씀은 성도들이 이러한 두 마음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단절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적 복이나 즐거움이나 욕망에 지배당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만이 우리의 주인이어야 합니다. 주님 외에 어느 것에도 지배당하지 않고 주님께만 충성을 다해야한다는 것이 야고보서가 강조하는 ‘한 마음’입니다.


 

3.


 

오늘 사무엘하 말씀에는 “두 마음”이 아닌 “충성”된 ‘한 마음’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등산할 때 저에게 나타나는 습관 하나는 앞장을 서는 것입니다. 안내자 역할을 하려는 사명감 때문에 그런다고 둘러대긴 하지만, 단시간에 정상을 찍고 와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도 있는 것 같습니다. 앞장서서 가다가 문득 지금이 전쟁 중 수색이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적군의 저격수나 매복한 군인들에게 사살되기 쉬운 위치이지요. 이런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전우와 국가를 위해 제가 이렇게 앞장설지 자신이 없었습니다. 이런 점을 보면 “충성”의 군인 정신, 참 대단합니다.


 

다윗의 세 용사의 행동에서 우리는 이러한 충성심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베들레헴에 진을 치고 다윗과 그의 부대원들은 아둘람 동굴에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이 베들레헴 성문 옆에 있는 우물물을 마시고 싶다는 소원을 말합니다. 적진에 다녀오라는 무모한 명령은 아니었을 겁니다. ‘고향의 물맛’을 생각하다가 나온 한탄일 수도 있고, 블레셋 군대를 몰아내고 고향의 우물가에서 용사들이 길어준 물을 마시고 싶다는 승전의 바람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이러한 마음을 느낀 세 용사는 이를 실행에 옮깁니다. 목숨을 걸고 적진에 들어가 우물물을 길어와 다윗에게 줍니다. 오해로 생긴 일이지요. 하지만 다윗은 감동합니다. 피 같은 물이라고 하면서 그 물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목회자들은 어떤 음식을 좋아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비싼 것일 경우는 더 조심하지요. 다윗이 그런 마음을 노출한 것은 실수였습니다. 다윗의 세 용사도 무모했고요. 하지만 따르는 분을 위해 목숨을 건 용사들의 충성심과 이것을 소중히 여기는 다윗의 태도는 우리가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우리도 충성을 해야합니다.


 

마태복음과 야고보서의 신앙 테스트를 통과한 친애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 여러분들이 주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무조건적인 충성으로 보답하기를 소망합니다.


 


 [註] 세 본문을 관통하는 주제를 “충성”으로 잡고, 최부옥목사님께서 올리신 설교 자료를 살펴보니 정리를 잘 해놓으셨더군요. 제 설교문은 올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상세한 주석은 다른 게시판에 있는 원장님 글을 참고해주십시오.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