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목회연구원

창조절(9-3) - " 부여 받은 정체성 위에 굳게 서라 " / 종교개혁기념주일 / 최부옥 목사 > 창조절

본문 바로가기

창조절 HOME > 설교올리기 > 창조절

[둘째해] 창조절(9-3) - " 부여 받은 정체성 위에 굳게 서라 " / 종교개혁기념주일 / 최부옥 목사

관리자 2021-10-29 (금) 17:02 2년전 519  

본문) 신 7:6~11, 마 5:43-48, 롬 1:1-17 


창조절 아홉째 주일입니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제504주년 기념 주일이기도 합니다. 이는 우리 개신교회(改新敎會)의 출현을 기념하는 생일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저항(抵抗)하는 사람’이라는 정신적 기반을, 신앙의 기조(基調)로 담은 영적공동체가 이 지구촌에 출현한 날이기도 합니다.


당시 루터는 자신이 속해 있는 로마 카톨릭의 평(平)사제 중의 하나로서, 교황청에서 주도하고 있는 세칭 ‘면죄부(免罪符)판매’에 깊은 회의(懷疑)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 어느 날(1517.10.31.) 교회의 그러한 ‘천국행 구원을 위한 티켓 판매 행위’들이, 과연 성서의 하나님 말씀에 부합된 것인지를 따져 보자는 입장에서, 자신이 속한 비텐베르그 성당의 게시판에 95개조 토론 논제를 내 걸었습니다. 


그 바람에 루터는, 예기치 않게, 어둔 역사에 새로운 길을 내는 ‘개혁자(改革者)’의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거짓된 진리에 저항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아비가 된 것입니다. 그가 내건 개혁의 기치도 ‘오직 성서로’, ‘오직 말씀으로’이었습니다.


그 때 그의 마음의 자세는, 마치 저 베뢰아 교회 성도들이 가졌던, ‘말씀이 과연 그러한가’라는 성경 말씀 자체를 상고(詳考)하려고 했을 뿐이었는데도(행17:11), 그 결과는 온 유럽 교회는 물론, 사회와 역사 전반에 개혁의 물결을 불러오게 되면서, 세계사 속에서 개신교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것은 루터 개인의 위대함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 자체의 변화(變化)시키는 능력과, 그에 순종하는 신실한 주의 종들을 앞세워 일하시는 성령(聖靈)의 역사 때문이었습니다.


그 후 세월은 어느 덧 504년이 흘러서, 한국의 개신교회의 역사도 130여년 대(代)를 보내는 중입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지금은 어떨까요? 비록 겉모습으로는 세계가 감동하는 수준에 도달했지만, 내면으로는 큰 위기(危機)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아니, 지금의 우리는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한 시점에 서 있습니다. 그 요구는 그 어떤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닌, 하늘이 안겨 준 이번의 코로나19로 인한 것입니다. 


사실 그 간의 우리 교회들은 외형적 확장 구축에 집중해오면서, 세상에도 적잖은 영향력을 행사할 힘의 집단도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보다 본질적인 창조주의음성인,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이는 곧 ‘한국 교회야, 너는 나에게 누구냐’라는 음성을 듣습니다. 이는 자아(自我)를 상실하고 정체성 상실의 현상에서 나온 성령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먼저 ‘너 자신부터 바로 세우라’는 요구입니다. 


때마침 2021년에 맞이한 종교개혁주일에 주시는 교회력의 세 본문 말씀들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곧 교회와 교우들의 정체성(Identity)을 집중적으로 묻습니다.  


구약 신명기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우리 신앙인들의 첫 원조들)이 진정 어떤 사람들이었느냐에 관한 정체성을 전합니다. 모세를 통하여 전달된 것이었지만, 그들은 사실 하나님이 택하신 성민(聖民)이요 택하신 기업(基業)이었습니다(6절). 그들은 곧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새로운 삶을 살터인데, 그러기에 그들에게 보다 시급한 일은, 그들을 부르시고 거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과의 확고한 관계 설정이었습니다. 이 문제는 실로 그들의 운명(運命)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성자 예수께서 당신이 택하신 제자들은 어떤 인물이어야 하는 지를 일깨우신 말씀입니다. 특히 하나님 사랑 차원이 아닌, 이웃 사랑의 차원에서 당신의 제자들은 어느 수준의 인물이어야 하는 지를 제시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할 수 없는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사람들이었습니다(44절). 이런 예수의 놀랍고도 충격적인 증언은, 세상에 만연해있는 증오와 불신의 시대를 끝내고자 하는 엄청난 도전이었고, 미움과 보복의 고리를 끊어 내자는 생명의 외침이었습니다. 


로마서에서의 성령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로 택하신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일깨우십니다. 그들은 저 이스라엘 못잖게 예수 그리스도의 것(소유)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이며, 성도(聖徒-saint)라는 이름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임을 상기(想起)시킵니다. 거기에는 인종 차이가 문제가 못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믿는 모든 세상의 존재들은 다 동일하게 해당되는 정체성입니다. 


☞ 이제 세 본문이 제시한 <성민-제자-성도>로 이어지는 우리의 정체성들을 재확인하면서, 우리의 본래의 모습을 바르게 합시다. 개혁의 시작은 자기에서부터 되어야 합니다. 내가 제대로 설 때, 주변의 변화와 개혁들도 자연스럽게 견인할 수 있습니다. 그게 또한 개혁자 루터의 길이고, 그의 후예들인 우리들의 길이기도 합니다!


1. 구약 / 신 7: 6-11 /   ‘ 하나님의 성민이요 기업이 된 이스라엘 ’


이스라엘 백성은 반드시 기억하며 살아야할 할 하나님과의 절대 관계(關係)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에게 자신들은 거룩한 백성(聖民)으로 선택 받았고, 전 세계 만민 중에서 유일하게 여호와의 기업(基業-,소유)으로 택하심을 입은 족속이라는 점입니다(6절). ‘성민’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암 콰도쉬’라는 말인데, 그 뜻은 ‘구별해 바치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관계맺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마치부모와 자식이 운명적으로 구별된 절대 관계처럼, 서로 얽혀졌습니다. 


1) 여호와는 그렇게 맺어진 연유를 두 가지로 설명하셨습니다 :


첫째, 당시 떠돌이였던 이스라엘이 모든 족속 중에서 가장 작은 민족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7절). 규모가 너무 적어 고단하고 외로웠던 민족이어서, 하나님이 그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자비와 사랑(인애/9절,하)을 베풀게 되셨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그 어떤 공적과는 무관하게,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베푼 첫 사랑이었습니다.


둘째, 여호와 자신이 그들의 조상들과 맹세(盟誓)하신 연고 때문입니다(8절,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복(福)을 주시면서, 그들의 후손과도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을 약속 하셨었는데(창12:2,17:1-8,26:3-9, 28:13-15참조), 지금 그런 당신의 약속들을 그의 후손들에게 실행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얼마 전, 애굽의 바로로부터 이스라엘을 출애굽하게 하신 것이나 지금 광야를 지나 가나안으로 인도하시는 일정도, 모두가 그 조상들과의 약속을 지키시는 일이었습니다. 


2) 따라서 하나님의 이런 특별한 사랑과 돌보심을 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하나님께 반드시 응답해야할 책임과 의무가 부여되었습니다. 어떤 것입니까? 


-책임(責任)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 인식을 품고 사는 것입니다(9절). 어떤 하나님으로 생각해야 되나요? 여호와는 ‘가장 신실하신(the faithful) 하나님’이란 인식을 간직해야만 했습니다. 또한 오랜 전에 자기 조상들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면서, 그것을 이루시려고 항상 최선을 다하시는 여호와의 그 사랑을 특권적으로 누리고 있는 자신들임을 늘 기억해야 했습니다. 그래야만,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피할 수 있습니다(출20:5참조)


-의무(義務)로서는,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내려 주시는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꼭 지켜 행하는 일입니다(11절). 이 의무에는 댓가가 따릅니다.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代)까지 사랑을 베푸십니다. 하지만 계명을 무시하며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은 당장 보응하십니다(9-10절). 여기에서 ‘당장’(엘 파나)이란 말은, 주위 사람들이 분명히 알 수 있도록, 보여 주시는 상태를 말합니다(출20:5-6참조). 


2. 복음서 / 마 5:43-48 /  “ 네 원수도 사랑하며 기도해 줄 수 있는 제자들 ” 


예수 시대에 국가 종교였던 유대교의 가장 큰 신앙적 오류(誤謬)는 빈곤한 이웃 사랑에 있었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대한 열정은 나름대로 열심히 감당하였으나, 그 사랑의 실천의 장인 이웃 사랑의 날개는 힘을 잃은 체 죽어 있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인의 증언은 그 실례). 그러기에, 유대교는 생명의 종교가 되지 못하고, 사람을 심판하고 정죄나 하는 생명 없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 바람에 자기들 나름은 신앙에는 열심이지만, 그 제사를 받으시는 여호와(예수님의 입장에 의함)는 그들을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규정하는, 실로 모순의 깊은 늪에 빠져 있었습니다(요8:44 참조). 


예수께서는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 잡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생명을 구원하는 건강한 종교로 되살아나게 하시려고 오셔서, 전 생애를 바치셨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그런 점에서 유대교의 열심(하나님 사랑)과 그 부족(이웃 사랑)을 함께 전승도 하고 배우기도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위치에 있음을 봅니다.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 본문도 예수님의 이웃 사랑의 참 모습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전하신 내용입니다. 그 핵심은, 곧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44절). 


1) 주님은 먼저 그들이 주변에서 잘못 들어온 한 정보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그것을 새롭게 교정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는 미워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43절). 사실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은 구약에는 없습니다. 오히려 원수 사랑에 관련된 말씀들만 곳곳에 있을 뿐입니다(출23:4-5,레19:33-34,욥31:29,잠25:21-22 참조). 


2) 그러면, ‘원수를 미워하라’는 말은 어디에서 나온 것이었을까요? 예수 시대 유대교의 당파 싸움에서 있었습니다. 유대 쿰란 문서에 올라 있었습니다. 그런 정보가 듣는 자들로 하여금, 온전한 사랑이 아닌 불구의 사랑에까지 확산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을 조건부(條件附)적으로 선택할 빌미를 안겨 준 것입니다. 


3) 이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의 이웃 사랑 관(觀)을 확실히 잡아주고자 하셨습니다. ‘적어도 당신 제자들의 이웃 사랑은 ‘원수까지도 사랑하며 박해자를 위하여도 기도하는 수준’이기를 원했습니다(44절). 그것은 하늘 아버지의 인간 사랑의 보편성과 공정성에 따른 것입니다. 창조주께서는 햇빛이나 비를 내려주실 때, 선인이나 악인, 그 누구에게도 차별 없이 혜택을 고르게 베풀어 주시는 점을 그 구체적인 실례(實例)로 들면서, 제자들의 차별 없는 이웃사랑을 역설하신 것입니다(45절)


4) 동시에 조건부적 사랑-, 즉 자기만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사랑의 무익성도 일깨우셨습니다. 그런 본능적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 받을 상(賞)이 전혀 없을 뿐더러, 이방인들과 하등 다를 바 없는 저급한 것임을 지적하셨습니다(46-47절). 예수님의 이런 가르침은 입술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신 자신이 흉악자들의 손에서 무참히 십자가에 처형당해 죽임을 당하실 때에도, ‘저들을 용서해 달라’며 기도로 당신을 죽이는 원수들을 용서하셨습니다(눅23:34). 원수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문을 여신 것입니다. 


5) 주님의 원수 사랑의 요구에는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모든 원수관계를 확산이 아닌, 끝내고자 하심입니다. 그것은 원수를 사랑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보복의 악순환을 바라는 사단의 흉계를 좌절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바로 그 역할 감당자이기를 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자들의 가슴에는 그 누구에 대한 미움의 장벽이 아예 없어야 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모든 평화(平和)의 관계를 무제한 주도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오. 혹 원수가 있습니까? 있다면, 어떻게 상대하고 삽니까? 원수가 내게 있다면, 이웃 사랑은 물 건너 간 셈이지요. 그러나 원수를 아예 사랑할 수만 있다면, 이웃 사랑은 날개를 달게 됩니다. ‘내 마음에 원수란 없다’라는 수준에 이르러야, 나는 비로소 예수의 참 제자가 되는 것입니다(48절). 


3. 서신서 / 롬 1:1-7 /   “ 성도(聖徒)로 부르심을 받은 무리들 ”


1)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낸 서신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먼저 밝힙니다.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從-노예)으로서, 예수의 전권을 위임 받아 사도란 직임을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도록 택정함을 받은 자임을 알렸습니다(1절). 


2) 이때 그는 그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이중적인 존재됨부터 소개합니다. 그는 육신적으로는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으나(3절), 성령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종말적인 전권자로 책봉(冊封)되신 분입니다(4절). 바울은 바로 그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사도직(職)에 위임(委任)을 받은 것입니다. 그 바람에, 그리스도의 통치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세상과 만민들에게까지 확산되었습니다(5절, 고전15:8-10참조). 


3) 그 뿐 아닙니다. 바울은 로마교회를 비롯하여 온 세계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심을 받은 이들을 향하여서도, 그들이 바로 성도(聖徒,saint)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임을 알렸습니다(7절). 이 점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성민(聖民)으로 택하심을 받은 것과 똑 같은 차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흩어진 백성들을 성민들과 성도들로, 이웃 사랑의 실천자로 부르셨습니다. 잊지 맙시다.  


☞ 지금의 한국교회는 저 유대교의 신앙 모습과 너무 흡사합니다. 하나님 사랑에는 열심인 편이지만, 이웃사랑에는 매우 빈곤합니다. 원수사랑에는 더더욱 빈곤합니다. 이 문제는 반드시 극복되어야할 영적 과제입니다. 누가 이 난제의 해결자가 되겠습니까? 불신자나 정치인이나 기타 세상 사람들에게 기대할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면, 바로 우리 몫입니다. 성민(聖民)이요, 예수의 제자(弟子)된 이들이요, 성령으로 성도(聖徒)가 된 우리들 몫입니다이 문제 해결을 위해 씨름하는 모습만이,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세상과 이웃에 희망과 기쁨을 안겨줄 내용이 될 것입니다. 동시에 이 종교개혁 주일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될 것입니다




말씀목회연구원        ☎ TEL : 010-2434-0536       E-mail : puock@hanmail.net
COPYRIGHT © 2017 말씀목회연구원 .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