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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론적 교회력 소개

관리자 2019-01-24 (목) 09:08 5년전 956  

삼위일체론적(三位一體論的) 교회력이란      

                                                                                                                                                   최 부 옥 목사 (말씀목회연구원장)  

 

최근 우리 교단 안에는 교회력을 중심한 주일설교 운동이 힘을 내고 있다.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타 교단의 교회력을 중심으로 우리의 것을 포기내지 변경시키려는 움직임도 없지 않다. 이유야 어쨌든, 이런 모습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게다가 최근에 나온(?) 총회의 희년예식서에는 우리 교단이 채택한 삼위일체론적 교회력 이외에 타 교단의 것들도 함께 올렸다는 말들이 있다. 우리 기장의 것 안에 예장의 것(RCL)이 덜꺽 들어선 것이다. 비록 그게 에큐메니컬에 도움이 된다는 미명을 걸었겠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그것은 매우 심각하다. 우리의 공적 매체에 총회의 허락이 없이 두 개를 병행시킨 일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우리 내부의 혼란과 갈등을 유발할뿐더러, 총회질서와 자존심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의 것에 대한 보다 폭 넒은 지식과 정보를 가져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본인은 이 사안의 심각성을 가지고, 지난 십 수 년 넘게 이 교회력을 중심으로 설교하고 연구해 온 사람으로서, 또한 우리 교단이 지난 제25차 총회이래 계속 견지해 온 우리만의 세계 유일한 교회력인 삼위일체론적(三位一體論的) 교회력에 대한 경험적 정보를 드리면서, 독자 여러분들과 그 힘과 지혜를 공유하고자 한다. 소개할 주 관심사는 다음의 두 가지이다. 

 

o 왜 우리의 설교와 교육은 삼위일체론적(三位一體論的) 교회력이어야 하나? 

o 왜 우리 교단은 삼위일체 교회력을 택한 것을 자랑이요 긍지로 생각해야 하는가? 

 

1) 가장 성서적(聖書的)이기 때문이다. 

 

성서의 기본적인 구성은 구약-복음서-신약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활동 무대를 소개한 곳이다. 복음서는 그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활동하신 내용을 소개한 곳이다. 서신서는 그 분들의 영이신 성령께서 교회와 세상 역사의 현장에서 활동하신 영역들을 소개한 곳이다. 그러기에 그 분들의 다양했던 역할들을 모두 살펴보면서, 그 내용을 통전(通典)하고 융합(融合)하여 하모니로 전하는 것은 교회와 설교자들의 한결같은 임무이다. 어느 한쪽이 전부라고 하는 순간, 그는 성서를 잘못 본 것이고 모독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성서의 내용 구성만 놓고 보면, 성서는 결코 성부-성자-성령이신 하나님의 활동 내역을 단편적이거나 획일적으로만 구분하여 증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창조 시부터 성부(聖父) 하나님은 성자와 성령과 함께 모든 일을 하셨다(창1장, 요1장 참조). 성부께서는 유일하게 당신의 몸으로 낳으신 아들이자 그리스도를 말씀의 주로 세우셔서 창조의 동역을 맡기셨고(창1:3-, 요3:16, 히1:5-6절 등), 당신의 영을 통하여서는 무질서와 혼돈을 제압하시면서 구원의 건강한 질서를 세우는 작업을 하신 분이시다(창1:2). 

 

성자(聖者)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그의 삶과 마음은 끊임없이 하늘 아버지와 그의 나라를 의식하면서 말씀하셨고 일하셨으며 그 본향으로 돌아가기도 하셨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에게 당신의 하늘 아버지를 자신들의 아버지로 영접하도록 집중적으로 훈련하고 안내하여 주셨다. 뿐만 아니다. 그의 인간으로서의 지상 사역이 고단할 때마다, 하늘 아버지는 당신의 영을 아들에게 보내주셔서 그 아들을 도우셨다. 그러기에, 성자의 지상 사역을 제대로 보려면, 그가 아버지와 그의 영과 함께 공동으로 수행하신 모습을 함께 보게 된다. 그것을 놓치고 보면, 예수는 한낱 세상 안의 어느 혁명가요 개혁가 수준에만 머물고 말게 된다. 

 

성령(聖靈)의 사역의 현장인 서신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곳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구약의 성부의 말씀과 사역들, 스승이신 성자 그리스도 예수께 배우고 익혔던 삶들과 그의 말씀들을 교회란 현장에서 어떻게 치열하게 전하고 가르치며 수고하였는지를 폭넓게 전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기에, 이런 성서의 현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전하기 위해서는 삼위일체론적 교회력이 가장 적합하지 않을 수 없다. 

 

2) 모든 교회력들보다도 가장 기본적이고 조직력을 가진 큰 교회력이기 때문이다

 

구조적으로도 그렇다. 그리스도론적 교회력의 설교이나 성령론적인 교회력들(?)은 삼위일체론적 설교의 틀 안에 있을 뿐이지, 그것과 대비할 수 있는 형태의 규모와 메시지를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래도 고집한다면, 그것은 적은 일부분의 한쪽을 가지고 전체를 견제하고 논하려고 한다는 모순됨을 보이는 것이라는 판단할 수밖에 없다. 자칫 고린도교회의 파벌 형성의 흐름을 우리도 반복하고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두렵다. 바울의 결론은 이랬다. 교회나 목회는 개척자인 바울에 의한 것도 아니고, 계승자인 아볼로에 의한 것도 아니며, 사도인 베드로에 의한 것도 아니라, 오로지 전능하신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이었다(고전3:6-9절 참조). 

 

3) 가장 균형감(均衡感)을 갖춘 설교 형태이기 때문이다. 

 

물론 삼위일체 교회력 설교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전하는 데에 있다. 그는 분명히 인간되신 하나님이며,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온전한 인간이시기 때문이다(미5:2). 그런데, 그 분을 제대로 전하려면, 복음서 중심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란 존재와 그의 등장과 그의 지상에서의 모든 사역들과 역할과 지상 사역 이후의 그의 모든 사역을 온전히 전하는 데에는, 복음서만으로는 현저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자료들과 협력적인 보완 자료들인 구약과 서신서가 복음서와 함께 입체적으로 증언할 때에만,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참 구세주(救世主)이심을 온전하고도 충분히 확인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구약의 성부(聖父)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들의 증언은 반드시 증언되어야만 한다. 그럴 때, 성육신하셔서 우리의 구세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로서 재확인이 되고, 더욱 우리와 세상 만민의 구주이심이 밑받침된다. 서신서의 성령(聖靈)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들도 반드시 함께 증언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영이신 보혜사(保惠師)로서, 이 땅에 오셔서 교회를 세우시고 주의 일꾼들을 부르시며, 예수와 그의 말씀과 삶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를 닮은 인생으로 살도록 지혜와 능력까지 부어 주셔서, 예수께서 꿈꾸시던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건설되도록 도우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설교는 이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폭넓게 증언될 때, 균형과 안정감을 유지하면서-, 우리 가운데 다양한 모습으로 함께 하시는 크신 하나님을 경험하고 섬기게 되며 그의 자랑스러운 백성들로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을 주게 된다. 

 

4)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온전하심의 정체성에 가장 적합(適合)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온전하심을 믿는다. 그의 절대성과 초월성과 영원성도 믿는다. 인간의 그 어떤 증언으로도 그 분의 탁월하신 존재와 능력과 영역을 다 담아낼 수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그런 말만 하면, 우리는 그 분의 신성을 무시하거나 훼손할 수 있다. 그 분의 그런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증언해내야 그의 구원하시는 능력이 온 세상에 발산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그게 가능할까? 그게 바로 삼위일체적으로 계시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집중하면 설명이 가능하다. 

 

성부-성자-성령 하나님은 당신들이 가진 자체 역량만을 가지고 모든 것을 독자적으로 이루려고 하신 분들이 아니었다. 그 대신 삼위(三位)이신 하나님은 상호 완벽하게 협력(協力)하고 의존(依存)하며 조화(調和)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심으로서, 그의 완전하심과 온전하심과 전능하심을 계시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아들과 그의 영에게, 아들이 그의 아버지와 보혜사 성령에게, 그리고 성령이신 하나님이 그를 보내신 하나님과 아드님에게 각각 무한한 신뢰와 협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고 그의 사랑과 구원을 세상에 펼치도록 하나 되신 장면은 그야말로, 우리의 삼위일체 하나님이 얼마나 복되시고, 우리가 접근하며 배워야할 은혜로운 하나님이신지를 여실히 보여준 모습 그 자체였다. 즉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내부 상호 간에 완벽한 질서와 조화를 갖추고 있고, 놀라운 인격과 고도의 지혜와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통하여 드러낸 것이었다. 

 

영이신 아버지 하나님은 자신도 인간도 될 수 있음과 인간을 어디까지 사랑하실 수 있는 지에 대하여 세상에 밝히 알리시고자, 아들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다. 하지만 삼년 혹은 삼십년의 짧은 공생애만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다 보여주실 수 없었던 성자 예수께서는 보혜사 성령에게 당신의 못 다하신 부분을 넘기시기도 하셨다(요14장 참조). 성령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고 택한 백성들을 불러 모으면서 그런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마음과 말씀에 대한 기억과 섬김의 영으로 역사하시고, 그 분들이 계시는 영원한 나라를 보여주시면서, 하나님과 예수가 만민의 주(主)되심을 완벽히 밑받침하였다. 

 

그러기에 이렇게 놀랍도록 협력적으로 하나 되어 일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사람들이나 국가나 교회 공동체는 결단코 독재와 독단주의에 빠져들 수가 없고 민주적(民主的)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서 서로 다른 사람과 단체를 하나 되게 하고 조화롭게 하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게 된다. 세계 대표적인 민주주의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 기독교의 전통위에 서 있다는 특성을 갖고 있다. 그것은 바로 성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지혜에서 얻어낸 산물이라고 보인다. 입법-사법-행정의 건강한 견제와 균형을 가지고, 서로가 하나 되어 건강한 국가를 세워가는 형태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5) 우리 현실에 가장 적합한 선교 신학적인 교회력이기 때문이다. 

 

우리 대한민국과 교회의 현실은 세계 일반이 안고 있는 현실과 몇 가지 차원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나라의 분단(分斷)과 그로 인한 이념 대결로 인한 오랜 분열(分裂)과 불신(不信)의 비극적 담과 늪이 너무 높고 깊다는 점이다. 그 바람에 지금의 우리는 오직 앞으로만 달려갔지, ‘이웃과 함께 가는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은 너무도 빈곤하다. 그 모습은 놀랍게도 우리 개신교의 상황에서는 더욱 절박하기도 하다. 지금 나라의 현실을 보라. 민족의 평화통일을 방해하고 분단을 더욱 공고화시키는 일에 한국교회의 극우(極右)세력들이 앞장서고 있지 아니한가-? 그 바람에 한국교회는 통합과 화합세력이 아니라, 분열 조장세력이 된 것이다. 그것은 서로 하나 되는 훈련을 제대로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실로 부끄럽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모래알처럼 산산 조각난 한국 개신교회의 비참한 현실을 가지고 어떻게 이 나라와 민족을 구원할 것인가? 타 유력 종교에 비해 신뢰도에서 지금의 한국교회는 한참 밀려난 상황이다. 세상이 교회를 외면할 뿐만 아니라, 교회를 걱정하는 시대에 접어들었다. 그 바람에 지금의 한국 개신교회에서는 이 시대를 이끌만한 훌륭한 인물들이 생산되지 못하고 있다. 과거 초기 우리 한국교회와는 판이하게 퇴락(頹落)한 교회의 부끄러운 현실이 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어서 속히 교회가 서로 하나 되게 하는 훈련과 교육이 절실하다. 이것은 서방 세계에서는 전혀 경험할 수 없는 환경이어서, 우리의 새로운 선교와 설교 대책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미세먼지와 각종 쓰레기 산업의 범람 등 실로 종말(終末)을 연상케 하는 지구촌 생태(生態)계의 위협으로 지금 온 나라와 세계가 극심한 고통에 빠져 들고 있다. 뭔가 생태계를 구원할 강렬한 교회의 메시지가 선포되어야할 시점이다. 이 점에서도 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창조하시며 사랑하시는 조물주의 탄식이 얼마나 깊을까-? 창조절기가 중요한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없어도 만들어야할 시점이다. 창조절기는 있어도 되고, 없어도 괜찮은 영역이 결코 아니다. 창조주의 뜻을 앞세워 지구촌에 정의. 평화. 생명의 복음을 전하려면, 창조절기부터 앞세워 가야만 한다. 

 

다른 교회력에 이 절기가 없다고 해서, 우리마저 외면하려고 하면, 그야말로 어리석음의 극치라 본다. 우리가 그리스도론적 교회력 등의 타 절기를 취하면서 우리의 고유한 창조절기를 외면하거나 최소화시킨다면, 세상은 기독교의 성서 그 어디에서 이 창조세계를 구원할 메시지를 들을 수 있겠는가? 심히 경계해야할 일이다. 우리는 이제 창조절기를 통하여 우리의 영원한 아버지를 다시 만나야만 한다(본인의 <창조절에 만난 아버지 되신 하나님> 절기서적 참조). 

 

이런 큰 뜻을 담아낸 교회력이 바로 삼위일체론적 교회력이기에, 이 교회력이야말로 얼마나 감사하고 선견지명을 갖춘 것인가! 이런 탁월한 교회력을 우리의 선배들에게서 전승 받은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 창조절기는 삼위일체 교회력의 끝부분에서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릴 영역이 아니라, 신앙의 첫 부분에서부터 하나님이 세상의 주되심을 강력하게 선포하면서 그의 뜻에 온 세상이 복종하도록 깨우쳐할 신앙이 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민주주의(民主主義)를 향한 열정이 세계에서 남달리 뜨거운 나라 중의 하나이다. 서로 다르지만 서로 하나 되어 조화와 협력, 공존.공영.공생의 나라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란 점에서, 삼위일체론적 교회력은 이 시대에 가장 소중한 메시지의 보고(寶庫)임이 분명하다. 우리의 교회력을 잘 가르치고 익히면, 목회자도 크고 교인들도 굵고 위대한 인물들이 될 것이다.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사는 데, 큰 동력이 될 것이다. 

 

이런 제반 환경들이 우리 교회의 설교자들이 항상 염두에 두어야할 컨텍스트(Context)이다. 이런 절박한 환경들인 컨텍스트들을 말씀과 설교에서 담아낼 교회력이 있어야만 되는데, 그게 마침 우리 교단 한국기독교장로회가 끌어안고 있는 삼위일체론적 교회력에 다 담겨 있음이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분열과 그로 인한 교회 전체의 침하의 요인에 대하여 좀 더 말하고자 한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교회 강단이 이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들 중의 한 부분에만 집중하면서, 자기들에 맞는 부분만을 놓고 그게 하나님의 전부인 것처럼 독점하며 전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 바람에 한국교회에서의 하나님은 성부파, 성자파, 성령파로 갈라져 증언되고 있는 형국이다. 크고 하나이신 하나님을 갈가리 찢어놓고 있음이다. 그 바람에 그런 편파적인 설교에 길들여진 신자들도 심한 영적 불균형에 빠져들어 있어서, 힘을 잃게 되어 자기 교회와 교파를 떠나면,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세상은 물론 그 누구와도 전혀 적응을 못하고 있다. 

 

그 결과로 한국의 개신교에서는 세상과 교회를 이끌만한 큰 인물들이 제대로 생산되지 못하고 있다. 갈수록 영향력에서도 타 종교에 멀리 밀려나 있다. 이 책임이 어디에서 온 것일까? 한국 강단의 책임이 엄청나다. 어느 한쪽에 선다는 것은 보기에는 힘 있는 것일지 모르나, 결과는 분열과 편협과 일부를 조장하는 신(神)을 선보이게 될 뿐이었음을 우리는 경험상으로 충분히 알고 있다. 

 

이런 구조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어서 속히 하나님을 통전적으로 전하는 신인식의 변화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래도 우리 교단 기장이 한국교회에서 세상과 역사를 향한 대안적 기독교세력으로 자리해 온 것은 이런 삼위일체론적 구조의 설교와 교육이 그 밑바닥에 살아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지-, 자평(自評)해 본다. 

 

6) 우리 교단에게 주신 매우 특별한 은사가 바로 이 교회력이기 때문이다.

 

사정이 이런 데도 우리 설교신학의 영역에서까지도 성서를 그리스도론적 교회력이 제일이고 전체인 듯하게 강조한다면, 그것 역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그것은 지금까지의 협소한 틀과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겠다는 뜻이기도 하기에, 매우 진부(陳腐)한 것(?)일 수 있고, 또 그리 새로울 것도 전혀 없음을 말한다. 그러기에 그런 교회력은 또 다른 협소한 접근에 불과하다. 

 

더구나 ‘세계 교회의 대세가 그러하니, 우리도 그렇게 가야만 된다’는 논리와 ‘그게 에큐메니컬한 선택이다’고 하는 논리도 매우 구차하게 보인다. 그런 시각이나 주장은 기장인의 창조적 소수의 길을 찾아 나선 정체성에도 전혀 맞지 않다. 진리란 무엇인가? 대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보다 성서적일 때 결정된다. 에큐메니컬한 것도 내 것의 소중함과 자랑스러움과 독특성으로 모두의 부족을 채우고자 할 때에 빛을 발하는 것이지, 대세에 순응하는 맹목적인 것이 에큐메니컬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이미 놀라운 경험을 한 바 있다. 지난 세계교회협의회 제10차 부산 총회의 주제인 ‘정의. 평화. 생명’이 우리 기장의 선교적 증언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삼위일체론적 교회력이 선사한 탁월한 선교적 안목의 결과이었다. 세계 교회는 어떤 교회를 찾을까? 모두가 똑 같은 교회가 아니다. 교회의 부족함을 채워 줄 능력 있고 살아있는 탁월한 교회를 찾는다. 그런 점에서 기장은 세계교회가 좋아할 교회의 특성을 안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장으로는 답이 안 되어도, 기장으로는 답이 되는 현실이 바로 세계교회 현실이다. 

 

만일, 우리 교단마저 삼위일체론적 교회력을 포기한다면, 세계기독교회는 큰 빛을 잃게 될 것이다. 그것은 개체로 전체를 보려는 시도만 가득할 뿐(그리스도론적 교회력), 전체 속에서 개체를 보려는 시각을 가진 설교신학적 통찰력(삼위일체론적 교회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교회에서 우리 교단이 규모(싸이즈)상 적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한국교회에서 우리는 모두 중의 하나가 아니다. 우리가 있기에, 한국교회가 그래도 이렇게라도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장공의 가르침대로, 살아있는 ‘화살촉’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우리의 고유한 은사요 장기인 이 교회력을 외면하고 포기하려는가? 그 원인들은 많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교회력의 변경을 교회 성장의 문제 차원에서 찾으려 한다면, 그것은 유감이며 슬픈 일이다. 출애굽 공동체인 우리가 가장 좋은 길을 제대로 가보지도 못하고, 누려보지도 못한 체, 애굽의 가마솥을 그리워하는 히브리 백성들의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우리의 아름다운 교회력을 포기하고 RCL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애굽으로 다시 가자’는 붎평에 빠진 히브리 백성의 외침은 아닌지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물론 우리 교회력이 예배와 성서 읽기에 문제와 아쉬움이 있을 수 있다. 그런 점은 깊이 연구해서 보완해 가면 된다. 삼위일체론적 교회력이란 정상의 틀을 우리가 포기한다는 것은 우리를 지구촌과 세계교회에 높이 세워주신 하나님을 향한 배신이 될 것 같아서 두려움이 앞선다. 지금은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은사인 이 교회력을 다시 붙잡고 그 축복을 향유해야할 때이다! 

 

7) 다소 힘들고 좁은 길이지만, 그러나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다 

 

타 교단의 교회력에 의한 설교문들을 페이스 북에서 많이 본다. 그 설교문들 대부분은 한 본문인 경우가 압도적이다. 그게 바로 보수교단 절기력의 현실이다. 절기상의 본문을 택하여도, 한 본문만으로는 그 절기가 담고 있는 깊은 성서의 메시지를 통합적인 시각으로 접하기가 쉽지 않다. 한 본문의 설교는 아무래도, 본문을 말씀에서 말씀으로 밝히고 이어가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합일된 메시지를 찾아내는 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하지만, 우리가 붙잡고 씨름하는 삼위일체론적 교회력은 한 본문 중심을 사실상 거부한다. 오히려 세 본문을 함께 보며 그곳에서 통합된 삼일일체 하나님의 메시지를 찾아내어 그 주일에 주신 주님의 말씀으로 선포한다. 그러기에 훈련되지 못한 설교자들에게는 접근하기가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그 바람에 많은 설교자들이 아예 접근조차 외면하는 현실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 바람에 우리의 강단은 여전히 변화 없고 힘들며 생동감이 고갈되고 있다. 설교자도 신도들도 그렇고 그렇다. 우리 앞에 보물이 가득한데, 그렇게 외면하는 해도 되는지 안타깝다. 그럼에도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이 일은, 지금 우리의 빈곤하기 짝이 없는 설교자의 성경이해와 설교사역을 구원하고, 교회와 신도들과 우리 세상을 다시 살려낼 대안으로서, 이 삼위일체 교회력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때문이다. 

 

감사하고 희망적인 것은, 과거와는 달리 처처에서 이런 교회력 설교에 도전하는 교역자들이 증가하고 있음이다. 어찌 보면, 그리스도론적 교회력을 대안으로 내어 미는 우리 안의 또 다른 시도들도 교회력의 설교들이 그만큼 한국교회 강단에 확장되어 가고 있는 상황 때문에 나온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회력도 교회력 나름이다. 어떤 신학교 출신이냐가 그 목회자의 흐름을 결정짓듯이 어떤 교회력을 사용하느냐는 점도, 어떤 설교를 하고 어떤 신도들을 생산하느냐에 직결되어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부디 우리 것의 소중함과 탁월함에 눈이 뜨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아직 다른 곳들에 눈을 돌릴 만큼의 자체 역량을 축적하지도 못했는데-, 벌써부터 우리 것 대신에 남의 것에로의 회로 변경을 요구하는 일들은 아무래도 지혜롭지 못하다. 부족한 부분은 꾸준히 채워가자. 총회에나 신학교 안에서도 우리 옷에 맞는 보다 발전적인 교회력을 만들기 위한 상설 위원회 모임을 둠도 바람직하다. 나는 몇 년 전에 예장 통합 측에서 자기들 교회력 만들기에 총회가 9년이나 연구한 것을 발표하는 현장도 참관한 바 있다. 그 내용에 나타난 방법상엔 아쉬웠지만, 교회력을 위한 총회적 노력엔 무척 부러웠다. 

 

최근 우리 교단의 몇 젊은 설교자들이 과감하게 삼위일체론적 교회력에 따른 세 본문 설교를 페이스 북에 전문을 올리는 시도하기도 한다. 놀랍고 반가운 일이다. 그리고 본인이 섬기는 말씀목회연구원(www.wpci.kr)에는 매주 세 본문 주일 설교올리기에 많은 우수한 동역자들이 참여하고 있는 일도 한없이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의 교회력 설교는 이제 걸음마 단계이다. 틀이 세 본문이기에, 접근도 결코 쉽지 않다. 그러기에 우리는 보다 많은 만남과 토론과 공동지식을 창조해가는 성실한 과정이 필요하다. 이번의 작은 논쟁과 토론이 교단의 모든 설교 동역자들의 설교지평을 키우는데, 크게 기여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특히 총회에서 교단 목회자 교육에 책임 있는 인사들의 건강한 양식과 그에 따른 책임 있는 행동을 기대하고 싶다. 

                                                                             < 본 글은 총회 회보 제599호(2019.4월호. P.82-89에 게재된 글임을 밝힙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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