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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 "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따른 세 본문 설교 "

관리자 2020-11-11 (수) 17:28 4년전 248  

교회력과 성서일과에 따른 세 본문 설교

                                                          최  부  옥  목 사

                                                                  (말씀목회연구원장)

들어가는 말  :  싸움꾼 예수의 그 마음으로 


지금의 우리나라는 검찰개혁이 화두입니다. 왜 검찰이 개혁의 제1 대상이 되었습니까? 그들이 가진 권력(수사권-기소권)이 통제되지 아니한 최고의 수준에 올라서, 그 오남용(誤濫用)으로 인하여 정치가 왜곡되고 사회정의가 심각히 훼손된 주원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국민 위에 군림한 그들의 행태를 압축한 고사성어(故事成語)인 ‘구교주인(狗咬主人)’이 화제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를 키워 준 주인을 물어뜯는 개’라는 말입니다. 은혜를 모르고, 분수를 모르는 미친개와 같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주인은 그 개를 어떻게 처리해야만 할까요? 데리고 살려면, 당연히 버릇을 고치고 그 행동을 강력히 통제하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예수 시대에도 그 어처구니없는 구교주인의 모습을 생생히 목격합니다(막12:1-8참조).

예수님은 당시 국가종교로서 온 백성의 삶을 강력하게 통제하던 유대교와 대전(大戰)를 치루신 분입니다. 그 모습은 주인이 자기 못된 종들과 싸우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종들이 워낙 못된 행태를 보였기 때문입니다. 대략 다음과 같은 이유들 때문이었습니다 :


1) 당시의 종교는 창조의 주이시요 역사의 주이신 하나님을 성전과 유대 종교라는 제도권 안에만 계신 분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종교 밖인 세상에서는 전혀 만나지 못하게 차단시킨 것입니다. 그 바람에 당시의 유대교는 살아 계신 주님을 구중심처(九重深處)에 안치시켜, 온 세상의 주인 노릇을 못하도록-, 온갖  망극(罔極)한 짓을 했습니다. 


2) 당시의 종교는 말씀의 편식(偏食)으로, 오직 제사종교와 형식종교의 틀에서만 그 하나님을 만나고 보게 하였습니다. 즉 자기들에 편(便)하고, 관심 가는 율법과 제도 부분에서만 부분 발췌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진정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은 아예 없었습니다. 


3) 당시의 종교는 하나님의 본성(本性)이신 긍휼과 자비를 그의 백성들이 아예 체득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 대신 정죄와 채찍질에 능한 무서운 하나님만 강조되었고, 진정 필요했던 격려와 돌봄에는 무기력했습니다. 그 바람에, 그들은 생명과 구원의 종교이어야 할 유대교를 죽음의 종교와 권위와 위엄만 남아 있는 껍데기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4) 당시의 종교는 십계명 중심의 율법의 핵심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두 축의 균형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즉 구원과 영생의 두 축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나로 묶어내지 못하고 철저히 분리시켰습니다. 그 바람에, 아브라함의 후손의 진정한 모습을 무너뜨렸고 상실했습니다. 자기끼리만 모이고 좋아하는 패거리종교와 동호인(同好人)종교로 만들었습니다.


5) 당시의 종교는 참 구원의 길을 제시하지 못하였습니다. 길 잃은 양들(죄인들)만 대량 생산한 종교였습니다. 복음이 통전(通典)하는 에큐메니칼 능력이 부재했습니다. 하늘 생명을 담기에, 그릇이 너무 협소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하늘과 땅, 영과 육, 좌와 우, 상과 하, 강과 약, 동과 서, 남과 북, 유대인과 이방인, 과거-현재-미래, 성부-성자-성령의 세계를 함께 품을 넓은 품(가슴)이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실로,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종교였습니다. 주님의 책망대로, 당장 ‘허물어 버려야만 될 성전’이었습니다(요2:19). 그 바람에, 삼위일체 하나님에게는 유대교가 구원 사역의 주체가 못 되고, 도리어 청산(淸算)해야 할 대상이 된 것입니다. 


O 예수의 오심과 그의 싸움은 바로 이런 종교의 폭력과 오판에 대한 ‘NO-아니요!’였습니다.    십자가는 바로 그런 부정적 흐름에 철저히 저항하고 거부하였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습니다!


☞ 그러면 그런 유대교와 지금의 한국교회의 보편적 실상을 상호 비교하고 대입시켜 봅시다. 우리는 그들과 전혀 다릅니까, 아니면 너무도 닮았습니까? 우리의 목회의 실상은 어떠합니까? 전적으로 그들과 다르기를 바라지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 역시 거의 모든 면에서 심각하게 그들과 닮아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주이신 그리스도 예수는 당신의 종들인 우리를 찾아오실 때, 무엇을 들고 오실까요? 칭찬일까요, 채찍일까요? 


두려울 뿐입니다! 그러기에 보면 볼수록, 지금의 우리의 선 자리는 경계선이요 벼랑입니다. 요즈음은 하루가 다르게 교회와 목회자의 비리와 망가진 행태들이 언론을 도배하고 있습니다. 정말 살아남고 지속가능한 교회와 목회를 위해서는 새 출구가 절실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O 사실 통제되지 아니한 체, 무한 권력이 행사되는 곳이 검찰만이 아닙니다. 내용만 보면, 우리 목회와 설교 현장도 무한 권력(?)이 허용된 곳이기도 합니다. 그 결과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교회가 잘되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사고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목사와 교회의 신뢰도와 강단 설교의 수준이 저질(低質)스러워 졌기 때문입니다. 전광훈 같은 괴물(?)과 그를 맹신하고 추종하는 극우신자들이 날뛰고 대량 생산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흐름과 함께 우리의 공교회들도 하루가 다르게 망가져 내립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절대 대안이 요긴합니다. 건강한 통제장치(統制裝置)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교회와 목회자(설교자)를 건강하고 균형 있게 제어(制御)해 줄 시스템이 절실합니다! 무한 권력이 아니라, 엄격하고 건강한 통제 장치 시스템에 필요합니다. 정말 출구가 절실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인적, 물적인 수량(數量)에 의한 목회 성공’이란 신기루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신, ‘교회다운 교회’로, ‘목회다운 목회로’, ‘설교다운 설교’로 우리의 관심사를 옮겨야 됩니다. 이런 관심의 이전(移轉)만 잘 이루어져도, 우리는 정상적 사역에 진입해 들어갈 것입니다. 


이에 가장 시급히 해결할 부분들을 제시합니다. 우선 내 목회와 설교를, 안전하고 건강하게 달려갈 열차의 양 레일 위에다 올려 세울만한 역할을 하게 할, 두 가지를 제시하고자 합니다.


1) 내 목회(牧會) 운영을 교회력(敎會曆)(절기)를 좇아 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목회가 목회자 개인의 편의적이고 임기응변식의 선택에 의하지 아니하고, 성서의 가르침과 2,000년 교회 역사의 건강한 전통 위에다 올려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목회 전체 여정(旅程)도 권위를 가지면서, 상당한 탄력과 긴장감 속에 안정적으로 진행될 것입니다. 


2) 설교 강단(講壇)의 사유화(私有化)를 절대 거부하는 일입니다. 주의 말씀은 본래 내 마음대로 요리할 수 없습니다. 설교 강단은 목회자의 뜻과 생각을 펼치는 무대가 결코 아닙니다. 강단은 설교자 자신과 온 교회가 함께 복종할 거룩한 무대여야 합니다. 그러려면 목회자이자 설교자인 내 자신부터 강력히 통제하고 제어할-, 그래서 건강한 목회와 설교를 추동할 하드웨어(교회력)와 소프트웨어(세 본문 설교)로 든든히 장착되고 작동되어야 하겠습니다. 


☞ 즉 목회자들의 목회(牧會)는 철저하게 교회 절기들인 교회력(예배력) 중심으로 진행되고, 매 주일 강단의 설교(說敎)는 그 절기를 밑받침하는 성서일과(Lectionary)에 따른 세 본문 중심으로 하는 일입니다! 

(단, 이에 대한 지침은 본 교단이 채택한 삼위일체론적(三位一體論的) 교회력에 의존합니다) 


A. 절기(節期) 중심의 목회 


우리나라에도 24절기가 있습니다. 절기들은 시절을 알리고 변화되는 때를 대비하게 합니다. 성서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도 유월절을 필두로, 큰 세 절기들(무교절-맥추절-초막절) 중심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살아왔습니다. 2,000년 역사를 지녀온 우리 기독교회에도 매년 지켜야할 여러 절기들이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1년의 주기로 편성하여, 세계교회가 아주 오래 전부터 지켜오고 있는 교회의 절기(교회력/예배력)들입니다. 


우리 교단은 세계교회가 채택한 여러 교회력들 중에서, 삼위일체론적(三位一體論的) 교회력을 받아들여서 한 해를 7절기들로 설정하면서 그 절기 목회를 추구해 오고 있습니다. (교단 25주년.1978년 제63회 총회 채택). 그게 어떤 절기입니까? 순서대로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 


☞ 창조절(9월-11월/녹색) – 대림절(성탄 전 4주간/보라색) - 성탄절(성탄일-1월5일 이전까지의 12일간/흰색) - 주현절(주현일인 1월6일부터 성회 수요일까지 4-9주간/녹색) - 사순절(성회 수요일부터 고난주간까지. 주일 제외한 40일 포함/보라색) - 부활절(춘분이후 보름이 지난 첫 번째 주일에 기념한다. 부활주일부터 50일간/흰색) - 성령강림절(부활후 7째 주일부터 창조절 직전인 8월말 주일까지/빨간색) 


☞ 매해의 절기 시작(始作)은 창조절(創造節) 첫 주일부터 입니다(9월 첫째 주일). 

☞ 전체 절기는 다음의 세 계절들로 나누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균형(均衡)을 도모합니다.

- 성부(聖父) 하나님의 계절(창조절-대림절) + 성자(聖子) 그리스도의 계절(성탄절-주현절-사     순절-부활절) + 성령(聖靈) 하나님의 계절(부활절 일부-성령강림절)로 구분합니다.  

☞ 매 절기 시작하는 첫 주일에는, 절기를 맞이하는 성찬식(聖餐式)을 별도로 거행합니다. 


B. 왜 삼위일체론적(三位一體論的) 교회력인가 


기본적으로 성서는 그 구조 자체가 삼위일체적(三位一體的)입니다. 성부의 사역 무대인 구약(舊約)과 성자의 무대인 복음서(福音書)와 성령의 무대인 서신서(書信書)가 66권이란 성경 안에서 나란히 펼쳐지기도 하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삼위이신 하나님의 사역들이 자신의 본령 안에서도 처음부터 서로 얽혀서 통전되어 함께 일하셨다는 데에 있습니다. 즉 구약 안에도 성자와 성령의 사역이 함께 하고 있었고, 복음서 안에도 성부와 성령의 사역이 함께 하고 있었으며, 서신서 안에도 성부와 성자의 사역이 함께 얽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 분 중에 어느 하나만을 전부인 것인 양 증언하게 되면, 하나님의 뜻과 마음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게 되는 큰 오류가 발생합니다. 편협과 편견, 불균형으로 오는 치우침에 빠져서, 하나님의 참 자녀와 제자들이 되는 데에 치명적인 장애를 만나게 됩니다. 


☞ 좋은 예(例)를 소개합니다. 교회의 사도였던 바울은 각가지 이유로 분열에 빠져든 고린도교회를 향한 권면에서, 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특성)들을 명쾌하게 정리해주면서, 서로의 분열을 멈추고 하나가 될 것을 다음과 같이 촉구했습니다. 

“은사(gift-karisma)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service-diakonia)은 여러 가지나 주(主)는 같으며, 또 사역(working)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나심은 유익(=공동이익)하게 하려 하심이라”(고전12:4-7절)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절묘한 역할 분담을 통하여, 당신의 원하시는 일들이 되게 함을 드러낸 증언입니다. 성부 하나님은 무대와 활동의 장(場)을 깔아주시고, 성자 예수 그리스도는 그곳에서 일할 일꾼들을 택하시며, 성령 하나님은 그들에게 재능과 은사를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이 작동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는 삼위(三位)가 일체가 되어 일하시는 매우 모범적 증언으로서, 우리 공동선을 위한 절묘한 조화(調和)의 모습을 보여주셨음을 말합니다!


o 우리 가운데에도 이런저런 이유들로, 우리의 교회력이 아닌 타교단의 교회력을 좇는 설교자들이 제법 있습니다. 주로 미국 장로교회 중심이고 한국에서는 통합측 중심의 그리스도론적 교회력입니다. 이것은 우리 내부의 단합을 위하여서도, 어서 극복해야할 과제이기는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 신학 스승들은 오랜 전통의 그리스도론적 교회력이 아닌 삼위일체론적 교회력을 택하였을까요? 그것은 기존의 교회력이자 ‘통상 축제력’인 그리스도론적 교회력을 개혁(改革)하면서 넘어서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정적인 개혁적 기능들을 소개합니다. 


1) 전통적인 성자 중심의 통상 교회력에 결여된 창조절을 추가하면서, 성부 하나님의 계절을 대폭 보완했습니다. 그 바람에 대림절로 시작되었던 4주간 분량의 ‘성부 하나님의 계절’이란 영역이 대폭 확충되고 보완되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세 계절들이 건강하게 균형을 이루었고, 기존의 성자의 구원사의 영역까지도 더욱 공고히 밑받침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이 점은 세 본문 설교를 통하여 분명히 확인이 됩니다!


창조절기가 자리하게 되면서, 인간과 세계와 역사의 모든 뿌리와 존재에 대한 시각이 활짝 열렸습니다. 하나님-인간, 하늘과 땅, 처음과 마지막, 조물주와 피조물,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 순종과 불순종, 책임과 의무, 꿈과 실재 등등의 실로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삶과 생존의 실존에 대한 눈을 활짝 열어 준 성서를 접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특히 이 창조절기에 만나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요즈음의 지구촌 생태계의 문제와 그 원인과 책임, 그 처방의 지혜와 대안들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절기가 주는 선물은 정말 크고 놀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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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1> 루카스 피셔(Dr.Lukas Vischer)의 기고문, ‘A Time of Creation’(1999.2.9.)에서 그의 글, <‘창조절’을 시작으로 하는 교회력의 재편>을 참조함. 

   

(그는 세계교회 운동의 전면에서 활약한 개혁교회 대표적인 신학자요 운동가이다. WCC의 ‘신앙과 직제’ 실무 책임자 & 세계개혁교회연맹 신학분과위원장, 스위스베른대의 신학부 교수역임. 그는 세계교회 일치를 지향한 각 교단과 교회 전통사이의 지속적인 대화를 추진한 인물)


1997년 오스트리아 그라쯔(Graz)에서 개최된 유럽교회의 제2차 에큐메니칼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이다. 

“우리는 교회들이 모든 차원에서 창조세계의 보전을 교회 생활의 일부로 생각하고 촉진할 것을 권장한다. 한 가지 방법은 콘스탄티노플 총주교(Dimitros)가 해마다 경축하는 것과 같이 공동의 ‘창조일’을 지키며 예배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리적(論理的) 근거는 다음과 같다 : 인류의 미래와 관련된 환경적 위기의 심각성은 이에 대한 교회의 의식 함양을 요청한다. 창조세계 보전에 참여하는 일은 여러 쟁점들 가운데 하나의 쟁점이 아니라, 모든 교회 생활 가운데 가장 본질적인 차원이다(화해, 하나님의 선물 그리고 새 생명의 근원) p.57. 


이 결의문은 10년 전에 이미 총주교가 제안한 것(1989.9.1.)에 대한 뒤늦은 응답이었다. 거기에서 그는 온 세계교회에 보낸 메시지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인간과 우주 만물의 창조주 하나님께 창조세계의 선물에 대한 감사와 그것의 보전과 구원을 위한 호소 등 기도와 간구를 올릴 것을 촉구한다. 동시에 우리는 한편으로는 이 세계의 모든 성도에게 자연 환경을 존중하고 보호할 것을 촉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들도 이를 위하여 국가 차원의 모든 정책을 수행할 것을 촉구한다”(the entire Christian world)에서. 


그래서 루카스는 다음 몇 가지 이유로 창조절기가 교회력 안에 들어야할 당위성을 말한다 : 

① 기존의 교회력 축제들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차지할 자리가 없다.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는 특별한 날이나 절기도 없다. 사도신조나 니케아-콘스탄틴노플 신조의 제2항이나 제3항에만 치중한 결과이다. 이게 과연 합당한 것인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없이, 주현절, 삼위일체 주일을 기념할 수 있을까? 이제 교회력 순서를 제고할 때이다. 신조의 내용이 예배를 통하여 전체적으로 표현되어야만 한다. 


② 그리스도교 절기들은 1년 동안 지속되는 계절의 변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연의 주기가 교회력의 틀거리를 제공한다. 이스라엘의 큰 절기들이 자연의 순환에 깊이 뿌리를 두었잖은가? 유월절 봄 축제에는 양의 첫 새끼를 희생 제물로, 다른 세 절기인 무교절은 처음 거둔 보릿단 제물로, 맥추절에는 처음 구운 빵으로, 초막절에는 포도수확 축제도 드렸다. 안식일과 안식년, 그리고 희년까지도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관련을 맺고 있다(출20:11,레25:4). 


(그런데) 이런 절기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결정적인 사건이 중심에 자리하면서, 그것을 기념하는 주일(主日) 개념을 부활의 날, 즉 사망을 이기신 예수의 승리를 기념하고 축하하며 그의 오심을 기다리는 여러 절기들로 대체되면서, 창조세계의 관계성문제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심지어 하나님의 선물인 빵과 포도주을 주님의 몸으로 나누는 성찬이 창조세계와도 절대 관련되었음에도, 그의 주된 의미가 (오로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친교차원만 강조되는 바람에, 절기의 창조세계 관련성은 밀려나고 말았다. 


③교회력은 한꺼번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 복잡한 발전과정을 통하여 형성되어 왔다. 

‘모든 방면에서 일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한 역사적 시점의 생각과 관점을 반영하고 있다 ---. 매우 불가사의하고 정교하게 짜여진 구조물이다’(한스 클리스토퍼 리우버 & 칼 하인쯔 비리츠의 <예배 핸드북> 1995. 453쪽 참조)

즉 교회력은 확정된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를 위하여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아직도 확정되어가는 과정에 있으며, 모든 세대가 여기에 기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특별히 창조세계를 존중하고 창조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날을 교회력에 포함시키려는 노력은 지극히 합당하다’(동.487쪽). 


④ 그런 점에서, 동방정교회 총주교가 9월1일을 ‘인간과 우주 만물의 창조주께 창조세계의 선물에 대한 감사와 그것의 보전과 구원을 간구하는 날로 예배하자’라고 제안한 의미가 깊다. 그 정교회의 교회력 시작은 9월1일이다. 비잔틴 제국 때에까지 소급된다. 새해 첫째날이 9월23일에 시작되다가 5세기 후반에 9월1일로 변경되었다. 동방정교회는 비잔틴 제국이 패망하여 하나의 유산에 불과한 이 절기를 보전했다. 그리고 총주교의 제안을 통하여, 창조절은 창조주 하나님, 선물로 주어진 창조세계, 그리고 하나님과 이웃 및 창조세계에 대한 우리들의 책임을 회상함으로써 시작되어야 한다고 했다. 


⑤ 교회력에 하나님을 창조주로 기억하는 특별한 절기를 정착시키는 일은 그리스도교 신앙고백에서 근본적인 부분을 차지하는 것에 대한 좀 더 명확한 표현을 부여하는 차원의 문제이다. 곧 창조세계 보전에 참여하는 일은 여러 쟁점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모든 교회 생활의 가장 본질적인 차원의 것으로 받아들여야할 문제로 보아야 하기에(제2차 에큐메니칼 총회), 창조의 절기는 큰 무리 없이 기존의 교회력에 도입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구속사적 큰 사건들(탄생과 성령의 강림 등)을 축하하는 절기들이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모든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모든 시간을 장악하고 계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오늘 우리의 창조세계에 대한 태도는 하나님에 대한 부인과 흡사하다. 만일 창조세계 보전에 대한 책임이 기독교 신앙 전체로부터 분리된다면, 우리의 신앙은 멸시를 받게 될 것이다. 


⑥ 교회력에 창조절 제정하여 넣는 일은, 성탄절-부활절-성령강림절의 의미를 더욱 심화시키고 풍요롭게 하리라. 모든 신조들 내용 그대로를 교회력에 반영하게 된다. 하늘과 땅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나머지 신앙 항목들의 전제 조건이요 배경이다. 창조절을 정하면,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더욱 심화되고 풍요롭게 된다. 


⑦ 창조절은 교회력의 시작이요 마지막이다. 창조절에 우리는 구원 역사의 알파와 오메가를 예배한다. 창조절은 우리에게 우리 역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게 한다. 교회들에게는 좀 더 새롭고 책임적인 삶의 양식을 실천할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과 창조세계의 올바른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 ---. 이것은 하나의 새로운 상황, 곧 하나의 새로운 도전이다. 그것은 인류가 창조세계를 누리고 기념할 뿐만 아니라 창조세계의 고통도 함께 나눌 것을 요청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회개를 촉구한다. 이 회개는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그런 회개일 것이다’ (콘스탄틴노플 총주교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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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러한 창조절이 보완된 교회력이 바로 우리 교단이 채택하여 사용 중인 삼위일체론적 성서일과입니다. 그러기에, 인간과 이 땅과 뿌리와 역사와 현장에 대한 성서적 성찰(省察)을 돕고 있는 창조절기가 담고 있는 말씀들을 접하다보면, 우리 민족과 역사가 안고 있는 제반의 문제들을 더욱 성서의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영역이 보입니다. 

 

예컨대 창조질서 붕괴로 인한 피조물들의 탄식, 해결되지 못한 민족 분열, 이념 대립, 교파 난립, 그리고 주변의 4대 강국 속의 긴장의 한복판에 고립된 위치에 처한 우리의 입장은 정말 절박합니다. 바라 볼 분은 오직 창조주이시고 전능하신 하나님뿐입니다. 이런 우리의 현실을 정확히 대면하면서, 이 모든 대립과 배척과 갈등과 고립의 구조를 넘어서 화해와 일치로 서로 하나로 묶어 줄, 에큐메니칼 메시지와 평화의 복음들이 이 절기에 풍부하게 담겨 있습니다. 


3) 창조절기를 통하여 신앙의 기초 훈련이 이루어진 후에 맞이하는 그리스도의 오심과 영접과 따름과 참여에의 훈련은, 우리의 신앙이 결코 개인주의적인 차원에 머물 수 없게 함을 고백하게 합니다. 당연히 공동체적이어야 하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중심하는 교회와 신도들을 향하게 됩니다. 한마디로, 부르심과 그 소명에 대한 책임에 응답하는 신앙의 훈련 때문에, 하나님과 세상 모두에게 칭찬 받을 건강한 그리스도인들의 양육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창조절이 결여된 절기들은 거의 가 예수와 성령의 역사 중심의 구속사적(救贖史的) 큰 사건들에 집중되어 있어서, 예수와 그에 대한 충성된 믿음을 통한 구원 성취에 집중하게 됩니다. 어찌 보면 그 동안의 한국교회 일반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강단의 흐름과 대동소이합니다. 그 결과가 지금의 한국교회가 처한 수준 낮음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 것이 아닐까요? 이 말은 그 동안의 절기로는 교회의 신앙교육의 한계가 드러났음을 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조절을 수용하여 성부 하나님의 계절을 대폭 보강하여, 기존의 성자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성령 하나님의 교회 사역과 함께 삼위일체론적 균형을 도모하는 강단을 이루자는 것입니다. 본 삼위일체론적 교회력 소개는 총회 회보(2019.4월호)에 올린 필자의 기고문 P.82-89를 참조하기 바랍니다. 


<참고자료.2>

o 왜 우리의 목회와 설교는 삼위일체론적(三位一體論的) 교회력에 따른 것이어야 하나? 

o 왜 우리 교단은 삼위일체 교회력을 택한 것을 자랑이요 긍지로 생각해야 하는가? 


1) 가장 성서적(聖書的)이기 때문이다 

2) 가장 기본적이고 조직력을 가진 큰 교회력이기 때문이다

3) 가장 균형감(均衡感)을 갖춘 설교 형태이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온전하심의 정체성에 가장 적합(適合)하기 때문이다

5) 우리 나라와 교회의 현실에 가장 적합한 선교 신학적(神學的)인 교회력이기 때문이다

6) 우리 교단에게 주신 매우 특별한 은사가 바로 이 교회력이기 때문이다

7) 다소 힘들고 좁은 길이지만, 그러나 반드시 가야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참고자료.3> 

우리가 꿈꾸는 세 본문 설교의 지향점은 우리의 설교가 가장 성서적(聖書的)이고, 가장 신학적(神學的)이며, 가장 신앙적(信仰的)이고, 가장 복음적(福音的)이어야 된다는 데에 있다. 이 네 가지 포인트는 서로 맞물려 있으면서도 그러나 나름대로의 독창성을 가진 영역이기도 하다. 


설교가 성서적(聖書的)이라 함은 자신의 증언(證言)이 철저하게 그 날의 본문의 말씀과 내용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설교의 첫 작업이기도 한데, 이 점이 잘못되면, 그날의 설교는 자기의 뜻과 생각을 전하는 것이 되고, 세우신 주님의 뜻과는 상관없는 것이 된다. 소위 말씀의 사유화(私有化)의 치명적인 함정에 빠져 든 것이다. 


설교가 신학적(神學的)이라 함은 그 날의 말씀에서 설교자의 것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날에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그의 뜻과 마음이 제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어야 함을 말한다. ‘신학은 본래 신(神)의 학문’이기에, 우리의 설교는 인간적 부분보다는 삼위일체 하나님 부분을 보다 더 선명히 드러내도록 집중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고 건강하다. 요즈음 강단이 황폐화된 것은 이런 지침을 상실하고, 오직 인간의 생각이나 상황적 입장만 드러난 데에서 나왔다. 


설교가 신앙적(信仰的)이라 함은 그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빛 앞에서, 듣는 이들이 올바르게 대면할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한다. 그래서 선포된 말씀 앞에서 청중의 마음과 몸과 행실에 하나님과 그의 영의 도전(挑戰)이나 치유나 변화의 흐름의 현상이 일어나게 됨을 말한다. 그래야만 듣는 이들의 삶이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인간으로 자리하게 되기 때문이다. 


설교가 복음적(福音的)이라 함은 설교가 매우 영적이고 신학적이면서도, 그러나 매우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기도 하여서, 누구든 말씀에 충분히 공감되어 응답하기에 당연하고 편함을 말한다. 동시에 그 말씀에는 그 어떠한 난관을 뚫을만한 대안(代案)도 담고 있어서, 새 삶을 결단하고 그 삶에 인도 받게 하는 영적인 능력이 분출될 때, 바로 복음적이다는 것을 말한다. 


C. 성서일과표(Lectionary)에 의한 <세 본문 설교>의 기초적 안내


지금까지 우리는 삼위일체론적 교회력의 역사와 위치와 그 역할에 담긴 여러 가능성에 대하여 탐문하여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교회력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밑받침해 주어야 비로소 절기로서의 역할이 작동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각 절기에는 모두 준비된 세 본문 말씀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내를 따라가면 됩니다. 


하지만 솔직히 이 세계는 상당히 낯섭니다. 두려움도 큽니다. 하지만, 망설이지 않고 희망을 갖고 들어가기만 하면, 거기에 우리는 여태껏 보지도 못하고 경험하지도 못했던 놀랍고 엄청난 하나님과 성서의 새 세계를 만나고 맛보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차원의 목회와 설교가 가능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지금까지의 목회와 설교에 변화와 성장을 원하신다면, 두려움 없이 안내를 받으시고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다음의 몇 가지 차원에서 안내를 드립니다. 


1) 세 본문 설교는 다음과 같은 설교자들에게 적합(適合)합니다 : 


① 매 주일 본문 선택을 자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말씀으로 받고자 하는 심정으로, 그리고 절기에 따라 연속성(連續性)을 가지고 주어지는 본문의 흐름을 소중히 여기면서, 제시된 본문으로 설교하고 싶어 하는 이에게 적합합니다.


② 자기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전하고 싶어 하는 이와, 인간과 역사와 세상 흐름이 하나님의 손길 아래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시각을 품으려는 이에게 적합합니다. 

 

③ 하나님의 말씀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통합된 말씀으로 전하고 싶어 하는 이와, 하나님의 세계를 과거(구약/약속)-현재(복음서/성취)-미래(서신서/실천)라는 삼위일체론적 흐름 속에서 보고자 하는 이에게 적합합니다. 


④ 하나님의 말씀의 깊이와 삼위일체 하나님의 상호 연관성과 의존성을 확인하면서, 삼위 하나님의 역사와 사역을 편중되지 아니하고 균형(均衡)있게 설교하고 싶은 이에게 적합합니다.


⑤ 나의 목회를 하나님의 <말씀이 이끌어주는 목회>가 되기를 원하는 이와, 교회의 선교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란 틀에서 전개하고 싶은 이에게 적합합니다. 


⑥ 말씀의 예화를 성경 안에서 찾고, 이야기식의 설교를 진행하고 싶은 이와, 설교를 단편소설 형이나 수필 형이 아니라, 대하(大河)소설 형으로, 넓고 굵게 그리면서 매 주일을 지난 주일들과의 연속성을 가진 내용으로 탄탄하게 설교하고 싶은 이에게 적합합니다. 


⑦ 내용과 역량에서 큰 설교자와 목회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과, 말씀에 정통하고 일반 설교자와는 차이를 보이는 상당한 식견을 갖추려는 이에게 적합합니다.


⑧ 설교를 성경공부(聖經工夫)용으로도 겸하여 활용하면서 설교를 통하여 이 둘을 함께 소화시키기를 원하는 이에게 적합니다. 


⑨ 교회 성도들을 교회와 세상에 기여할 건강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키우고 싶은 이들에게 적합합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보고, 세상에서의 일을 말씀에서 답을 찾는 훈련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교인을 합리적이고 균형 잡힌 건강한 신앙 양심을 갖춘 성도로 양육하기가 적합하기 때문입니다. 


⑩ 온 교회가 성경 전체에 흐르는 다양하고 폭넓은 신앙(信仰)들과 접목하면서, 하나님의 영적 깊이를 맛보며, 생활 속에서와 절기 속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도록 이끌어 갈 수 있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적합합니다. (☞ 위 책, <교회력 설교에 담긴 기독교 신앙들> P.56-66을 참조 요망)


☞ 창조신앙/ 언약신앙/ 선택신앙/ 해방신앙/ 섭리신앙/ 구속신앙/ 첫열매신앙/ 화육신앙/      고난신앙/ 부활신앙/ 승천신앙/ 재림신앙/ 종말신앙/ 은총신앙/ 영생신앙 (-15종류)


2) 세 분문 설교는 구약, 한 본문 + 복음서, 한 본문 + 서신서, 한 본문의 합(合)입니다

☞ 구약에서의 세 본문은 율법서 + 예언서 + 시가서 중심이었습니다. (예수님/사도들 활용)


3) 세 본문 설교는 제시된 세 본문에 흐르고 관통하는 키워드(key-word/핵심 부분)를 붙잡아야 가능합니다. 도표가 있습니다. (교회력에 따른 세 본문 설교와 실제-최부옥.저/ P.28참조)


                                                                   5f31f138678774170aa64dc3a66ae943_1605083645_25.jpg

* 이 도표 중에서 진정한 세 본문 설교의 핵심을 도출하려면

* A(복음서+구  약의 일치부분)만으로는 안 된다.  * B(구  약+서신서의 일치부분)만으로도 안 된다. * C(서신서+복음서의 일치부분)만으로도 안 된다. * 핵심(核心)인 복음서+구약+서신서가 다함께 관통하여 만나는 부분이 바로 그 날 그 주일에 전할 주제와 메시지이다

  

4) 보다 간편히 접근할 수 있는 세 본문 배치(配置)의 공통적(共通的)인 틀은 이것입니다. 

먼저는 복음서(福音書)에 나타난 성자(聖子) 예수님의 활동 일체를 주목하십시오. 예수의 생애-말씀-활동-관계-관심사 등등을 충분히 소화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구약(舊約)의 내용인 성부(聖父) 하나님의 내용을 확인하십시오. 그 본문은 전적으로 복음서의 내용(예수 사역의 내용)의 근거와 배경을 제공하고 있으니. 바로 그 부분을 찾아내십시오. 그리고 서신서(書信書)에 나타난 성령(聖靈)의 활동 내용도 살피세요. 서신서는 성령이 세우신 교회의 이야기들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활동과 관심사는 성부와 성자이신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를 그 교회 공동체에 전파하고 훈련시켜서, 하나님의 참 백성이 되게 하려는 데에 있음을 확인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들여다보면, 세 본문 내용들을 관통하는 주제와 핵심을 쉽게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날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공급하실 메시지이니, 그것을 잘 정리하여 선포하십시오. 

조심할 일이 있습니다. 혹 설교자가 그 말씀들 중에서, 자기 뜻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부분도 접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히 유혹이니-, 거기에 말려들지 마시고 꼭 이겨내시고, 오직 그 날의 주제에만 집중하여 탄탄하게 전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세 본문 설교 형태는 가장 보편적이고 용이한 접근법이라서, 세 본문 설교를 첫 번째 시작한 설교자들에게 적극 권하고 싶은 유형입니다. 하지만, 삼년 후에 다시 시작될 두 번째 해의 세 본문 설교과정에 들어가서는, 그런 틀의 변경(變更)을 시도해보길 권합니다. 즉, 전체를 이끌어 줄 선도(opennning) 본문을 다음과 같이 변화시켜 보는 일입니다. 

 

성부의 계절에는 구약-복음서-서신서 순으로, 성자의 계절에는 복음서-구약-서신서 순으로, 성령의 계절에는 서신서-구약-복음서 순으로 진행해 볼 것을 권합니다. 그러면 같은 세 본문이라도, 매우 다양한 메시지 포인트를 잡아서 전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이렇게 주(主) 본문 변화의 시도만 잘해도 설교의 폭과 넓이도 크게 향상시킬 것입니다. 


5) 세 본문 설교 실행(實行)에 참고할 부분들 


① 절기 첫 주일의 세 본문은 그 절기 전체의 총론(總論)이자 서론(序論)적인 성격을 띱니다. 그러기에, 첫 주일 분은 본문을 정확히 이해하고자 더욱 각별한 주의를 기우려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그 다음 주일들의 이어짐에 많은 혼란을 줄 수 있습니다.

 

② 세 본문 중에서, 주 본문이 두 가지 주제들을 제시하게 되면, 나머지 두 본문들이 그 주제 들 중의 하나씩을 맡아서, 설명하고 내용을 보완하여 입장정리 하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③ 세 본문의 핵심적 주제를 놓고, 세 본문들이 각각 그 주제 이해를 돕기 위한 구체적 내용과 경우들을 하나씩 맡아서 증거 하는 사례들도 있습니다. 


④ 서신서는 현장 교회의 상황을 담고 있습니다. 교리와 신학의 지침을 담고 있는 것이 많아서, 딱딱하고 어렵게 만 인식하기 쉬운데, 그것은 그 거론된 주제가 그 교회의 문제와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고, 또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하려고 한 것이라는 점을 먼저 인식하고 접근하면 됩니다. 알고 보면 바로 우리 교회 이야기도 됩니다. 


⑤ 종종 세 본문의 핵심적 주제들이 여러 가지가 나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선별해야할 순간도 있습니다. 그런 때는 어떻게 좁혀서 정해야 할까요? 이전 주일들의 내용을 참고하면 도움이 됩니다. 연속성(連續性)이 되는 부분을 우선적으로 택하여 집중하시면 됩니다. 


⑥ 자신에게 익숙한 본문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합니다. 남은 두 본문의 내용과 연결 상의 조율이 되어 있는 지가 관건입니다. 혹 셋 중에 하나가 정 연관성을 찾지 못하여, 그것을 제외하고 남은 둘만으로 설교를 마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자칫하면 좋지 못한 습관이 될 것이고, 그날에 주신 중요한 메시지가 실종(失踪)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더욱 자료 연구(硏究)와 반복적 읽기와 묵상을 해야 합니다. 


⑦ 설교자는 글자나 문자의 내용으로만 승부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 말씀들을 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하는 데에도 더 열심 해야만 합니다. 깊은 묵상(默想)이 필요한 것이지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서 나온 설교는 그 어떤 문자연구로 나온 설교보다도, 훨씬 더 청중들에게 감동과 깨달음과 은혜를 안겨 줄 것입니다. 


⑧ 세 본문 설교를 위하여 주변의 동역자들과 설교자들이 함께 모여 연구하고 토론하십시오. 공동의 관심사를 위한 대화를 하게 되면, 반드시 놀라운 시너지 효과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목회연구원> 홈페이지(www.wpci.kr) 방문을 권합니다. 본문을 보는 시각과 설교의 사례도 접하게 되면서, 설교자의 수준을 크게 향상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⑨ 세 본문 설교의 시간(時間) 길이 문제로 접근을 아예 기피하는 설교자들이 있습니다. 이해는 됩니다. 하지만, 수준(水準) 높은 설교를 듣게 되면, 교인들은 충분히 인내하게 된다는 것을 양지(諒知)하십시오. 그러면서, 목사의 설교 변화에 크게 놀라게 될 것입니다. 시간문제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습니다. 연구원의 홈페이지 도움을 받으시면 좋습니다. 핵심 파악과 내용 숙지만 잘하시면, 20-30분 설교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⑩ 부단히 자신을 일깨우고 변화와 함께 발전시키면서, 선한 영향력을 통하여 동료들과 교회에 도움을 주는 이들이 될 것입니다. 은퇴와 퇴임 이후에도 전문가로서 강건히 쓰임 받을 존재가 되는 선물도 덤으로 안겨줄 사역자가 될 것입니다. 장수 목회의 길이기도 합니다. 


D.  나가는 말

우리의 설교는 꾸준히 성장(upgrade)되어야만 합니다. 현상 유지는 안 됩니다. 현상유지는 곧 퇴보(downgrade)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설교의 발전은 단순히 설교자의 수준만의 상승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설교를 하늘의 양식으로 계속 먹고 사는 전체 성도들과 교회의 생명과 가치 상승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담대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목회와 설교에 보다 엄격한 통제장치를 마련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구교주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존경하는 설교 동역자 여러분, 이제 우리 강단 변화에 따른 염려나 두려움을 벗어버립시다. 그리고 설교자와 교회 목회의 진보를 견인(牽引)해 줄 절기중심 목회와 삼위일체론적 성서일과에 따른 세 본문 설교에 담대하게 참여합시다. 나의 목회와 강단 사역을 더 이상 내 인간적 방식으로 하지 말고, 2,000년 교회 전통에 기반한 교회력과 성서일과 위에 굳게 올려 놉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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