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하게 하시는 예수
2018년 1월 21일 왕하4:1-7/ 요일5:1-12/ 요2:1-11 주현절셋째주일
우리나라가 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이 1위입니다. 가계부채, 노인빈곤, 흡연율, 접촉사고 1위, 보행자, 어린이, 노인 교통 사망률 1위, 이혼증가, 결핵환자, 낙태, 사교육비, 독주 소비율 1위입니다. 최하위도 많습니다. 최저 임금, 어린이, 청소년 행복지수 최하위, 출산율 최하위 등, 50개 분야에서 1위 아니면 최하위입니다. 자살률이 제일 높다는 것은 무엇보다 삶의 질과 만족도가 가장 낮다는 말이 아닙니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많으니 자살률이 높은 것이지요. 그래서 잔치 중의 잔치인 결혼잔치가 없어지고 아이들 출생, 백일, 돌잔치가 줄어들고 자식들이 없다보니 잔치해 줄 사람은 적고 살기도 힘들어 회갑, 칠순, 팔순잔치가 시들해졌습니다. 살맛나고 신나는 잔치가 뜸해지고 정말 좋은 일, 기쁜 일, 춤추고 노래할 일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잔치 집에 가신 예수
하나님의 나라는 잔치하는 나라입니다. 날마다 잔치하는 날이요 모든 것이 감사와 기쁨의 축제가 되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말씀하시면서 잔치의 비유를 많이 들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의 첫 사역을 가나 혼인잔치 집에 가심으로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삶의 감격을 상실해버린 살맛 없는 세상에 삶의 감격, 참 삶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기 위해 오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제 잔치합니까? 사람들은 가장 가치 있는 것을 얻었을 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을 성취했을 때, 가장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이 있을 때 잔치를 배설합니다. 큰 기쁨은 함께 나눌 때 더 큰 기쁨이 되기 때문입니다. 큰 것을 성취한 사람은 큰 잔치를 베풉니다. 가장 좋은 음식을 풍성하게 만들고, 이웃들을 초청해서 마음껏 먹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그 기쁨을 나눕니다. 잔치에 오는 사람은 가장 극진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리고 가장 기쁜 마음으로 찬치를 베푼 사람을 축하합니다. 그리고 기쁘고 흡족한 마음으로 집에 돌아갑니다. 신기합니다. 큰 돈쓰고도 행복하고 잔뜩 나누어 주는데 기쁩니다.
잔치에 위기가 오게 된 진짜 이유
예수님이 그 모친 마리아와 함께 참여한 가나의 혼인잔치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습니다.(요2:1-11)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다른 음식은 신속하게 모자란 부분을 보충할 수 있습니다. 떡은 금방 찌거나 구워내면 되고요 다른 요리도 바로 만들 수 있어요. 그러나 포도주는 그렇게 안 됩니다. 최소한 일 년 전부터 담아놓고 준비해야 합니다. 떨어지면 대체할 방법도 보충할 방법도 없습니다. 이곳저곳에서 포도주를 보내달다고 요청이 들어오는데 공급할 포도주는 없습니다. 하인들은 우왕좌왕합니다. 흥겨웠던 잔치에 위기가 왔습니다. 흥은 깨지고 큰 소리가 나고, 불평소리가 들리고, 갑자기 분위기가 험악해집니다. 기분 좋게 잔치를 열었는데 잔치한 사람도 기분 상하고 손님들도 불평하며 돌아가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가나 혼인잔치의 위기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포도주가 떨어짐으로’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잔치의 위기는 항상 잔치판을 깨는 ‘사람’ 때문에 생깁니다. 왜 포도주가 떨어졌을까요? ‘혼주’가 손님의 수를 정확하게 예측하지 못해서 포도주의 양을 적게 준비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혹은 예상보다 ‘손님’이 많이 왔었든지, 아니면 포도주가 맛이 좋아서 술꾼들이 정도 이상으로 많이 마셨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포도주가 무슨 잘못인가요? 양을 적게 만든 사람들이 잘못이고, 없으면 없는 대로 웃으면서 일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잘못이지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포도주가 떨어지면 포도주가 없다고 포도주 타령만합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사람입니다.
어릴 적에는 마당에 포장을 치고 멍석을 깔아 잔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항상 호사다마라고 크고 작은 싸움이 났습니다. 술이 많으면 많이 먹고 취해서, 부족하면 술 작다고 시비 걸다가 싸움이 났습니다. 바사 왕 아하수에로도 그랬습니다. 그는 무려 180일간 잔치했고 그 큰 잔치를 끝마치면서 일주일간의 ‘끝내기 잔치’까지 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가 술 취한 왕의 요구를 거절하면서 잔치의 흥은 깨졌고 결국 흥이 깨진 잔치로 인해 왕후는 폐위되고 말았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지나쳤고 그 아내는 지혜롭지 못했습니다. 오늘 구약본문 왕하4:1-7의 말씀에도 가난한 과부의 가정에 닥친 삶의 위기도 생각해보면 사람 때문입니다. 대책 없이 빚만 잔뜩 지고 세상을 떠난 ‘선지자의 생도’ 때문이기도 하고 두 아들을 노예로 삼겠다는 욕심 많은 ‘채주’ 때문이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그 당시 예언자들의 소리를 듣지 않았던 악한 시대, 예언자들과 그 생도들이 끼니 걱정을 하며 살아야 했던 불신앙의 시대와 패역한 사람들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돈이 없어서 불행하고, 집이 없어서 힘들고, 좋은 차가 없어서 우울하고, 좋은 직장이 없어서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것 때문에 인간은 불행한 것일까요? 돈 많은 사람도 자살하고, 큰 집 사는 사람도 불행하다고 하고, 좋은 차 있어도 늘 우울해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돈 적게 벌어도 웃으면서 살고, 작은 차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작 우리 인생의 잔치판을 깨는 것은 항상 타락한 사람입니다. 불행의 원인은 바로 불의한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새 잔치의 기쁨을 회복하시는 예수
정말 다행입니다. 그 위기의 가나 혼인잔치자리에 예수님께서 계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계셨던 분,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온 세상을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기 결혼잔치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한 그분이시라면 이 위기에 처한 잔치자리를 다시 한 번 새롭고 흥이 넘치는 잔치자리로 재창조하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을 읽는 사람들은 즉시 이 위기를 일거에 새롭게 변화시키시는 예수님의 놀라운 사역을 가슴 두근거리며 기대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하실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기도 전에 그 모친 마리아가 주도적으로 이 난국에 대한 해결의 문을 열기 위해 앞으로 나섭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구나!” 우리가 늘 위기 앞에서 취해왔던 삶의 방식으로 접근 한 것입니다. 자신이 이 난국의 해결자로 나서서 그 아들 예수에게 “이 난국을 수습해보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행하지도 못할 일을 계획해 놓고 모든 일의 주도자로 나서서 행하다가 벽에 부딛치면 불평하고 낙심하다 “하나님 당신이 이 일을 어떻게 좀 해 보라”고 명령하지 않습니까? 마리아는 지금 자신 앞에 계신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 친히 행하실 놀라운 일을 기대하거나 전능하신 그 분이 친히 나서서 이 어려운 난국을 수습하고 새 일을 행할 것에 대한 믿음으로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지금까지 대해 온 아들로서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2:4) 오래 전 그 아들을 잉태할 때, 그 아들이 “우리의 구원자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나님께서 이미 알려 주셨던 그 말씀이 번쩍 생각났습니다. 몽롱한 취기가 확 깨듯 내 앞에 서있는 그 아들이 내 말에 고분고분할 분이 아니요 참 하나님의 아들, 전능하신 분이심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 이분은 내 말대로 행하던 이전의 그 아들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스런 아들이요 참 창조의 주로서 그의 시대를 열어갈 분이시라는 것을 아는 순간, 마리아는 돌연히 그의 생각을 180도 바꾸었습니다. 이제부터 하나님의 아들, 우리의 구원자 예수로 그를 대한 것입니다. 그는 온 만물의 창조자 우리의 주 앞에서 그의 말씀과 명령을 듣고자 했고 그대로 따르고자 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절) 그리고 그 때부터 놀라운 새 창조의 일, 잔치의 위기를 새 찬치 자리로 만드시는 일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창조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기의 잔치 집을 신명나는 잔치 집으로 재창조하시고 새롭게 만드시는 일은 바닥난 포도주를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먼저 인간을 새롭게 하심으로 시작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리아가 새롭게 되기 전에는, 그 집 하인들이 새롭게 되기 전에는 예수께서는 그 잔치 집의 위기에 개입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마리아와 그 아들이 아니라 창조와 구원의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여 종 마리아의 관계로 새로워 질 그 때, 손님과 하인들의 관계가 아니라 참 통치자, 참 주이신 분과 그 앞에 순종할 종들의 관계로 새로워 질 그 때, 비로소 참 창조주께서 잔치의 위기에 개입하셔서 새 창조의 사건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이 놀라운 새 창조는 우리가 주도적으로 행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이 주도적으로 일하시는 방식으로 이루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면서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이 앞서시고 우리는 뒤 따르며 주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는 그 말씀에 순종하면서부터 새 역사는 시작됩니다. 이 놀라운 새 창조는 남의 포도주를 얻어오거나 이미 포도주로 채워진 항아리를 찾는 게 아니라 눈앞에 있는 빈 항아리를 전혀 새로운 새 포도주로 채우심으로 이루셨습니다. 우리를 개선하고 우리를 바꾸는 게 아닙니다. 전혀 새로운 존재로 새 피조물로 만드십니다. 포도주와는 물리적으로 전혀 상관이 없는 물로 새 포도주를 만드셨습니다. 물은 물일 뿐 입니다. 물은 얼음이나 수증기는 되도 포도주는 안 됩니다. 포도주도 물이 되지는 않습니다. 만일 포도주에 물이 섞이면 그 포도주 버립니다. 물과 포도주는 비슷한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시려는 나라는 새 하늘 새 땅입니다.(계21:1) 새 예루살렘입니다. 새 생명의 나라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예수님이 새롭게 창조하시는 나라는 그 분 혼자 이루시지 않습니다. 우리와 함께 우리를 통하여 이루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고(요2:7) 엘리사는 그 과부에게 빈 그릇을 빌려오라고 합니다.(왕하4:3) 하늘에서 떨어지는 기적과 복권처럼 어쩌다 맞아 떨어지거나 불로소득처럼 굴러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수고와 땀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공짜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 바쁜 시간에 포도주와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빈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시고(요2:7) 엘리사는 빌려온 그릇을 가지고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놓으라“(왕하4:4)고 명합니다. 순종할 만 한 것을 순종하는 것은 참 순종이 아닙니다. 할 수 없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참 순종이 아니겠습니까? 이용규 선교사의 책 “내려놓음”에는 몽골소녀 “벌러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몇 달 전에 어느 날 예배드리는데 벌러르가 땀으로 뒤범벅이 된 채로 들어옵니다. 벌러르는 예배드리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녀는 소를 찾으러 여기 저기 돌아다녔지만 예배시간이 되기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배시간이 되자 소 찾던 일을 그만두고 들판을 가로질러 교회로 달려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자 마자 교회 밖에서 소 울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니라 교회로 먼저 찾아 온 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생명
요한 서신의 말씀(요일5:1-12)은 그리스도인의 승리의 원천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부터 나온다고 말씀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자들은 누구나 세상을 이깁니다. 우리가 반드시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성령이 보증해 주십니다. 파탄 난 이 세상, 포도주 떨어지고, 채주가 두 아들을 노예로 삼으려 하는 이 위기의 세상을 돌파해 나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지혜와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겨 낼 수 있는 것은 예수 안에 있는 생명(조에), 죄와, 세상과 죽음을 이기신 참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생명은 추위도, 언 땅도 이기고 싹을 틔웁니다. 생명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몫을 다합니다. 참 생명은 죽음을 이깁니다. 참 생명은 광야에서도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이 생명(조에)을 받아야 세상을 이깁니다. 위기의 세상을 잔치하는 세상으로 바꿀 수가 있습니다. 좋은 환경이 아닙니다. 어떤 고난 중에도 노래 할 수 있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