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을 성취하신 예수
2018년 2월 4일 사61:1-9/ 행4:5-12/ 눅4:16-30 주현절다섯째주일
수유리 신학생시절, 긴급조치위반으로 오랫동안 서울구치소에 구금되어 재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긴급조치 위반 사범은 중요 범죄자로 취급되어 노랑색 ‘요시찰’ 표지를 수감번호 위에 부착하고 수갑 차고 포승줄에 결박당하여 재판받으러 다녔습니다. 그때가 아마도 12월 크리스마스가 가까웠던 시기였던 것 같습니다. 호송차 차창 밖으로 눈이 내리고 있었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거리에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청춘남녀들은 서로 팔짱을 끼고 활기차게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결박된 손 위로 뜨거운 눈물은 쉼 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 냥 밖에만 나갈 수 있다면, 저 자유의 거리를 마음껏 거닐 수만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저 눈 오는 거리에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원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머지않아 자유의 몸이 된다면 반드시 이곳에 돌아와 오늘의 이 거리를 다시 한 번 걷고 싶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는 지난 36년간의 일제식민통치의 상처가 아직도 깊이 남아있어 순간순간 솟아나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애굽의 노예생활에 대한 아픈 기억, 그리고 바벨론 포로생활에 대한 뼈아픈 상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애굽에서 해방되고 자유를 얻어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자랑스러운 나라를 세웠지만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지 못해 또 다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70년 동안 나라를 상실한 채 낯선 땅에서 살아야 했던 그 수치와 고통은 잊혀 질 수 없는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희년을 상실한 유다
남왕국 유다가 망하고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어 낯선 땅으로 끌려가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역설적으로 그들 자신이 종 되었던 사람들을 자유케 하여 본래의 신분을 회복시켜주고, 토지 소유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며, 모든 부채를 탕감해 주라는 하나님의 명령, 곧 “희년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렘25:9)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애굽의 종노릇에서 해방 받아 세운 이스라엘 왕국은 그 누구도 종으로 삼을 수 없고 어느 누구의 자유도 억압할 수 없는 나라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희년 법”(레25장)입니다. “희년 법”은 불가피한 이유로 땅을 팔거나 자신의 몸과 노동력 외에는 담보할 것이 없는 위기에 내 몰린 사람이라 할지라도 ‘희년’이 되면 다시 자신의 땅을 되돌려 받고 노예로부터 벗어나 본래의 신분이 회복되는 하나님 나라의 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법을 지키지 않았고 그들은 본래 애굽의 노예 같은 삶으로 되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종들을 놓아주지 않아서 종이 되었고, 토지를 본래의 소유자에게 돌려주지 않아서 낯선 이방 땅으로 강제로 잡혀 갔으며, 모든 부채를 탕감해 주라는 하나님의 법을 어김으로 하나님께 진 부채를 70년 동안 다 갚기 전에는 포로에서 돌아 올 수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죄와 허물로 인하여 유다는 다시 포로가 된 것입니다. ‘희년’은 있었으나 그 ‘희년을 이룰 힘’이 없었습니다. “희년 법”은 있었으나 “그 법을 지키는 사람”은 없었고 “희년 제도”는 있었으나 “희년의 삶”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희년을 주시는 하나님
유다가 희년 법을 준수하지 못했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결코 포로생활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없었을 때, 하나님은 또 다시 그 불의한 백성들을 자유케 하시는 “희년”을 이사야를 통해 선포하십니다.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사61:1-2) 선포는 최고의 권세자가 내리는 최종적인 명령입니다. 그 명령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하고 결코 되돌릴 수 없으며 누구도 불복할 수 없습니다. 그 선포대로 되어야만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온 땅의 통치자 하나님은 고통과 절망의 포로로 붙잡혀 있는 그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희년’을 선포하십니다. 마치 대통령에게 위임된 사면권으로 한 사형수에게 “사면령”을 내려 특사로 풀어주는 것처럼 만 왕의 왕이신 하나님께서 친히 바벨론으로부터 그 백성을 구원해 내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전적인 은혜입니다. 백퍼센트 하나님 편에서 하나님 스스로 이루시는 구원의 은총입니다. 마치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 우리는 꿈꾸는 것”(시126:1) 같았을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희년’을 성취할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먼저 받아야 할 치유의 은혜
하나님께서 바벨론 포로들을 돌려보내실 때, 어느 날 갑자기, 돌연히, 상상하지도 못했던 방법으로, 전적인 은혜로 돌려보내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마음의 상처’ 때문입니다.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사61:1 하) 억압받은 분노가 남아 있으면 언젠가는 그 분노로 누구에게 인가는 보복합니다. 깨지고 다치고 찔린 상처는 사라지지 않고 내재해 있다가 언젠가 돌출되고 다른 방법으로 보복합니다. 그래서 싸움과 분노와 보복이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치유의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 유다백성들의 마음은 치유불가능의 상처로 가득했습니다. 포로생활로 인한 상한 마음, 포로라는 절망감(1절), 무엇보다 자신은 갇혀있는 포로라는 의식(1절)이 그들을 지배했습니다. 실패했다는 상처는 새 일을 행하는 데 항상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이러한 상한 마음과 슬픔은 어떻게 치료될까요? 무엇보다 지금까지 우리가 받았던 상처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은혜를 경험해야 합니다. 이 세상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치유의 은총이 임해야 합니다. 이 땅의 위로, 긍휼을 초월한 전혀 새로운 치유의 은총이 우리에게 임해야만 합니다.
요셉에게는 상처가 없는 걸까요? 형제들의 쓰라린 배신으로 애굽의 노예가 되고,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이유로 죄인이 되어 감옥에 갇혔는데도 총리가 된 요셉에게는 그 아픈 상처의 흔적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충분히 납득이 가는 부분이 있습니다. 요셉은 놀랍고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죄수의 자리에서 총리의 자리로, 노예의 자리에서 다스리는 자리로 올라가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노예로 팔려간 것과는 상상할 수 없는 복을 받았지요! 감옥에 간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눈부신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한순간에 모든 상처가 치유되지 않겠습니까? 밭을 갈다가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기꺼이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팝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니까요!
은혜의 해, 보복의 날(눅4:16-21)
유다백성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포로에서 자유를 얻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바벨론이 무너지고 페르시아가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가 첫 칙령을 내리는데 “유다백성들의 귀환에 대한 명령”을 내리는 겁니다. 경천지동할 일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장차 일어날 가장 큰 구원의 날에 대한 예고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해”(희년, 사61:2)를 선포하러 오셨습니다. 희년(50년 째)이 오면 종들은 자유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오고 잃었던 토지는 다시 돌려받으며 모든 부채는 탕감을 받습니다. 상실했던 모든 소유와 신분을 완전히 회복하는 해가 “은혜의 해”입니다. 주님이 가시는 곳마다 병자가 치유되고 맹인이 보고 죽은 자가 살아났습니다. 회복의 해, 희년이 성취된 것입니다. 노예가 본래의 자유를 얻어야 그 상처가 치유되지 않겠습니까?
한 목사님이 학생들을 데리고 동해안으로 여름 수련회를 갔는데 학생 중 하나가 깊은 곳에서 수영을 하다 익사했습니다. 그런데 그 익사한 학생이 목사님의 독자 외아들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안고 한없이 울다 고향으로 내려왔습니다. 고향교회 마룻바닥에 앉아 새벽마다 울었습니다. 어느 날, 홀로 남아 기도하던 목사님에게 주님의 음성이 너무나 또렷이 들렸답니다. “네 독자는 수영하다 익사했지만 나는 내 아들을 너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큰 충격이었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한 순간 내 슬픔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 사랑을 알았고 그의 새로운 목회, 눈물과 감격의 목회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상처로부터 완전한 치유를 얻으려면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우리가 받은 상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은혜와 함께 보상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보복의 날”(보상의 날, 사61:2/63:4)을 선포하십니다. 보복이란 말은 “원수를 갚아는 일”이요 “억울한 일을 듣고 보상해준다”는 말입니다. 포로와 갇힘에서 자유를 얻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슬픈 자에게 화관을, 재대신 화관을, 슬픔대신 찬송을 주어(사 61:3) 요셉처럼 그 받은 상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을 누려야 모든 아픔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행4:5-12)
오직 치유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와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 분은 오직 우리를 치유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유일한 분이십니다. 마약은 처음에는 대가없는 기쁨, 희생 없는 쾌락을 주지만 마약은 하면 할수록 더 공허해지고 불안해지고 더 크고 끝없는 쾌락을 탐닉하다 사랑을 잃고 관계가 깨지고 하나님을 잃습니다. 그러나 가장 값진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을 통해 주시는 은혜,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통한 평안, 부활의 능력을 통한 치유와 회복을 받은 우리는 이제 우리의 사랑과 희생 섬김으로 다른 사람을 회복시키고 치유에 이르게 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 이웃을 치유하고 살려내야 합니다.(행4:12) 예수님은 엘리야 시대에 온 땅에 흉년이 들었을 때 수많은 과부 중 오직 사렙다 과부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눅4:25-27) 왜요? 먼저 가난한 선지자를 섬기고 살리려 했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살리고 섬기고 위로하는 것이 바로 나를 살리는 일입니다. 먼저 병든 자들이 회복되고 자유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일어서서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으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사61:4) 우리가 변해야 환경이 변하고 이웃이 변하고 세상이 변합니다. 또한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이방사람들이 돌아와 우리의 양떼를 치고 봉사자가 되고 포도원지기가 될 것입니다.(사61:5-7)
참 사랑은 사랑을 줄 때 받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로하다 위로받게 되고 원수를 사랑하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귀한지 알게 됩니다. 용서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용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진정한 용서를 경험하면서 이웃을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희년의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희년의 사랑을 베풀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 희년의 사랑을 베푸는 사람만이 진정한 하나님의 희년의 감격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