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존경하고 사랑하는 목회 동역자 여러분을 이 귀한 자리에서 만나 뵙게 되어서 무척 반갑다. 나는 이 자리가 우리 하나님의 크신 인도하심이 아니고서는,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자리라고 생각한다. 목회와 성도 돌봄이라는 이 무거운 하늘 멍에를 매고, 노상 바쁘게 살고 있는 여러분이기에, 나는 이 시간에 어떤 내용으로 모실 것인지를 두고, 많은 고민과 기도를 해왔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을 열기 위해, 먼저 여러분께 몇 가지 질문을 던지려고 한다. 우리 지금의 목회 환경은 이전과 비교하여 좋아졌는가, 힘들어졌는가? 특히 지금 온 지구촌에 시대 변화의 엄청난 주역으로 등장하여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 거세게 파고들어 온 인공지능인 AI 라는 새 물결이 우리 교회와 목회 환경에 어떤 영향을 줄까? 도움이 될까, 오히려 곤경에 빠뜨릴까? 대체 AI를 어떻게 상대하면 좋을까? 메시아처럼 받들어야 할까, 바벨탑의 새 모습으로 볼까?
혹 도움이 된다면, 그러면 우리가 이제껏 금과옥조(金科玉條)로 받들며 지켜온 하나님의 말씀들, 예컨대 예수님의 지시인 ‘좁은 길로 가라’는 지침과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선교를 위하여 목숨을 걸고 취해왔던 ‘한 사람이라도 더 얻기 위하여 자신을 내려놓고 사람에게 들어갔던 그 모습’은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무엇보다도 우리의 최종 목표인 새 하늘 새 땅은 과연 누가 어디에서 열어 줄까, 여전히 창조주 하나님일까, AI란 화려하게 등장한 새 메시아일까?
o 마침, 오늘의 신구약 본문에는 새 하늘(new heaven)과 새 땅(new earth)이 열릴 것을 예고하는 말씀들이 가득하다. 이는 기존의 첫 번째 것들인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면서, 얻게 된 결과물이다. 이것은 단순히 개혁이나 갱신 수준이 아니라, 질량(質量)에서도 완전히 이전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것이 나타나면서, 새 시대의 기쁨과 희망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임을 말해 준다. 그렇다면, 여기에서의 관심할 점은, 이런 놀라운 세상이 열리게 된다면 그것을 누릴 인물은 과연 누구냐는 점이다.
미래(未來)는 분명 꿈꾸는 자의 것이다. 과거나 현재에만 붙들려 사는 자에게서는 그런 변화된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런데 사실 그 미래의 실체가 어떤 것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안다면, 오직 처음과 나중의 주되신 창조주 하나님뿐이다(계21:6). 그러기에 창조주가 열어 주시려는 미래를 현재의 사람이 알 수 있으려면, 방법은 하나이다. 그것은 바로 그분의 신령하고 놀라운 영이신 보혜사 성령(聖靈)의 감동과 충만케 하심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예언자나 선지자들을 보라. 그들은 AI가 없었던 옛 시대에 그 초(超)인지(認知)적 능력을 행사하신 이들이었다. 그러면 그들의 그 신비한 미래를 예측하는 초 인지력은 어디에서 어떻게 얻었을까?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신령하신 성령이셨다. 성령에 접하게 되면, 그는 성령이 제공하는 놀라운 능력에 힘입어, 하나님의 미래를 전했고, 그의 능력도 행사하면서, 당시의 무지한 집단과 어둠의 시대를 일깨웠다. 물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하여 어둠의 백성들을 일깨우셨다.
지금이란 시대는 분명히 AI 인공지능 시대이다. 컴퓨터 반도체의 신비한 핵심 매체인 인공지능이 이제 어느덧 현대인의 두뇌와 가슴에 파고들어서 자리 잡았다. 그래서 알지 못하는 것들을 알게 해 주고, 그것도 순식간에 설명도 해 주며 방향도 제시한다. 사람이 그것에게 질문만 적절하게 하면, 그를 통하여 자기가 하고 싶고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게 채워 준다. 비서치고는 완벽한 비서다. 그 바람에 현대인은 그 AI 의존도가 나날이 깊어지고 있다.
그러기에 AI를 잘만 사용할 수 있다면, 누구나 큰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개인 일정 수립이나, 가정 및 교회 목회 활동, 설교 작업, 심지어 의술이나 재판, 국가 정책 수립이나, 나아가 나라 간의 전쟁과 상대방을 향한 공격하는 일까지도 AI에 의한 것이 될 정도이다! 이런 점에서, AI는 개인이나 집단을 위한 무한대한 이기(利器)가 되었다. (이런 현상에 대하여 얼마 전 연세대 최영준 교수는 그의 컬럼에서 매우 의미 있는 분석적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곧 오늘의 현대인은 이미 인간 사회 전 영역에서 인간을 닮은 휴먼노이드(Human-oid)인 로봇을 지나, 아예 기계를 쫓아가고 그의 지시를 따라 움직이게 된 인간들인 머시노이드(machin-oid) 시대에 접어들고 말았다. 이는 인간은 이미 자신이 만든 AI의 노예 수준에 진입했음을 말한다. 이는 인간 사회의 주역이 이미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현상 때문에, 인공지능 창안에 앞장섰던 인물들이 전혀 다른 주장을 편다. 곧 지금은 잠시 개발을 멈추고, 인간의 통제를 받는 기계가 되도록 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때가 이미 지났다고 본다. <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라는 책을 쓴 마크 그레이엄은 그 점에 대하여서도 이렇게 말할 정도이다. 곧 ‘기계가 우리를 닮아갈수록 우리는 기계가 되어 간다’.
o 보다 큰 문제는 이런 물결에 우리 창조주를 믿고 선포하는 교회까지 휘말려 들었다는 점이다. 설교자들이 인공지능이 제시하고 해석해 주는 편한 말씀(?)을 취하고 전하는 일에, 깊숙이 들어선 까닭이다. 이것은 교회가 이미 인간 존재와 현상과 미래를 인도할 신으로, 창조주 하나님 이외에도 또 다른 기계신(機械神)인 인공지능을 의지하기 시작했음을 말한다. 심각한 일이다. 이는 교회가 인간에 의한 제2 바벨탑 문명에 합류한 모습은 아닐지 잘 분별할 일이다.
질문해야 한다. 이런 인공지능 만능론 속에서, 인간의 생명과 구원을 다루는 교회와 설교자들까지 마냥 거기에 휩쓸려 들 수만은 없지 않을까? 오히려 그 흐름에 대항하면서 보다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질문들을 던져서, 우리 시대가 뭔가 다시 생각할 수 있게 해야만 하지 않을까? 이런 점에서도, 우리 교회는 본질적으로 되물어 보아야만 할 것이 하나 있다. 곧 ‘AI가 인간에게 큰 편의를 준다고 해서, 그렇다고 보혜사(保惠師)가 될 수는 없지 않느냐’하는 점이다.
답변은 분명하리라 본다. ‘물론 될 수 없다’! 그것은 보혜사인 성령은 본질적으로 인격(人格)이지만, AI는 비(非)인격적인 기능(機能)체이기 때문이다. 본질상 성령은 인간 개개인을 사랑하고 돕는 하나님이시지만, 그에 앞서 하나님의 공의와 그의 나라를 우선하게 하여 주는 신령한 주체이시다. 그에 비하여, AI는 자기를 다루는 자의 도우미 역할은 가능하나, 그 한계를 뛰어넘어, 전체를 향한 자율적이고 공의로운 의를 끌어낼 만한 주체적 존재는 못되기 때문이다.
특히 AI를 통하여, 인간 사회와 관계를 평화와 화해, 사랑과 일치를 도모할 영역까지 기대할 수가 없다. 그 역할은 분명히 인격의 주체이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내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만이 가능하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의 AI 사용과 이용은 그런 차이와 한계를 충분히 인식하고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 즉 기능상의 도우미로는 괜찮지만, 인격상의 기대와 협력은 전적으로 성령의 도움과 이끄심에 의존해야 한다.
특히 설교자들은 이 부분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원 창조주의 말씀이 인간 머리에서 제조된 제2의 창조물인 인공지능에 의하여 해석되는 것이 일상화된다면, 그런 양식을 먹고 사는 그리스도인의 영혼들은 과연 하늘 세계에 적합한 시민의 체질을 갖출 수 있을까? 순수 영성을 발휘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 머잖아 천국 입성할 때, 인공지능에 의해 양육된 자들은 과연 그곳에 부합된 존재로 인정받게 될 수 있을까? 그런 점도 매우 크게 우려되는 부분이다!
o 그렇다면 어찌할까? 디지털과 인공지능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우리 교회와 설교자들에게는 그런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끝까지 붙들고 지켜내며 씨름해야 할 얍복 나루터가 있어야만 한다. 그것은 이미 주어진 하나님 말씀의 틀 안에서 고수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게 전통적인 아날로그 방식이라도 괜찮다. 우리 선임들과 조상들이 오랫동안 고수해 왔던 믿음의 전통과 전달 방식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바로 그런 점에서 신명기에 나타난 모세가 자기 백성을 향해 주셨던 권고(勸告)가 가슴에 크게 와닿는다.
- ” 옛날을 기억하라 역대의 연대를 생각하라 네 아버지에게 물으라 그가 네게 설명할 것이요 네 어른들에게 물으라 그들이 네게 말하리로다 “(신32:7)
모세의 이런 지적은 무슨 말인가? 애굽과 광야의 오랜 생활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 가나안의 새로운 농경사회와 문화에서 풍요와 편리함에 빠져들 이스라엘이, 기존의 하나님 손길과는 점점 멀어져 가게 될 후배 세대들의 미래를 우려하면서, 미리 준 경고였다. 그런데, 그의 이 명령에는 새것에 대한 단절과 절연을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과거와 전통과 역사와 단절된 새것에 대한 접근의 위험성만을 경고한 것이다. 즉 조상들과 역사의 명맥을 존속하게 한 소중한 영성(靈性)의 바탕에서, 그곳의 새로운 물결과의 적용을 찾는 지혜를 요구하는 권면이었다.
그렇다. 우리도 인공지능의 새 물결을 외면할 순 없다. 다만 거기에만 몰입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그간의 아름답고 생명을 담은 영적 선물들을 외면하고 살아가려는 모습은 안된다는 것이다. 다시 마음의 눈을 떠야 한다. 교회사에서 조상들과 선조들이 오늘의 우리에게 전승해 준 눈물과 땀과 목숨을 건 치열한 기도와 숙고와 묵상과 대화와 토론과 협력과 설득과 공생의 마음과 연대의 정신과 기다림에서 나왔던 그 샘물을, 중단없이 계속 마시려는 노력을 지속하자. 그 눈과 시각적 영성을 바탕으로,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이런 이기(利器)들을 복음과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는 길을 찾아보자.
o 바로 이 부분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눅13:24)라는 말씀을 다시금 붙잡아야 할 이유이다. 이런 면을 간과(看過)하고, 편안하고 안이하게 믿고 살려는 수준에서 머문다면, 그는 ‘구원받으려고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들어가게 되는 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24-27 참조). 심판자로부터,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27절)라며 내침을 당하는 대상이 되고야 만다.
그렇다면, 주께서 지침으로 제시해 주신,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좁은 문으로 들어간 자라야 진정 주님으로부터 최후의 영접인 새 하늘과 새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될 존재일 터인데, 그렇다면 그런 그가 하나님과 세상에 보여준 모습은 대체 어떤 것이었나? 이 점에서 나는 오늘의 말씀에서 두 가지 측면에서 그 답(答)을 찾아서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는 바울 사도가 자전적 고백으로 증언한 고전9:19-23을 통하여, 그가 취한 ‘좁은 길’이 어떤 길이며, 그로 인한 하나님의 선교가 어떻게 가능했었는지를 헤아려 보겠다.
바울은 하나님 선교의 지침을,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사람을 얻으려는데(구원코자)’에 두었다. 이를 위하여 그가 취한 첫 조치는 자기 자신부터 복음에 필요한 사람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그래서 자기 안에서부터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찾아 엄격하게 제어(制御)했다. 예컨대 자신이 당연하게 누려왔던 자유(自由)나 명예(名譽)이나 편안(便安)이나 권위(權威)나 지식(知識)이나, 소유물(所有物)이나, 지위(地位) 따위들을 모두 내려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자신부터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되고자 하였다. 복음 안에서 찾아낸 새로운 자기였다. 그것은 자신이 만날 모든 다양한 사람들에게 만능키(Key)처럼 적응할 기본조건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자신부터의 철저한 변신(變身)을 이루어 냈다. 그런 존재 개혁 위에 그는 하나의 덕목을 추가했다. 곧 자신이 만날 모든 이들에게 접근할 통로는, 종(從)의 마음이어야 했다. 마치 성육(成肉)하신 그리스도 예수의 그 모습을 옷 입는 일이었다.
바울 선교의 특징은 이렇듯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분석과 파악을 먼저 하는 일에 우선하여, 자기 자신부터 선제적으로 폭넓은 선교인의 입지를 구축함으로써 상대가 누구이든 개의치 않고 누구에게도 기꺼이 접근하여, 그들을 넉넉히 끌어안을 수 있을 만한 자기(我)부터 만들고자 하였다. 선(先) 자기 무장, 후(後) 상대 접촉이었다. 그렇기에 바울의 선교는 기초가 탄탄하고 강력했으며, 그 열매들은 범세계적(汎世界的)일 수 있었다.
그가 거론한 대상들은 실로 광범하다. 당시 숱하게 많았던 노예살이하는 낮은 자들(19절), 엄격한 율법주의로 인하여 이방인에 대하여 매우 배타적인 동족 유대인들(20절), 그 유대인들에 의하여 율법 없음을 이유로 외면당하는 숱한 이방인들(21절), 그 밖에도 정치.경제.사회.종교,신분, 및 육체 상황 등의 각 영역에 혼재해 있는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22절), 모두가 바울이 복음으로 품었던 대상들이었다.
o 그의 이러한 모습은 오늘의 우리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 특히 엄격한 보수주의자들이나 배타적 전도인들이 보여주는 행태에도 큰 경종을 울린다. 그들은 바울과 같은 참 선교인의 자세를 보여주기보다는 오히려 심판자적인 바리새적 취향을 보여준다. 특히 동성애자들을 향한 그들의 공격적인 모습을 보면, 그들의 비성서적인 취향에 대한 격렬한 비판이나 정죄는 활발하지만, 그들을 위한 진정한 선교적 접근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상대의 문제에 대하여 비판과 경고는 가능하다. 하지만 그 안에 긍휼과 자비의 영성과 예수의 성육신적 사랑이 없이 정죄만 있는 것이라면, 그 또한 배제의 대상이다(요 8장).
우리는 이제 하나님 선교의 최상의 모델인 사도 바울을 다시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울타리 밖에 있는 이들을 정죄와 배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 사람까지도 더 건져내야 할 구원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들 속에 들어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를 위하여 자신은 그들보다 더한 그들이 되어보고자 했고, 그들의 처지를 비판이나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해소에 힘썼다. 특히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해 탄식하는 그들의 영혼을 긍휼히 여기면서, 그들에게도 좋은 이웃으로 그들을 건질 수 있는 길을 찾고자, 기도하며 사랑하며 보다 더 포용하려는 마음으로 그들 속에 들어간 것이다.
그의 순교는 그런 삶의 열매였다. 그런 성육신적 사랑으로 죄인의 세계에 파고 들어갔기에, 그들은 그것을 막으려 하고 제지하려는 기득권자와 보수주의자와 극우세력들로부터 강력한 역공, 곧 미움과 혐오와 공격과 배제를 피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거기에서 나오는 부당한 탄압에도 물러나지 않고, 모든 아픔과 눈물과 억울함과 심지어는 죽음의 잔까지도 예수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감내하였다. D, 본회퍼 목사의 사례들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바로 그 지점에 부활(復活)의 지평이 열린다는 점이다. 바로 그들이 진정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기에-’, ‘울려 씨를 뿌린 곳이 바로 그곳이었기에-’, 그곳은 그때 그 순간부터 오히려 거룩한 성역과 땅이 되어서, 새로운 오병이어의 역사가 시작되고, 구원을 안겨주는 부활의 역사가 일어나며, 진정한 새 하늘 새 땅이 열리게 되는 새 역사의 동녘이 밝아 오기 시작하였다. 죽음의 땅이 생명의 땅으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선교에서 진정한 열매가 맺음을 본다. 놀라운 기적과 새 역사의 지평은 편함과 안일 제일주의에서는 절대 기대할 수 없다. 대신 공의로운 성령의 역사하심을 통하여서만 장엄하게 펼쳐지게 되는 놀랍고 신비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을 뿐이다. 거듭남, 기억, 도전, 인내, 변화, 열매를 맺는 곳에서만 등장하게 된 새 세계, 새 역사이다.
o Will You be There, When the eternal New HEAVEN & NEW EARTH is Open?
이제는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그 궁극적 실재인 <새 하늘과 새 땅>이 어떤 곳인지, 그리고 그런 곳으로 영접받게 될 인물들은 어떤 존재들인지를 본격적으로 살펴보겠다. 그 세계는 오래전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영의 인도하심을 받았던 선지자들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에게 선포되고 약속된 세계였고, 우리 예수님께서도 오셔서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天國-the Kingdom of God)이었다.
그 나라는 사실 삶의 현장에도 깊숙이 투입되고 반영된 곳이지만, 그러나 현재란 무거운 삶의 멍에에 짓눌려 사는 이들의 눈에는 쉽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곳이기도 하다. 다만, 약속과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그 나라를 가슴과 영혼에 품고 그 나라의 품격과 가치를 추구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존재들에게는, 그날이 오면 결국 보게 되고, 얻게 되며, 영원히 향유하며 살게 될 그 세계다. 묵시가 아닌 현실로 받게 될 바로 그 세계다.
o 오늘 말씀은 새 하늘 새 땅을 두 가지 차원으로 우리를 보게 한다. 하나는 어떤 곳인지를 보여주려 하고, 또 하나는 그 세계에 영접받을 인물은 어떤 삶을 산 자인지를 전하려 한다.
먼저 그 세계가 어떤 곳인지를 증언하는 데에는, 구약 이사야 선지자의 증언과 신약 계시록의 요한의 증언이 있다. 그 내용들을 보면, 서로 아주 상이하고 대조적이다. 이사야는 땅에서 찾을 수 있는 새 하늘 새 땅에 집중한다. 반면에 계시록의 요한은 하늘에서 보게 될 새 하늘 새 땅의 모습에 집중한다. 그렇다면 이 둘이 서로 다르기만 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 둘의 중심에는 하늘과 땅 모두를 엮어주는 메시아 예수가 계셔서, 그로 인하여 인간은 하늘과 땅을 하나로 함께 연결된 곳으로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즉, 예수 안에서 인간은 땅에 있는 하늘나라와 영원한 하늘나라를 함께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환상적이고도 역동적인 모습에 대하여 이사야는 일찍이 이렇게 증언하였다(사11:6-9 참조), 곧 그로 인하여 강자와 약자가 함께 먹고 어울리며 평화를 누린다(25절). 이는 강자의 가진 힘이 더 이상 지배나 군림하는 힘이 아니라, 모든 약자를 섬기고 돌보는 도구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그의 세계는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샬롬의 세계이다(사11:6-9 참조).
먼저 이사야가 증언한 새 하늘 새 땅을 보자. 그가 전한 그곳의 모습은, 계시록의 현장과는 달리,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현장(現場)에서 맛볼 평안(平安)과 최상의 복지(福祉)를 실현한 차원을 겨냥한다(18-24절). 사실 그의 선포는 바벨론의 오랜 포로 생활에서 귀환 길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아주 절실하게 필요한 위로의 메시지였다. 오랜 세월 잃고 빼앗기며 짓눌려 지내왔던 그들에게는, 가장 원초적으로 소원했던 바로 그 차원의 새 하늘 새 땅이었다.
어찌 보면, 요즈음 우리 정부와 복지행정이 국민에게 안겨 주려는 내용과도 흡사한 것들이다. 곧 ‘생존하는 기쁨과 즐거움을 보장하고, 안전과 평화가 가득한 삶을 제공하겠다. 다시는 빼앗겨서 울고, 찢어져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하는 소리도 없게 하겠다(18-19절). 백세시대를 열 무병장수의 시대도 안겨주겠다(20절). 다시는 토지와 건축물을 침략자들에게 빼앗기는 일도 없게 하겠다. 자신의 수고와 생산의 열매도 제대로 즐기며 살도록 하겠다(21-23절). 그래서 여호와의 자손다운 품격과 품위를 누리게 하겠다(23절). 위기에서의 도움을 호소하면, 그 구조의 손길도 즉각적으로 제공될 것이다’라는 등등의 약속들과 흡사한 것들이다(24절).
o 하지만 계시록에 소개된 새 하늘 새 땅은 그 무대가 하늘 세계이다. 주의 성령이 밧모섬으로 유배당한 요한을 영원한 본향인 하늘로 불러올려서 보여주신 환상적 세계이다. 거룩하신 성령이 그를 하늘 영광의 최정점에 있는 영역으로 보여준 새 하늘과 새 땅의 현장이었고, 그곳에서 살게 될 무리가 거처할 거룩한 성인 새 예루살렘이었다.
그곳의 특징은 그곳에는 지상에서 모든 것을 장악해 온 옛 세상, 곧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의 실체가 완전히 사라진 곳이었다는 점이다. 그중에서도 강력한 위세를 떨쳤던 사망(死亡) 권세와 세속 권력(權力)들이 빛 앞의 어둠처럼 사라진 곳이다. 무엇보다도 그곳 생존자들의 면면(面面)도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4-7절)! 그곳에는 처음 세상의 주도자들이었던 권력자, 부자, 용사, 강자, 영웅호걸 등의 힘을 과시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모두 퇴출당한 곳이었다.
반면에 그곳은 새 입주자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놀랍게도 처음 세력들에 의하여 밀려나고 무참히 짓밟히며 배척당하고, 빼앗기고 살면서 억울한 눈물을 쏟으며 죽임까지 당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선택을 전혀 포기하지 않고 지조를 목숨 걸고 지켜온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하늘 영접을 뜨겁게 받았고, 충만한 위로를 받으며 살고 있는 곳이었다(4-6절).
그곳에서 그들은 지상에서 억울하게 당하며 쏟았던 눈물들이 씻김을 받았다. 원수인 죽음도 사라졌다. 애통함도 없고 이별도 없다. 지속적인 박해와 학대로 당했던 아픔과 괴로움도 씻음을 받았다. 오직 온전함을 입은 만물들의 충만과 위로만 즐기며 사는 곳이었다(사25:6-8 참조). 그러기에, 모든 것에서 새 하늘 새 땅의 판세는 처음 것과는 완전히 정반대였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에게서 내려와 초대받은 생명들의 새로운 거처가 될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은(2절). 처음과 마지막의 주되신 하나님께서 그곳에 모인 전체의 친아버지가 되시기에, 그 거주자들에게는 그 어떠한 것에서도 결핍(缺乏)과 핍절(乏絶)에 의한 목마름이 전혀 없다. 오히려 끝없이 공급되는 생명수 샘물로 인하여, 매사가 충만하고 풍성할 뿐이다. 할렐루야!!
o 마지막 과제는 ‘이렇게 제시된 새 하늘 새 땅에 영접받게 될 자가 누구냐’라는 점이다. 결국 우리는 다시금 예수님의 말씀을 주목한다. 주님은 당신 주변에 많이 있는 들러리 신자들을 향한 경고 하셨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24절). 이는 ‘싸우라’는 명령이기도 했다. 깨어서 말씀을 받되, 어둠의 세상을 향해서는 단호히 거부하고 저항할 것을 촉구하셨다(10:29-37 참조). 하나님의 구원은 그런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서, 의롭게 사느냐의 여부로 결정될 뿐이다. 그곳은 분명 ‘힘들고 좁은 길’이다. 하지만 그 점이 구원의 절대조건이고, 순응한 자만이 그 나라 잔치에도 참여할 것이기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29-30절).
명심하자. 보혜사의 위로를 받게 될 사람은 처음 하늘과 처음 세상에 살면서도,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저항하며, 박해와 배척도 받기에 억울한 눈물을 쏟기도 하는 사람이다(계21:4). 그러면서도 하나님이 언젠가는 새것, 곧 신령한 새것으로 채워 주실 것을 믿고 산다(계21:6). 그 문이 활짝 열릴 것을 소망하며 산다(7절, 눅13:24). 그의 아프고 쓰라린 가슴은 오직 기도와 간구와 부르짖음으로 채운다(사65:19 참조). 눈물과 아픔과 탄식과 인내와 믿음과 소망이 그의 영의 양식이다. 그는 그날을 대비하되, 마치 신랑을 맞이할 신부처럼 대비하며 산다. 다행히 그에게는 그런 그에게 놀랍게 응답해 주실 분이 계시다.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O 분명히 새 하늘 새 땅의 도래가 임박했다. 그러기에 먼저 그 세계를 맞이할 지금의 나의 신앙부터 서둘러 재점검하자. 앞에서 물었던 질문을 여기 마지막 지점에 와서도 다시 묻는다.
지금의 내 마음과 시선은 과연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여전히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인가? 아니면 피조물과 인위적인 조언자들의 메시지나 손길에 매달려 있는가? 말씀에 무릎을 꿇고 복종하고 사는 그의 종인가, 아니면 새로 등장한 AI의 동역자 정도인가? 여전히 나부터의 변화를 먼저 추구하는가, 아니면 세상과 사람의 인정과 인기에 목말라서 사는 일꾼인가? 도대체 나는 누구의 종으로 지금 목회와 강단에 서는가?
말씀에 대응하는 나의 자세부터 점검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답을 찾게 될 것이다. 나는 매 주일 모여든 성도들에게 성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게 하며 교제하게 하려고 계속 씨름하는가? 나는 신령한 말씀의 젖줄에 매달리는 ‘좁은 길에 선 목자’인가, 아니면 여전히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려는 식의 공허한 영혼을 가진 목회자인가? 주신 말씀에 목숨을 걸고 영혼 살리기에 목숨을 걸었는가, 아니면 여전히 설교 솜씨 개발에만 매달려 있는 목회자인가?
모세의 조언을 다시 기억하자. 사도 바울이 취한 좁은 길의 선교를 기억하자. 목회와 강단 사역은 탄탄한 기존의 아날로그 형태의 영적 기반 위에서, 디지털 형태의 새로운 기능적 조력을 합한 모습이 바람직하다. 자기 혁신과 변화의 선행 됨이 없이, 디지털 혁명과 발전에만 의존하려 하는 일은 결코 축복일 수 없다. 목회자에게는 그런 흐름은 저주요 비극이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기계의 종이 되거나 기계의 가르침 속에 머무는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속히 결단해야 한다. 그날과 그 시는 속히 임한다. 성령의 권고를 무시하지 말고, 더욱 강력한 말씀과 기도의 사람이 되어, 나에게는 세상의 기술들도 하나님의 소중한 도구들로 이용되게 하자. 그렇게 강력해진 나의 설교와 목회가 결국 나라도 구하고, 교회도 살리며, 온 세상도 살리려는 삶의 형태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