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창 12:1-4, 32:27-28, 마6:31-34, 엡 2:14-20 ”
나는 오늘 120년의 교회 생일을 맞이한 여러분을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무슨 말씀을 전하기를 바라실까를 고민하며 기도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의 큰 족장이셨던 야곱이 생각났다. 야곱의 전 생애에 속에서도, 20년 외갓집 피난살이를 마치고 본가로 귀가하는 도중에, 형 에서라는 마지막 두려운 장벽을 넘어서기 위하여 얍복 강가에서 밤샘 기도 후에, 만난 여호와로부터, ‘네 이름이 무엇이냐’(창32:27)란 질문을 들었던 바로 그 야곱이 생각 났다.
왜 하필 이름을 물으셨을까? 야곱이 누군지를 모르셔서 물으실 리는 없을 터인데, 왜 새삼스럽게 이름을 물으셨을까? 그것은 앞으로의 그의 삶 때문이다. 곧 지금까지의 살아온 그의 이름은 앞으로 살아갈 그의 삶에는 합당할 수 없어서, 그에게 이제 미래에 걸맞는 새 이름을 부여하고 싶어서였다.
지금까지의 야곱이라는 존재로 살아온 것을 넘어서서, 이제는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사는 존재로의 출발이 시작되는 순간이 왔기 때문이었다. 사실 야곱은 사적(私的) 영역을 국한되어, 생존과 제한을 넘어서기 위하여 치열하게 씨름하고 싸우며 사안에 따라서는 속이기도 하던 존재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전혀 다르다. 이제 공적(公的) 영역의 멍에를 맨 자의 대명사다. 나만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책임과 의무가 부여된 존재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이제 하나님에 의하여, 존재와 인생의 차원이 완전 업그레이드 된 야곱은 더는 자기나 가족만을 생각하는 옛사람의 생활인일 수 없다. 그보다는 지난 20년의 하란에서의 피난 생활에서 받은 12명의 자식들을 발판 삼아, 이제는 하나님의 민족과 나라와 이름과 영광을 도모하는 이스라엘이라는 큰 세계를 이끌어가는 주역으로 담대히 깃발을 올리고 나아가야 했다.
교회들도 보면, 야곱형 교회가 있고, 이스라엘형 교회도 있다. 나이나 연륜만으로 규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대다수의 교회는 여전히 야곱형 교회들이다. 그러나 아주 소수지만, 하나님의 마음과 기대를 받는 교회가 이스라엘형 교회로 진입(進入)해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오늘 120살에 접어든 우리 남원제일교회는 언젠가부터 이미 야곱의 시대를 벗어나 당당히 새로운 차원의 영적 수준인 이스라엘형 교회의 하나로 세우심을 받았다고 본다.
과연 우리 제일교회가 진정 이스라엘형의 교회가 되었는지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증언될 삼위일체적 정체성 3가지를 들으시고, 자신들이 진정 그러함을 입증하면 되겠다. 우리 하나님도 한 분이시지만, 시대에 따라 자신을 드러낼 때는 이름이 세 가지였다. 곧 구약 시절엔 성부로, 예수 안에서는 성자로, 교회 시대에는 성령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면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전체적인 진면모를 드러내 주셨다.
그를 믿는 우리들은 어떤가? 우리도 역시 세 가지 이름을 정체성으로 가진 자들이다. 성부는 우리를 아브라함의 자손(子孫)으로 선택하셨다. 성자인 예수는 우리를 제자(弟子)로 부르셨다. 성령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과 생명을 보여줄 증인(證人)으로 파송하셨다. 따라서 우리와 교회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예수의 제자요 성령의 증인으로 존재하고 살며 보여주어야 한다.
1.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들이다.
아브라함이 누군가? 그를 확인하고 그가 받은 복의 특성을 살펴보자(창12:1-3 참조)
그가 받은 첫 번째 복은 복의 근원(根源)이 되는 복이었다(2절). 복의 뿌리로 세움 받은 것이다. 인간 스스로에게서 나올 수 있는 복이 아니다. 창조주만이 주실 복이다. 그러기에 이 복이 가능하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절대적이다. 하나님 사랑에 목숨을 걸어야 된다. 여기에서 하나님 사랑이 나오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두 번째 복은 그와 그의 자손이 여호와께로부터 받은 복을 받지 못하고 사는 숱한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나누어 주며 사는 복이다(3절). 소위 복을 나누어 주는 복이다. 이 얼마나 독특한가? 혼자만 행복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웃이 나온다. 그 이웃을 사랑해야 가능한 삶의 과제를 매고 살게 된 것이다. 전도와 선교, 헌신과 나눔이란 이타적 멍에를 걸머진 생애여야 된다.
그런데 주목할 일이 있다. 이 두 복들인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 하나로 묶여 있다는 점이다. 묶였어도 페키지로 묶였고, 옵션으로 얽혀져 있다. 또 일괄처리 형이다. ‘둘 모두를 받을 거냐, 전부를 안 받겠다는 거냐’이다. 하나만의 선택은 없다! 그렇게 하여 받기만 하는 자가 아니라, 받으면 반드시 주기도 하게 하셨다.
아브라함은 이런 형(型)의 까다로운 복의 조건을 제시하시는 여호와께, ‘아멘’하였다. 그래서 진정한 복의 근원(根源)이 되었고, 모든 믿는 자의 조상(祖上)이 되었다. 그 바람에 이론과 행동이 하나인 일원론(一元論) 종교가 지구촌에 탄생했다. 자기가 받은 복을 나누어 주는 무리들을 통하여, 머리가 되는 인물인 리더들이 등장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입주하자, 이런 훈련을 단단히 시키셨다.
1) 온 백성들에게 ‘너희는 애굽에서 종(從)이었음을 잊지 마라. 만일 그 일을 잊고 살면 저주를 받는다’를 경고를 한시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살게 하셨다(신15:15).
2) 새 절기(유월-칠칠-초막)를 통하여,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게 하셨다.
이스라엘은 이 질서를 준행할 때, 큰 복을 누렸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가 정점이었다. 반면에 그들이 비극에 떨어지고, 나라와 백성이 불행에 떨어진 때는,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던 이런 패키지 복을 그들 후손들이 무시하고 저버릴 때였다. 그래서, 예배와 삶이 분리되고, 신앙의 겉과 속이 달라지며, 예배와 세속의 삶이 이분화될 때였다. 그 대가는 엄중했고 혹독했다. 아주 오랜 세월 비참한 족속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주권을 침탈당한 나락(奈落)에 떨어져 살았다.
결국 이를 가슴 아파하신 하나님께서는, 비상한 방법으로 허망하게 무너진 복과 구원의 질서 회복을 시도하고자 하셨다. 그 결정적 방법이 바로 당신의 외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이다(요3:16). 그가 바로 인간 되어 오신 성자 예수님이셨다. 오셔서 매우 불퇴전의 방법으로 당신을 닮은 제자들을 세우고 당신의 교회를 만드셨다(마16장).
2. 우리는 예수의 제자들이다.
예수님은 구원의 길을 잃어버린 하나님의 양들을 구하러 오셨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처음 복의 구도를 회복하시고자 하셨다. 특히 당시 유대교에 의해서, 하나님 사랑만 남아있고 이웃 사랑이 실종된 부분을 되살리시고자,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우셨다(요8:44).
당신의 모든 계명과 교육과 실천은 일관되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균형 있게 실천하는 데에 집중하셨다. 첫째는 하나님 사랑으로, 둘째는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곳에 영생이 있음을 꾸준히 선포하셨다(마12:28-31). 잘못된 인과응보 교리에 의하여 죄인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모든 변두리 인생(人生)에게는 당신이 친히 찾아가셔서 교제하시고 친구가 되어 주셨다.
그러면서 가난한 자를 외면하는 부자를 향해서는 심판을,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겠다는 세리 마태에게는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라며 영접해 주셨다. 이방인이라도 강도 만난 이웃을 선대한 사마리아인에게는 선한 이웃이라고 축복하셨다. 하지만 이웃 사랑할 여건(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외면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자는 영벌(永罰)을 받을 것이라고까지 경고하셨다.
그러면서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어느 정도까지 해야 되는지에 관하여서도 가이드라인(기준선)을 선명히 제시하셨다.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며 힘을 다하고 목숨까지도 다하여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다(막12:30). 그러면서 이웃 사랑은 원수(怨讐)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다(마5:44, 롬12:18-21 참조). 그러면서, 당신은 당시의 유대인들이 그토록 증오하고 차별하며 외면하고 지냈던 사마리아와 그곳 동포들을 찾아가셨고, 구원하기도 하셨다. 나중에는 당신의 제자들까지도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셨다(행1:8).
이는 오늘날 우리나라 다수의 보수 교인들이 북한과 그곳의 동족들을 대하는 냉혹한 모습과는 천양지차가 아닐 수 없다. ‘종북 좌파, 용공 빨갱이’란 프레임으로 동족인 북한과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행태를 보면, 우리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이다. 분명 잘못 믿고 있는 것이다! 잘 믿는 사람, 곧 이스라엘형 교회의 성도들은 분명 원수를 저주하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하여 그 원수로 하여금 회개하고 주께 돌아오게 하는 능력을 보여주는 이들이다, 손양원 목사님처럼 말이다. 주님이 지금 이들을 찾으신다.
3. 우리는 화해와 평화의 증인이다.
온 세계를 그리스도의 세상으로 삼고자 선교에 목숨을 건 사도 바울은, 서로 다른 온 세계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내기 위하여, 예수의 십자가(十字架) 복음에 집중하였다. 그 십자가에서 찾아낸 구원의 메시지는 바로 예수는 <모퉁이 머릿돌>이셨다는 것이다. 이 머릿돌은 건물의 구석에 놓여있는 돌이 아니라, 건물 지붕의 상량용 마룻대와 같고, 아치형 다리의 한복판에서 양쪽에서 자기에게 뻣어 온 모든 돌을 하나 되게 하는 지지석(支持石)이요 결정적인 돌인데-, 십자가의 예수가 바로 그 머릿돌이시다라고 외친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서로 다른 자들이라도, 모두가 예수와 잇대어 있게만 되면, 그들은 예외 없이 하나가 된다는 점을 외쳤다. 그렇다. 예수와 잇대어지게 되면, 거기에는 모두가 하나로 만나고 하나가 되는 기적을 경험한다. 동서가 만나고, 빈부가 만나며, 강약이 만나고, 남녀도 만나며, 흑과 백도 만난다. 그래서 이질이 동질이 되게 되고, 모든 차별과 어긋남도 해소된다.
이게 어찌 가능한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은혜와 감동의 물결이 예수 십자가 한복판에서 예수와 연결된 모두에게 흘러 들어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와 나가 ‘우리’가 되어, 서로 존중하고 섬기게 되며, 하나 되어 행복을 누리게 하는 은혜를 맛보며 살게 되기 때문이다. 성령은 이제 우리 남원제일교회가 바로 그 증인이어야 한다고 하신다.
o 오늘은 마침 사순절 시작 주일이고, 총회가 제정한 청년주일이다. 다시 일어나자. 새 역사 120년의 참 구원의 백성인 이스라엘형 교회를 일구어가자. 삼위일체 하나님이 다시 부여하신 삼위일체 형 새 이름, 우리는 아브라함 자손이고, 예수의 제자이며, 성령의 증인이란 정체성을 굳게 불들고, 하나님이 기뻐하실 살아 역사하는 교회를 다시 세워가자. 예전보다 훨씬 더 젊은 교회를 이루어 가자. 그래서 여러분도 그 일원으로 더 큰 축복을 받으시고, 여러분 덕분에 모든 이웃 생명과 교회들도 함께 복을 받게 하시길 축원한다.
2025. 03. 09 주일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