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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28) - 고 임태수 박사 추모의 글

관리자 2023-11-08 (수) 17:38 7개월전 129  

고 임태수 목사를 추억하며 추모한다. 


고인(故人)은 가진 이름들이 많은 분이다. 히지만 이렇게 보내드리게 된 이 시점에서의 나는 그를 사랑과 존경심이 담긴 ’형(兄)‘이라고 부르려 한다. 


내가 전라도 해남 출신인 고인을 만난 것은 1968년 한국신학대학에서였다. 그때의 그는 내게 1974년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줄곧 학업 세계에 동행한 형이었고, 동행자였다. 그중 한 때인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 들어설 때는 내가 섬기는 양무리교회에 협력 목사와 부교역자로 내외분이 자녀들과 함께하기도 하셔서, 그를 보고 대화할 시간도 제법 많았다. 


그의 영적 고향은 김천의 나운몽 장로가 세웠던 용문산 기도그룹이었다. 그곳에서 자신이 가진 폐결핵을 치유 받았던 곳이었기 그랬다. 거기에서 그는 기도와 전도로 전국을 다니던 형이었는데-, 그런 그가 하나님께 한순간 붙들려 전혀 차원이 다른 이곳 한국 신학의 전당인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해 들어온 것이다. 그때 그의 모습은 분명히 동료들과는 달랐다. 


공부보다는 기도와 선교에 더 관심이 컸다. 그의 초기에는 자주 지금의 잠실벌에 나아가 텐트 속에서 날을 새며, ’이 벌판의 땅(2-3만평)을 내게 주소서‘라고 기도하곤 했다. 전 세계를 가슴에 품고 살아온 모습을 보였다. 만일 그의 그런 기도가 실제로 응답되었다면, 그는 아마 세계적인 재벌은 물론, 전도자나 설교자가 되었을 것이다. 


수업 시간엔 문자주의와 근본주의 흔적이 강한 그였기에, 진보성향의 교수들(허혁 교수 등)과의 충돌이나 마찰도 적지 않았다. 특히 고 안병무 선생과의 갈등도 적지 않았는데, 대학원 졸업 후 안 박사가 운영하는 민중신학연구소의 간사가 되고, 그의 추천으로 독일의 본 대학에 유학하여 박사가 된 일은 매우 아이러니한 현상이었다. 


어찌보면, 하나님은 그를 한국교회의 진보와 보수 양극화의 한복판에 세우셔서, 두 양쪽을 서로 조율하면서, 한국교회의 하나 됨과 건강화를 도모하도록 인도하셨다고 본다. 그 점에서 고인과 나는 적잖은 대화를 해오기도 했다. 그를 위해 하나님은 그를 한국교회의 신학교 중에서도 중도 보수 진영이랄 수 있는 천안의 호서대학교 신학부 교수로 일하게 하셨고, 그곳에서 중도성향을 가진 신학 및 목회 후배들을 적잖게 배출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는 한국교회의 편향성에 깊은 우려와 아픔을 가지면서, 한국교회에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는 취지 아래 민중신학연구소를 설립하고, 그가 세상 떠날 때까지 계속 그 과제를 향하여 씨름하여 오기도 했다. 나는 그런 그의 협력자의 일원으로서, 한때 이사장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이는 또한 그의 신학과 신앙의 폭이 그만큼 넓고 컸음을 입증한 일이기도 하다. 


그의 삶은 임마누엘 여맹원 간사로서 삼양동 생활을 오랫동안 계속하면서, 사실상 민중(民衆)적 생활을 해 왔다. 그리고 용문산 캠프의 여러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그곳의 영성 힘과 능력에 대한 그리움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같은 민중신학이라도, 안박사 중심의 민중신학과는 결이 제법 달랐다. 한신의 빈곤한 영성에 대하여서도 늘 아픔과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는 판단력과 집행력에서는 탁월하고 민첩한 위인이었다. 그에게는 그 광주일고 출신다운 실력과 역량이 있었다. 누구보다도 어학 능력이 탁월했다. 그래서 독일계열의 한신신학을 하면서도 가장 흡수력이 좋아서, 독일에 유학도 빨랐고, 학위 취득도 쉽게 하였고, 신학교 교수 임용도 빨랐다. 무엇보다도 그가 현 부인인 양화자 목사님을 선보러 내려가서, 그 즉석에서 결혼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약혼까지 하고 돌아와서 우리 동료들에게 충격을 준 일은, 그의 행동거지 특성을 잘 드러낸 일이기도 하다. 


그 후 아내 양화자 목사를 적극 응원하여, 여성 분야의 연구로 구약박사 학위를 취득한 여성신학자와 현장 교회의 목회자로 사역하게 하면서 묵묵히 뒷감당을 도맡아 하게 한 형의 인간적인 모습은, 그가 그리스도의 종의 보범적인 길과 부부애가 어떤 것인지를 우리에게 잘 보여준 준 사례이기도 했다. 


매우 아쉬운 일은 그는 우리 동기들 모임에서 늘 대화를 주도하고 농담도 풍성하게 하였는데, 이제는 그 재담과 즐거움을 접할 수 없게 된 일이다. 특히 그의 재담 속에는 늘 ’그의 120세 론이 빠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 바람에 우리는 형이 우리 동기들 모두에서 가장 장수자가 될 것이라는 기대감까지 품게 하였는데-, 그런 그가 이렇게 한순간에 서둘러 우리 앞서서 떠나가게 된 일이다. 이 일로 우리는 다시 한번 충격 속에서 조물주를 향한 겸손을 품게 된다. 


내가 형을 현장에서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는 2018년 내 퇴임 식장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때 형의 모습은 많이 힘겨워하는 모습이었다. 그 후, 형이 투병하기 시작하셔서 형수의 간병 속에 벌써 만 5년이 지난 11월 4일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다. 참으로 짙은 아쉬움이야 남지만, 그래도 그동안 형수 양화자 목사님의 남은 생애의 건강을 고려하면, 형과의 이별은 역시 은혜(恩惠)란 말로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우리는 그동안 좋은 형이요 이웃이요 동역자요 친구요 학자요 우리의 든든한 동기생인 당신을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머잖아 형이 앞서가신 곳에서 다시 재회하고 해후할 때가 올 것이다. 그동안 잘 키워 놓으신 당신의 아들 대일과 딸 주영, 그리고 후손들도 부끄럽지 않은 당신의 후손들로 잘 지낼 터이니, 마음 편히 가시기를 바란다. 


’형, 임태수 목사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기리 주안에서 영생하소서‘


2023. 11. 05


아우 최부옥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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