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9일, 나의 제 3차 태국 ‘한 달 살이’를 마치고 귀국한 후, 세 분의 별세(別世) 소식이 잇달았다. 한 분은 나의 한신대학 스승이신 신연식 교수님이셨고, 또 한 분은 목회 현장에서 큰 형님처럼 귀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던 김인호 목사님이셨다. 신 선생님은 99세로 미국의 아들 댁에서 2월 28일(금)에 소천(召天) 되셨고, 김 목사님은 90세로 2월20일(목)에 용인에서 부름을 받으셨다. 그리고 조금 뒤늦게 떠나신 이성래 집사님은 94세로 3월28일에 소천 받으셨다. 세 분 다 거의 한 세기를 장수하시다 편안히 본향으로 떠나셨다.
지금 세계는 코로나의 공습을 받아 사망자들이 속출하고, 어느 나라에서는 그 시신이 포화상태가 되어 수습 자체를 할 수가 없어서 쓰레기처럼 쌓아두었다가, 유족들의 전송도 받지 못한 체 일괄 화장 처리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는 터에, 위 세 분들은 매우 평안히 후손들과 후배들의 따뜻한 전송을 받으시면서 가셨다. 얼마나 감사하고 행복한 분들인가 생각되었다.
무엇보다도 이 세 분들은 자신에게 허락된 9학년 인생을 매우 훌륭한 발자취를 남기고 가셔서 존경과 명예를 후대에 남기고 떠나신 분들이었다. 이 분들은 내 생애에도 적잖게 영향을 끼치고 가신 분들이었다. 신 교수님은 나의 신학생활과 목회자로서의 소양과 자질을 형성하는 데에 커다란 디딤돌과 발판을 제공해주신 분이었다. 김 목사님은 목회 현장에서 큰 디딤돌과 버팀목으로 응원을 보내주신 분이셨다. 그리고 이 집사님은 뒤늦게 믿음생활에 입문하셔서 흔들림 없이 교회를 섬기다 가신 든든한 교우이셨다.
이런 귀한 분들이 마치 때를 기다렸다는 듯,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기에 앞서서 홀연히 떠나가셨다. 그 바람에 왠지 내 앞 세대들이 모두 떠나신 것 같고 또 ‘이제 남은 것은 내 순서’라는 또 다른 생각이 드는 것을 금할 수 없다. 따라서 이제 내게도 점점 좁혀져오는 여생(餘生)에 대한 대비와 성찰에 신경을 써야만 하는 때가 되었음을 절감하였다.
그러면서도 막상 이 분들이 떠나시고 나니, 다하지 못한 도리로 인하여 죄송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본인들 모두는 장수하고 편안히 가셨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척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내가 받은 사랑과 배려의 빚은 너무도 큰 데도, 노년에 외롭게 지내시던 이 분들을 찾아뵙고 보은(報恩)하지도 못했고, 교제도 나누지 못한 일들이 미안함으로 가시질 않는다. 용서를 빈다
그런데 나에게 이 분들은 그냥 보내드리기에는 그 흔적들이 너무 큰 분들이다. 그 흔적을 기리고 남기며 전하는 일도 도리일 성 싶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러면서 이번 목회서신에서는, 우선 이 분들이 나와 후배들에게 남긴 기억(記憶)거리들에 관한 회상(回想)들을 단편적이지만 기록물로 2회에 걸쳐 올리려 한다. 독자들에게도 나의 이 증언이 다소 유익이 되기를 바란다.
신연식 선생님에 대하여
경북 청송의 농가에서 출생했던 선생님은 나에게 여러 차원에서 새 세상을 맛보게 해 주신 분이었다. 그와의 1968년도의 한신대학에서의 만남 자체가 나에게는 기회였고 도전이었으며 축복이었다. 비록 사제(師弟)간의 관계로 만남이었으나, 시골 청년이자 앞뒤 분별이 잘 안된 체 소박하게 살아온 나에게는 선생님의 학문이나 신앙이나 가정 안팎의 삶의 모습은 모두가 나를 새 차원으로 크게 업데이트되게 하는 큰 디딤돌이었다. 다음의 몇 가지 단계에서 짚어본다.
1) 선생님의 강의. 저서. 설교. 삶의 일관된 주제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데에 집결되었다. 그런 선언은 선생님을 대변하는 상징이었고 그의 존재를 연상하게 하는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에게 그런 선포는 그의 숱한 말씀증거의 핵심이었고, 강의의 일관된 주제들이었다. 그의 많은 저서들의 기조였으며, 숱한 삶의 대화의 간증거리였으며 줄기찬 신앙고백이었다.
나는 그 분의 강의와 설교를 꽤 듣고 성장한 학도였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흐름이 일관되었다는 것이다. 강단과 현장, 강의와 설교가 하나였다. 대부분의 교수들은 학문과 삶이 일관되지 못한 경우가 허다한 데, 선생님은 그 단계를 훨씬 넘으셨다. 그러기에 동료 교수들에게서도 학자인지 설교자인지 다소 애매한 위치에 있는 분처럼(?) 간주되기도 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주변의 시선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제자들과 신도들에게 전하고 가르치고 심으려는 데 전심을 다하셨다.
2) 그의 교수로서의 또 다른 특성은 그가 한신에 새벽기도가 있게 하신 분이었다는 점이다. 그는 매일 새벽 2시에는 일어나셔서, 학교 교수실에 출근하여 기도하고 그날 새벽에 선포하실 설교준비를 하셨다. 그게 나에게는 영혼의 젖줄이었다. 매일 약 20-30여명이 참석하였는데-, 나는 그 앞자리에 앉아서, 그의 증언을 통하여 전달되는 복음의 양식으로 위로와 용기와 소명을 다짐하면서 성장했다. 한신의 신학교육이 비교적 비판적 성격을 띄고 있어서, 교육만으로는 학우들이 많은 갈등과 상처를 받았었는데-, 선생님의 메시지는 그런 상처들을 치유하는 효과가 컸다. 특히 나에게는 그 학문과 경건-양면 모두를 은혜와 성숙의 도구로 수용할 수 있는 품과 기회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주었다.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 양면(兩面)처럼 말이다.
새벽기도 그룹은 학교 안에서도 이질감과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였다. 교수들 사이에서도 그랬다고 본다. 흥미로운 것은 그 때 함께 기도하였던 학우들이 학교 공부에도 앞장섰던 이들이었다고 기억된다. 성적장학금을 많이 받고 생활했다. 받기 위해 기도한 것은 아니라, 기도하며 공부하니까 받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싶다. 그 새벽기도의 영향은 나의 평생과 목회에도 깊은 영향을 끼쳐왔다고 생각된다. 지금도 그 때 함께 부른 찬송과 찬양이 그립다. 가끔 찬송하다가 그 때가 생각나면, 목이 메기도 한다. 다시 천국에서 함께할 때가 오겠지만-!
3) 선생님은 생활이 어려운 제자들을 돌보는 일을 꾸준히 계속하셨다. 가장 큰 선행(善行)이 제자들 돕고 지원하는 일이었다. 그 바람에 나 같은 가난한 제자도 대학 졸업 때까지 계속 도움을 받았다. 비록 스승님께서 1969년 가을에 학교 분란(紛亂)문제로 학교를 떠나 대구 계명대학교로 가신 후에도, 선생님은 변함없이 미국에서 오는 개인 장학금의 일부로 내 신학교 생활을 마감할 수 있도록 후원해 주셨다. 진정 선생님은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天使)이셨다!
종종 선생님의 그런 사랑과 헌신에 상처 주는 제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안다. 선생님은 별로 표를 내시지 않았으나, 선생님의 도움을 적지 않게 받고서도 등을 돌리는 모습들도 적잖게 엿보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그 일에도 별로 개의치 않으셨다. 오히려 당신이 할 일을 했을 뿐이기에 실망하지 않는다며 담백하게 받아 넘기셨다. 나는 그런 모습에서 행위의 대가(代價)에 연연하지 않고, 가치 중심의 선택을 하고 사시는 참 신앙인의 면모를 보면서 많이 배웠다.
4) 한신 교수들 중에 가장 주변에 많은 제자들을 둔 스승 중에 한 분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만 그의 사랑을 크게 받은 것이 아니라, 숱한 제자들이 그의 기도와 돌봄과 양육을 받으면서 현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그 분들 한분 한분이 모두 굵고 존경 받는 선배들이었다. 고 이중표목사, 양희철목사, 김옥남목사, 김대선목사, 김연재목사, 김이곤목사, 김균진목사, 유부웅목사, 우리 동기들 중에 임태수목사, 추요한목사, 김길홍목사, 최광순목사, 고 황우관목사들도 모두 큰 사랑을 받으며 공부했던 제자들이었다. 후배들 중에도 층은 두텁지 않지만, 많았다.
그러기에 선생님은 졸업한 제자 목사들과 그들의 교회 현장을 돌보기에도 바쁘게 사셨다. 그들의 시무교회에 자주 초청받아 설교와 강연으로 교인들의 영성을 도우셨던 것이다. 좋은 제자들을 둔 스승의 모습을 잘 보여주셨다. 자연히 산학(産學)을 통전하는 스승으로 사셨다.
5) 우리 가정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남다르셨다. 특히 가족들 하나하나에 대한 관심이 깊으셔서 당신이 어린이를 위한 부모(父母)교육에 관한 책을 집필하시는데, 우리 가족 전체에 대한 증언들, 우리 부부-아들 부부-딸까지 포함하여 5명의 증언들 모두를 그의 저술 속에 적잖은 분량을 할당하여 담아 소개해주신 일은 결코 잊을 수 없다.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의 가정의 구체적인 사례라고 소개하셨는데-, 고맙기도 하지만 미안하고 여전히 부끄럽기도 하다. (참고-신연식. 『어린이들을 위한 부모교육』.2011.쿰란출판사)
남편 이여진 박사와의 사별 후, 한 동안 혼자 지내시던 선생님은 미국의 아들 무의씨의 요청으로 미국생활에 들어가셨다. 떠나실 때나 그 후에도 늘 귀국하고 싶어 하셨으나, 끝내 무산되면서 다시 오지 못하고 천국으로 떠나셨다. 여러모로 건강을 잘 유지하신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이 코로나10 국면(局面)속에 하늘 아버지의 부름을 받으신 것이다. 소식을 접하고 충격이 컸다. 도리를 못한 일들이 너무 커서, 미안함과 죄송함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별세 후, 지난 3월 23일에 나는 선생님의 방문을 받았다. 꿈을 통한 것이었다! 내 침상으로 찾아오신 선생님이 나를 향한 애정 표시를 하셨다. 마치 어미 개가 새끼 개에게 하듯 하셨다. 꿈을 깬 후, 나는 사자(死者)인 선생님의 그 장면을 어떻게 이해해야할지 난감했다. 그런데, 그 꿈의 뜻은 금방 그 다음의 진행된 일로 인하여 놀랍게 이해되었다.
서재(書齋)에 나온 나는, 예수에 관련된 책들을 모아 가지런히 한 곳으로 모아 정리하기 시작했다. 늘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 시간에 그 작업을 할 마음이 생긴 것이다. 정리에 들어간 후, 나는 금새 책 하나를 만났다. 바로 선생님이 저희 가족을 담아내 주셨던 바로 그 책이었다. 그 책을 손에 쥐자, 선생님이 곧 생각났고 그 기록들이 생각나서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그 안에는 고스란히 우리를 향한 선생님의 마음과 애정을 담은 그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 선생님과의 꿈은 그가 떠나시기 전까지 이 제자를 보고 싶어 하셨던 마음이 그렇게 전달된 것이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선생님의 사랑과 베푸신 은혜의 혜택으로 지금의 내가 있음에 대한 자각이 더욱 새삼스럽게 들었다. 동시에 선생님의 뜻과 신앙을 제대로 계승할 제자로 살아야 한다는 다짐도 새삼 해보게 되었다. 코로나가 진정되면 유골로 환국하시리라고 본다. 다시 뵙겠지만, 다시금 선생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한 세기-한 시대 아름답고 귀한 신앙의 모델과 선배가 되셨던 분을 은사로 만나서 닮아가도록 인도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