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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설교 - " 아브라함-예수-교회-우리 " / 총회실행위원회(3차)

관리자 2019-08-07 (수) 08:02 5년전 1089  

본문) 창 12:1-4, 눅 10:29-37, 갈 3:5-9,14

 

오늘 나는 창세기 본문의 주인공인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부름 받았을 때를 소개하면서, 그의 후손으로 선택 받은 우리들이 이 시대에 어떤 대응을 요구 받는 지를 증언하고자 합니다. 이 일은 우리의 삶의 반성과 함께, 새로운 삶의 방향을 다시 찾는 기회를 갖고자 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누구입니까? 그에 대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뢰는 신구약 성서 66권 전체에 가득합니다. 복음서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임을 첫 장 첫 절에서 선언할 정도입니다(마1:1). 그의 존재는, –예수님이 소개하신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보면(눅16:24-31)-, 하늘에서 거지 나사로에게는 자비를, 부자에게는 심판을 집행하는 인물로도 등장합니다. 이 땅에서도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존재감은 여전합니다. 세계를 움직이는 지금의 4대 종교들(개신교,카톨릭,유대교,이슬람등) 모두도 그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이의 없이 인정합니다. 

 

그의 그러한 하나님으로부터의 신뢰는 어떻게 얻은 것일까요? 그의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던 ‘고향-본토-친척-아비의 집을 떠나 당신이 지시하실 땅으로 가라’는 여호와의 지시(1절)와 ‘너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게 하리라’는 여호와의 벅찬 약속(約束)(2-3절) 앞에 온전히 순복(順服)하는 믿음을 보였기에, 그런 하나님과의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관계가 맺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복들의 내용을 정확히 파악해야만 합니다. 그 속에는 하나님의 소원하시는 바가 있고, 누구를 사랑하고 구원하시는지를 알려 줄 정보가 담겨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복들 속에는 두 가지 차원의 확실한 내용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2절에는, 아브라함 자신이 여호와로 인하여, 복의 뿌리요 시작이요 근원이 되는 복입니다. 

3절에는, 그와 그의 후손이 받은 복을 이웃에게 나누어서 모두가 함께 살게 하는 복입니다.

 

내용은 크고 벅찹니다. 일단 받게 되면 운명이 바뀔만한 복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복들은 성격상 조건부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개의 복들을 하나의 패키지(package-일괄처리)로 함께 묶어 주신 것입니다. 그 바람에 아브라함은, 그 복들을, ‘선택의 여지가 없는 패키지 축복’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 바람에 그가 만일, 그중에 하나만 취하려는 순간, 그 둘 전체를 잃게 됩니다. 따라서 이 복을 받아 감당하려면, 전 생애적인 노력과 헌신이 요청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 복을 살펴봅시다. 인간이 어떻게 복의 근원이요 뿌리가 될 수 있을까요? 스스로는 절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복의 원천(源泉)되신 하나님과의 절대적인 관계만 형성되면,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여기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사랑’이 절대적입니다. 십계명과 예수님으로부터 요청된 수준, 즉 ‘내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 사랑하라’는 지시만 따르면, 하나님이 그를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십니다(신6:5,막12:30참조).

 

두 번째 복은 어떻습니까? 내가 받은 복을 나 혼자 즐기지 아니하고, 받지 못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며 사는 일입니다. 이것은 얼마든지 인간이 할 수는 있는 일입니다. 마음을 열고 펴서 살려는 분명한 의지(意志)만 있으면 됩니다. 그래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내려 주신 복, 즉 당신의 백성 된 이들에게 내려주신 복은 바로 그런 복이었습니다! 

 

그러면, 궁금합니다. 하나님은 왜 이 두 개의 복들을 하나로 묶어 주셨을까요? 인간이 원하는대로 취할 수 있도록 따로따로는 안 되는 걸까요? 이유가 분명히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신 인간은, 한없이 이기적이고 독선적이어서, 복을 받으려는 열정은 강하지만, 나누어주려는 스스로의 자비와 긍휼의 마음은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둘을 하나로 묶어주어야, 비로소 인간이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면서 사는 건강하고 균형 잡힌 존재로 되어서, 하늘 백성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고 보신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나님 사랑과 인간 사랑이란 이중 계명을 하나의 구원의 조건으로(옵션으로) 꽉 묶어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는 두 복의 분리로 인한 인간개입과 장난을 막고, 오직 당신만이 온 세상과 만민의 생명과 삶을 친히 주관하시는 참 신임을 보여주시고자 함이었습니다. 

 

이렇게하여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들은 그 후손들로 이어지면서, 세상에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그 특징은 모든 생명체들의 두뇌(頭腦)가 되고 머리가 되는 복으로 나타났습니다. 원주민들이 못 보는 것을 나그네인 그들이 먼저 보았고, 듣지 못하는 것을 먼저 들으면서, 몰랐던 새 영역들을 그들에게 알게 하면서, 그들의 머리와 눈과 귀와 입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복의 근원의 복은, 모세가 등장하고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서 꽃을 피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유대인들로서, 모세는 율법을 동족에게, 예수님은 복음을 세상 만민에게 전하였습니다. 온 세계 만민들은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원의 도리를 접하면서 훈련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빛 아래로 모여 들게 되었습니다. 그 빛 아래에 오는 이들은 누구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며, 입이 열리는 기적을 맛보며 이 세상을 선도하며 살게 됐습니다. 

 

문제는 이웃 사랑이란 이론과 권고만으로는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는 데 있습니다. 직접 몸으로 부딪치고 그 어려움을 체득해야만 알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러기에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택하신 모델이, 바로 후손들인 이스라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이웃을 알고 사랑하기’를 위한 출발은, 높은 곳이 아니라 낮은 곳과 밑바닥부터였습니다. 이집트에서의 노예 신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런 노예생활을 하면서, 짓눌리고 빼앗기고 나그네도 되어, 헐벗고, 병들고, 구금도 당하면서, 주변의 고통 하는 이웃들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좋은 이웃들이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 때문이었습니다. 

 

출애굽 후 그들이 가나안의 안정된 생활에 들어갔을 때에도, 그들에게는 스스로 뗄 수 없는 경고용 딱지가 한 장이 붙었습니다. ‘너희는 종(從)이었었다는 점을 절대로 잊지 말라. 그것을 망각하면 내가 멸(滅)하겠다’(신15:15을 비롯한 신명기 전체). 그러면서, 그들의 새 땅에서의 삶에는 언제나 주변의 고아-과부-나그네-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생활들이 끊임없이 요구되었습니다. 사실, 그런 이웃사랑과 더불어 사는 삶이 잘될 때, 이스라엘은 매우 건강했습니다. 잠언이나 전도서 등의 지혜문학의 말씀들도 그들의 이웃 사랑과 평화로운 삶을 격려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한순간 비극에 빠져 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등을 돌리면서였습니다. 조상 아브라함이 받았던 패키지의 복들을 폐기해 버리면서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세상의 왕정(王政)체제를 택하고, 권력의 맛과 돈의 맛에 빠져들면서, 첫번째 계명만 붙잡고, 두번째 계명을 포기한데서 나왔습니다. 인간을 신분과 계급에 따라서 차별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바람에 그들은 이웃 사랑을 하나님 사랑에서 분리하여, 오직 하나님 사랑만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매우 격하게 분노하셨습니다. 그것은 약속과 계약 위반이었고,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포기한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신 일들을 택하고 나왔기 때문입니다. 약자를 착취하고, 불의로 재물을 모으며, 힘없는 자 위에 군림하면서-, 당신 앞에 나와서는 흠없는 자처럼 예배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행태를 보신 하나님은 그런 제사를 역겨워하시며 거부하셨습니다(선지서들). 당신을 성전 안에서 제물이나 받고, 복이나 베풀어주는 신으로 취급하며, 세상일과는 상관이 없는 신으로 취급하는 형태를 성토하셨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종교를 죽은 종교로 만들었고, 모든 백성들을, ‘길 잃은 양들’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 잘못된 얽힘으로 구원의 길을 잃어버린 양들을 구하고자 오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처음의 복의 실체를 되찾아 주시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일 때문에, 주님은 당시에도 하나님 사랑만 강조하고 이웃사랑은 외면하며, 편협한 종교관으로 수많은 죄인들만을 양산하던 종교 지도자들과 정말 목숨 걸고 싸우셨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뽐내지만, 실상은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공격하셨습니다(요8장). 

 

그러면서, 주님은 하나님 사랑을 첫째로, 이웃 사랑을 둘째로 지키는 것에서 영생이 주어질 것임을 힘써 가르치셨습니다(막12:28-31참조). 그러면서 당신 자신은 친히, 이웃 사랑을 위한 구체적인 모델이 되셨습니다. 그들 종교와 사회가 외면했던 죄인들, 여자들, 아이들, 병자들, 가난한 자들, 이방인들- 같은 삶의 그늘진 영역에 소외되어 있는 자들을 찾아가 교제하시며 그들의 친구로 사셨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소자들을 선대(善待)한 일들이 곧 당신에게 한 일이라면서, 주님은 세상의 약자들과 적극적인 연대를 고취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을 할 수 있는 여건을 갖고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영벌(永罰)이 있으리라고 경고하셨습니다. 

 

죄인 삭게오의 이웃 사랑에로의 회심을 아브라함의 후손의 행위로 높게 평가하셨고, 오늘 복음서 본문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강도만난 이웃에 대한 행위도 최상의 이웃이란 평가를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과 목회의 방향은 과연 어떠한가요? 하나입니까, 따로따로 입니까? 

 

교회 시대를 여신 성령의 사역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영이시면서 아들의 영이신 성령의 목표도 다를 바 없습니다. 성령은 예수의 복음을 앞세워 세상 곳곳에 교회를 설립하면서, 아브라함의 그 복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온 지구촌에 심으셨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도 바로 그 뜻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기에 갈라디아 교회는 율법을 통한 구원론으로 교회를 흔들던 거짓 교사에 넘어가면 안 되었습니다. 율법을 쫓으면 유대인만을 위한 소승(小乘)신자를 만들지만, 예수의 복음은 세상 만민을 다 살리는 대승(大乘)적 교회를 이룬다고 일깨웠습니다. 

 

지금의 우리들의 목회(牧會)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교회는 아브라함의 그 믿음과 그 복들을 온전히 전승하고 계십니까? 요즈음의 한국교회 일반은 이 아브라함의 복들을, 옛 이스라엘의 모습처럼, 사탄에게 빼앗겼습니다. 명성교회 현상은 아브라함의 복의 흐름을 거부하고, 분리,독점하려는 행위에서 나온 것입니다. 미국의 트럼프나 일본의 아베의 정책도 그 흐름입니다. 

 

특히 교회가 누구보다도 큰 복을 받았으면서, 이제는 나눔 대신에 지키는 일에 급급합니다. 주변의 고통 하는 이웃들을 얕잡아보고, 자신과 조금만 달라도 담을 쌓고 배척합니다. 너무 보수화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극우(極右)세력의 온상까지 되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걱정을 듣는 교회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칭찬은 규모가 크고 가진 것들이 많다고 받는 게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받은 ‘경천애인’의 그 지침을 제대로 실천할 때 받습니다. 

 

오늘 우리 총회 실행위원회는 특별한 소명(召命)받은 자들로 모였습니다. 추락(墜落)하는 교회를 비상(飛上)하는 교회로 되돌려 세워야하는 소명을 받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지금의 위기(危機)를 새로운 기회(機會)로 되돌리라는 우리 주님의 소명도 받고 여기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들 역시 ‘내우외환(內憂外患)’으로 시달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총회적으로도 해결할 과제도 많고, 국가적으로는 최근 일본의 경제침략으로 인한 새로운 위기감이 우리 모두를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싸움의 결말은 일본의 힘에 의해 판가름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성숙하게 대처하느냐 에서 결판날 것입니다. 우리의 어긋남에 하나님께서 ‘정신 차리고, 다시 시작하라’며 일격을 가하신 것이라고 보입니다. 

 

우리가 이 시점에서 대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아브라함의 복인, 하나님 사랑과 사람 사랑의 이중 계명을 온전히 실천하는 우리들이 되는 일입니다. 그럼으로써 교회를 교회되게 하고, 교단을 건강하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복들은 모두 이 계명 수행 여부에 담겨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합시다! 주님의 요구대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 기장 교역자들이 이 영성만 활성화되면, 한국교회를 크게 갱신하는 주역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웃 사랑도 적극 감당해야 합니다. 내 몸처럼, 아니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듯,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불의한 짓은 없어야 하고, 서로 상처 주는 언행을 조심하며, 부족과 연약함을 붙들어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힘은 ‘서로 사랑’에서 나옵니다. 그게 무너지면 모두를 잃게 됩니다. 

 

영적 기초가 강한 교단과 교회와 성도들을 만듭시다. 하늘과 땅을 소통시키는 우리를 세웁시다. 이 거룩한 부름에 응답하여, 이 혼란한 나라와 교회에 희망과 생명의 공동체를 이룹시다.   ( 2019. 8.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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