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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설교(1) - " 네 이름이 무엇이냐 "

관리자 2022-08-17 (수) 15:17 1년전 151  

본문) 창32:22-32, 눅19:1-10, 행1:6-8 


o 며칠 전에는 뜻밖에 전북 김제군 모악산 근처에 있는 금산(金山)교회를 방문하였다. 그 교회는 1905년에 세워져서, 지금까지 남녀(男女)가 분리하여 출입한 곳이 보전된 곳으로 유명하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한국 교회사에 유명해진 두 분의 위대한 신앙 위인들이 있는 교회로도 유명한 곳이었다. 한 분은 조덕삼 장로였고, 또 한 분은 이자익 목사였다. 


조덕삼은 예수 믿는 소문난 부자였고, 이자익은 영남에서 가난하고 배고픈 신세를 면하려고 떠돌이하다가 그 집에까지 흘러들어온 젊은이로 그 집의 머슴이 된 사람이었다. 그 바람에 그들은 주인과 종이 함께 예수 믿게 되었다. 그런데 이자익이 얼마나 신실하게 믿는 신자가 되었는지, 얼마 후 교회의 장로를 선출하게 되었을 때, 그 집의 주인과 종 모두가 장로 후보가 되어, 경선(競選)을 치루게 되었다. 결과는 주인이 아니라 종인 이자익이 피택이 된 것이다. 얼마나 당황스러웠겠는가? 이자익이 더 이상 그 집의 머슴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보였다 


하지만 역사는 그 때부터였다. 패배한 주인 조덕삼이 깍뜻이 종 이자익을 장로로 섬겼다. 이자익 역시 변함없이 조덕삼을 주인으로 잘 섬겼다. 서로 잘 섬겼다. 이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된 교회는 그 다음에 조덕삼까지 장로로 선출했다. 그러자 조덕삼은 자기의 머슴인 이자익의 훌륭한 믿음과 인격에 감동되어, 그에게 목회자가 되도록 길을 열어주고 모든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바람에 이자익이 목사가 되자, 이번에는 모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하고 섬겼다. 


그 인격과 신앙 역사에 감동한 한국장로교회는 그 이자익을 교단의 총회장으로 3번이나 추대했다(13,33-34회). 이런 역사는 우리 한국 장로교회 역사에서 처음 있는 사건이었다. 대체 누가 이런 아름다운 역사를 만든 것일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신가!  


o 이 세상에는 삶의 주인(主人)이 바뀐 사람들이 많이 있다, 세상에서 예수로, 돈과 명예에서 예수로, 인간 자랑에서 예수 자랑으로 자기의 주인이 뒤바뀐 이들이 많다. 그 바람에 인생(人生)이 완전히 바뀐 사람들이 많다. 가치관이 바뀌고, 존재 이유가 바뀌고, 자랑거리들이 바뀐 사람들이 많다. 그게 어떤 사람들인가? 바로 예수 만나서 물과 성령으로 새 이름을 받고, 새 인생, 새 생명을 부여 받은 사람들이다. 확실한 것은, 이 세상은 바로 이 사람들 때문에 망하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이다.  


o 여러분은 어떤 분들인가? 주인 교체가 이미 이루어진 분인가? 아니면, 여전히 내가 내 몸과 인생의 주인인가? 아니면 세상과 돈과 물질들이 나를 지배하며 살아가고 있는 건가? 주인이 교체 되었다면, 그래서 얻어낸 여러분의 존재를 대변해 줄 새 이름은 진정 무엇인가? 


o 분명한 것은 현재 여러분이 평생을 사용해 온 고유명사인 개인 이름은 여러분의 영혼과 영생을 결코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 이름에는 혈과 육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새 이름들이 필요하다. 새로운 주인을 모신 자라는 표지인 새 이름이 필요하다. 그 이름은 하늘이 부여하신 이름이어야 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당신의 종, 당신의 자녀, 당신의 백성이라는 뜻으로 부여하신 새 이름이 절대 필요한 것이다. 그 이름은 소속과 성격과 지위와 자격 등을 표시하는 것이기에, 필요한 것이다. 


예컨대, 목사, 장로, 권사, 집사, 교사, 선교사 등의 성직(聖職)의 이름들, 거룩한 의미를 부여받은 이름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이름이나 자격들을 상징하는 이름들이 필요하다. 바울 사도는 엡3:14에서, ‘이름을 주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여러분은 무슨 이름을 부여 받았나? 특히 교회 이름이<새힘교회>이다. 이 이름에 대하여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고 사시는가? 새힘교회라는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은 대체 무엇인가? 


이런 측면에서 나는 앞으로 여러분들과 몇 주간에 걸쳐서, 새힘교회 공동체의 신앙 정체성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 지를 계속 증언하려고 한다. 성령께서 나에게 주신 기회를 통하여, 앞으로 이 고비를 넘어 더욱 성숙한 단계로 나아갈 교회되게 하기 위한 디딤돌을 놓고자 한다. 사도행전의 말씀과 안내를 받으면서, 여러분과 함께 기도하면서, 현재의 진통이 더 나은 거룩한 생명체의 해산의 기회로 만들어보자. 첫 주일인 오늘의 주제는 <네 이름이 무엇이냐>이다. 


-나는 오늘의 세 본문에서 그 이름이 바뀐 사람들 / 세 부류의 사람들을 소개한다. 


1) 야곱이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이긴 자’란 이스라엘(Israel)이란 새 이름을 주목하자. 


본문의 주인공은 족장 야곱이다. 그가 어쩌다가 그토록 놀라운 역사의 인물이 되었는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과의 목숨을 건 씨름에서 이겨냈기 때문이었다. 즉 세상의 그 어떠한 힘과 

권세를 이겨낼 신령한 하늘의 힘(싸우지도 않고 이기는 힘)을 여호와로부터 넘겨받은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란 민족적 새 이름을 얻어낸 존재가 된 까닭이었다.    


그 과정을 잠시 복기(復碁)해보자. 귀향길 오른 야곱은 마지막 관문에 다다랐다. 바로 형 에서

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가 20년 전에 타향(他鄕)인 하란에 왔던 이유도 형 에서를 피하고자 

함이었는데, 귀향길에 오른 지금도 형 에서와 또 다시 피할 수 없이 만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그 일이 하늘 장벽처럼 높고 부담이었다. 사실 그는 20년 전에 아버지의 눈을 속이

고 형의 장자권을 훔친 일로 인하여, 분노하던 형을 피하여 외갓집으로 도피했었는데, 귀향길

인 지금도 여전히 형 에서는 두려웠다. 그에게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잃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피할 길이 하나 있었다. 바로 20년 전 노숙하던 벧엘 광야에서 자신을 친히

찾아 주셔서, 자신의 귀향길은 물론 모든 것을 다 이루기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굳게 약속해 

주셨던 여호와가 계셨기 때문이다(창28:12-15참조). 소위 ‘사닥다리 계시’에 대한 추억과 믿음

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그 날 밤, 가족과 가축 모두를 다 얍복 나루 건너편으로 먼저 떠나 보

낸 후, 그만 홀로 여호와께 나아가 기도로 매달린 것이다. 밤새토록 매달렸다(22-24절 참조). 


거기서 야곱은 뜻밖에도 응답을 외면하려는 그 초월(超越者)에게, ‘내게 축복하지 않으시면 당

신을 결코 가게하지 않겠다’며 완강히 매달렸다(26절). 자신의 허벅지 관절이 무너지는 고통이 

왔어도 매달렸다. 그 바람에 그 초월자는 자신이 야곱을 뿌리칠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에게 

이름을 묻는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27절). 그가 자신이 야곱임을 말하자, 그 초월자는 새 이

름인 ‘이스라엘’을 주셨다. 곧 ‘너는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누어 이긴 사람’이라는 큰 뜻이 담

은 이름이었다(28절). 그래서 여호와가 공인(公認)하신 새 존재가 출현하게 된 것이었다. 

      

o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자. 하나님이 나약한 인간에게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복을 주시는 

일은 무엇을 말하는가? 신이 인간에게 패배하는 일 자체가 가능한가? 본질상 불가능하다. 하

지만, 그 신이 진정 진리이시고 사랑이시며 정의로우신 분이라면, 인간에게 다음의 경우들일 

때, 가능하다. 그 형식은 ‘당신이 져주시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대략 두 가지 경우가 있다. 


① 그것은 언제일까? 여호와 자신이 먼저 약속의 말씀을 주셨을 때, 인간이 그것을 근거로 삼

아서, ‘때가 되었으니, 그 약속을 이루어 달라’며 매달리고 나오게 되면, 하나님도 결국 허락

하시게 된다. 야곱이 여호와께 승리를 얻어낸 경우가 바로 그 지점이었다. 그 절박한 순간에 

야곱이 여호와를 상대로 자신이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로부터 20년 전에 약속으로 

받았던 그 말씀이었고, 또 그것을 반드시 성취해 주실 여호와를 향한 믿음이었다. 


사실 야곱은 그 여호와가 주셨던 약속들과 그 믿음과 그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열정으로 그 

험한 20년간의 힘겨운 타향살이와 자신에게 폭풍처럼 몰려왔던 대규모의 가족들과 재산들 형

성에 따른 숱한 역경들을 능히 감당할 수 있었다(고전10:13참조)  


② 또 하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자식처럼 기도하며 매달리는 경우이다. 이는 예수님

이 제자들에게 직접 가르쳐 주신 방법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6:9참조). 이런 기도와 믿음으로 하늘 아버지

께 매달려 사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결과는 참으로 놀랍다. 하나님이 그런 자에게 아버지(부

모) 역할을 친히 수행하시는 모습들을 제대로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부모와 자식 관계가 형성된 모습에서 나타나는 현상들을 보라! 대체 자식은 무엇으로 사나? 

부모의 전적인 은혜(恩惠)로 살지 아니한가! 나면서부터 성장하기까지, 어리석고 못나도 자기 

자식에게는 책임지는 이들이 바로 부모이다. 특히 놀라운 것은 떼쓰는 자식들의 힘이다. 하나 

묻자. ‘자식 이기는 부모가 있다, 없다?’ 어느 것이 현실인가? 사실 부모들은 떼쓰는 자식들에

게 계속 밀리면서 산다. 자식들에게 져주면서 사는 자들이 부모들이다. 


아주 묘(妙)한 역설(逆說)이다. 자식들은 그 바람에 부모의 힘을 넘겨받아서 성장한다. 야곱이 

얍복에서 초월자로부터 받은 힘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넘겨받은 힘이었다. 하나님의 거룩하

신 힘과 져주시는 힘이었다. 그 바람에 야곱은 인간의 힘을 자랑하고 위세부리며 다가오던 형 

에서를 전혀 다른 차원의 힘으로 가볍게 따돌릴 수 있었다. 하나님 역시 당신에게 매달린 야

곱에게 ‘져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심으로서, 그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활짝 열리는 ‘브니엘의 

새 아침’이 열린 것이다(30-31절 참조).  


o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런 하늘 아버지의 사랑의 힘을 받고 사는 자들이다. 은혜의 힘, 되게 하시는 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힘으로 살아간다. 세상의 상식과 지식과 공식도 뛰어넘는 내 하늘 아버지만이 해결해 주시는 은혜(恩惠)의 힘이 뜨겁게 작동하고 있어야 한다.  


2) 삭게오가 예수로부터 새롭게 받은, ‘너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름을 보유해야 한다.  


본문의 주인공은 유대 땅 여리고의 남자, 삭게오이다. 그런데 그는 당시에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의 ‘낀 세대로 살고 있던 인물’이었다. 


하나는 세속의 영광과 부유와 명예를 추구하며 지낸 세속인(世俗人)이었다. 그래서 그는 상당한 수준의 목표치를 이루기도 한 인물이었다. 성경은 그를 ‘세리장이요 부자’라 간략하게 말하지만(2절), 사실 그는 여러 부족들이 무역(貿易)을 위하여 그곳 여리고의 들어오고나가는 일을 관장하는 세관의 책임자로서, 거기에서 수금한 많은 돈을 로마정부에 바쳐야하는 직무를 수행하고 살았으며, 자신도 수중에 상당한 부를 축적해온 자였다. 그 바람에 그는 주위의 사람들로부터 ‘죄인(罪人)’이라는 따가운 눈총도 항상 받으며 살아왔다((7절).   


또 다른 하나는 그런 자신에 대한 양심적 괴로움에 시달리며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가 선한 일에 앞장 선 예수께서 그곳을 방문하신 그 날에 보여 준 일련의 행동들은 그의 평소의 내재적 심정의 일단을 매우 강하게 보여 준 것이다. 예컨대, 예수를 보고 싶었으나 인파에 밀리자, 체면불구하고 가로수인 돌무화 나무에 올라가서 그리로 지나가시는 예수를 보고자 하는 마음의 간절한 태도를 여과없이 드러낸 것이다. 


그 일로 그가 예수의 인정을 받게 되자, 그는 아무도 할 수 없는 돌변한 마음을 적극 드러냈다. 그가 자신의 재물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겠으며, 토색한 것은 4배로 계산해서 다 갚겠다는 선언하고 나온 것이다. 이것은 그만큼 자신의 평소의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과 함께, 해결의 방향까지도 고민하며 살았음을 보여준 모습이었다(8-9절 참조). 


결국 주님은 이래라저래라 지시 한마디 하지도 않은 체, 그를 통체로 인정해 주시고 만다. 그와 그의 집에 구원(救援)이 임했음과, 그도 이제는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인정해 주신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삭게오와의 만남을 통하여,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 곧 ‘잃어버린자를 찾아 구원하려 하심’이 성취된 일을 크게 기뻐하셨다(10절). 


이 삭게오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삭게오의 회심도 아주 중요하다. 자기 탐욕(貪欲)중심의 삶을 내려놓고,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며 살겠다는 그 회심이 너무도 중요했다. 그 바람에 그는 새 이름, 구원받은 자들만이 공유된 이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이다. 이 이름은 예수 믿은 모든 자들도 반드시 공유해야만할 복된 이름이 아니던가!!  


o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가 절대 관심해야 할 대목이 있다. 그것은 삭게오의 그런 회심과 새 생활을 이끌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과 능력이다. 대체 ‘주님의 무슨 마음과 힘’이 삭게오의 삶을 그토록 360도로 뒤바꾸어 놓은 것일까? 우리는 이제 그 신비로운 힘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이 삭게오에게 하신 일을 주목하라. 주님은 그를 단 한마디도 책망과 질책으로 대하지 않으시고 오직 긍휼과 자비의 마음으로 품으셨을 뿐이다. 그의 삶의 문제점들에 집중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변화받고 싶어 하는 그 아름다운 심정에 주님이 편(便)드신 행동을 보여주셨을 뿐이었다. 그래서 주님은, ‘삭게오야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5절). 바로 그 한마디에, 새로운 삭게오가 역사 속에 탄생할 수 있었다  

3) 실패(失敗)인생을 새롭게 고쳐 쓰시는 거룩한 <그리스도의 새 힘>을 주목해야만 한다.  


주님은 당신의 나라를 위하여, 제자들과 사람들을 택하여 불러 쓰실 때, 어떤 사람들을 쓰셨나? 의인인가, 죄인인가? 영웅인가, 모자란 인간인가? 갖춘 사람인가, 못갖춘 사람인가? 잘 나가는 자들인가, 별 볼 일없는 자들인가? 신선한 자인가, 중고품 인생인가? 성공한 자인가, 실패한 자인가? 대답은 분명하다. 모두 후자들이다. 요즈음도 쓰레기 폐품처리가 큰 문제인데,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폐품(廢品)처리에 능하신 그리스도의 신선한 능력에 주목하셔야 하겠다.  


대답은 행1:8에 있다. 다 함께 복창해보자. 오직 성령이 주시는 권능을 받게 될 때이다. 여기에서 권능이 무엇인가? 바로 힘(power)이다. 새 힘이다. 여러분 교회가 붙들고 계신 새 힘이다. 그 힘이 있으면, 여러분은 야곱의 이스라엘이 되고, 삭게오의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 


o 새 힘교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전의 성일에서 <새힘>으로 개명을 받은 이들 아닌가! 

그렇다면, 이제라도 이름값을 하셔야 한다. 그 이름값은 오직 성령의 힘을 받게 될 때에만 발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새힘교회의 이름값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란다. 이 일은 여러분의 앞길을 결정 짓게 할 것이다. 그러기에 이제 남은 것은 오직 성령이다!! 새 목회자 모시기 전에, 여러분들이 하실 일은 성령 받는 일이다. 그래서 여러분의 새힘교회에도 조덕삼장로가 나오고, 이자익 목사가 나오게 하시기 바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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