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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절(6) - 세 본문을 어떻게 보아야할까 / 종려주일. 4.19혁명기념주일

관리자 2019-04-12 (금) 00:28 8일전 23  

본문) 요12:12-19, 슥9:9-12, 빌2:1-11

 

인류 역사는 처음부터 전쟁(戰爭)과 평화(平和)란 두 대립된 세력들의 갈등과 대결의 역사였다. 성경(聖經)도 이 점을 처음부터 크게 문제시 하였다. 곧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로 말이다. 인류의 역사의 출발과 진행도, 아벨로 대표되는 평화의 사람들과 가인으로 대표되는 폭력의 사람들의 대립적인 역사로 출발되었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음을 보여 주려고 했다. 다만, 성경은 인간들의 대결과 갈등의 원인이 하나님과의 관계 파괴에서 나온 부작용들임을 예리하게 지적해주고 있다. 

 

그런데, 그런 어긋한 역사가 어찌 세계만의 역사이고, 성경만의 지적인가? 우리 한국의 근대와 현대사에 나타난 커다란 아픈 사건들의 이면도 모두 이러한 전쟁과 평화란 두 세력의 무서운 충돌(衝突)의 산물로 가득하지 아니한가? 아니, 이런 어둡고 불길한 그림자들이 지금까지도 우리 한반도와 그 주변에까지도 짙게 드리워 있지 아니한가! 

 

일제 36년간의 통치사건이 그랬다. 금년 제100주년을 맞이했던 3.1기미독립선언과 만세(萬歲)사건이 그렇다. 71년째가 된 우리 4.3 제주 사건도 그렇다. 69년째가 된 6.25 한국전쟁도 그렇다. 59년째가 되는 4.19민주혁명도 그렇다. 5.16 군부 독재와 그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70년대의 유신(維新)세력의 등장도 그랬다. 39년째가 된 5.18광주민주화항쟁도 그렇다. 제주 강정마을에서의 해군기지 건설을 막기 위한 오랜 투쟁도 그랬다. 모두가 이 땅에 엄존하고 있는  가인의 세력과 아벨 세력의 무서운 충돌에서 발생한 사건들이었다. 

 

역사의 평가는 한결같다. 공통적인 것은 그 사건 발생 초기에는 가인세력이 압승(壓勝)했다. 강압된 힘으로 밀어붙여서 발생한 것이라서,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들이 무참히 희생당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머잖아 그 세력은 곧 아벨의 세력에 뒤집혀졌다. 가인은 죄인들로 판명되어 역사의 단두대(斷頭臺)에 올랐고, 두고두고 역사의 심판을 당해오고 있는 중이다. 

 

그러면 가인은 자기들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건 일시적으로 자기들이 ‘밀렸다’고 볼 뿐이지, 패배했다고 시인하지 않는다. 전혀 회개할 줄 모른다. 그게 가인의 세력의 정체이고 특성들이다. 그들에게는 생명이나 역사나 정의나 공동체 구원 등에는 아예 관심이 없다. 다만 자기들과 자기 집단의 손익계산에만 관심할 뿐이다. 그들의 마음은 이미 사망의 먹구름에 사로 잡혀 있을 뿐이다. 그런 가인 세력은 패거리 정치에 능하고, 부끄러운 줄을 모르며, 상대의 약점만 보이면 그것으로 판세를 뒤집어서, 자기들의 세상을 또 다시 만들려고 한다. 

 

최근 우리의 사정도 그와 다르지 않다. 소위 제일 야당인 자유한국당(자한당)에서는 ‘우리도 북한처럼 핵(核)무장을 하자’는 이야기를 계속한다. 여러분은 그 주장을 어떻게 생각하시는가? ‘북한이 핵 강국이 되었기에, 우리도 핵무장하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옳다고 보시는가? 아니면, 핵 대 핵의 대립이 아닌, 대화와 평화의 힘으로 하나 됨을 모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보시는가? 이 좁은 한반도가 남북이 서로 핵무장을 하면, 과연 평화와 통일이 올 것인가, 아니면 더욱 무섭고 살벌한 대결구도로 나아갈 것인가? ‘핵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것인가’가 궁금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다. 우리가 믿는 주님이 전쟁과 평화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셨는지가 더욱 중요하다. 분명한 것은 주님은 서로의 싸움과 대결을 조장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보다는 칼을 빼들고 휘둘렀던 제자 베드로에게,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마26:52)라고 말씀하셨고,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마5:9)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주님은 언제나 싸움이나 대결이 아닌 평화와 화해였다! 

 

마침 사순절 마지막 주일인 종려주일인 오늘은 예수께서 당신이 이 세상과 만민에게 누구신지를 비로소 밝혀주신 바로 그 날이다. 종려주일을 우리가 제대로 기념하려면, 오늘 세 본문에 나타난 주님의 참 모습을 제대로 보고, 제대로 그를 영접하는 데에 있음을 알아야 하겠다. 

 

그렇다. 오늘은 예수님 자신이 온 세상과 만민의 왕(王)으로서 입성하셨음을 인정하는 날이기에 매우 중요하다. 사실 예수님은 평생에 두 번, 백성들에 의하여 왕으로 옹립(擁立)되는 기회가 있었다. 모두 요한복음이 전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첫째는 오병이어로 수많은 이들이 배불리 먹고 남았던 표적을 보았을 때였고, 둘째는 바로 오늘 그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때였다. 중요한 것은 백성들의 그런 움직임에 대한 예수 자신의 반응이었는데, 첫째 때에는 예수께서 아예 산으로 도망하셔기 때문에 그런 옹립계획이 무산되었으나(요6:14-15), 이번에는 주님이 그들의 왕의 옹립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셨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러분, 생각해 보시라! 당시 세상에는 막강한 힘을 가진 황제와 왕이 멀쩡히 존재하고 있었고, 게다가 예수는 아무런 정치나 경제적인 힘과 조직도 가진 것이 없었다. 특히 어떤 경우에도 한 영역에서는 두 명의 왕은 있을 수 없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백성들의 왕의 옹립을 수용한다는 것은 보통 큰 문제가 아니다. 평화는 없고, 반역죄만 묻게 될 뿐이다. 그게 상식(常識)이었다!

 

그런데도 예수의 행보는 그런 세속적 상식이 주는 두려운 경고(警告)에 아랑곳하지를 않았다. 그저 힘없는 백성들의 뜻을 묵묵히 수용하며 나아가셨다. 다만, 예수님은 ‘한 어린 나귀를 타시고’(14절) 입성하시므로서, 당신이 진정 누구인지만은 분명히 보여 주고자 하셨다. 즉 공의와 구원을 위해 오시는 왕은 ‘작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리라’(슥9:9)는 선지자 스가랴의 예언이 있었는데, 지금 당신이 그 예언의 성취자로 오심을 입증하고자 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어리석고 무모하신 이인가? 그러실 리가 없다. 그렇다면 당신의 입성이 곧 피할 수 없이 죽임을 당하는 자리라는 것을 잘 아셨으면서도, 예수님은 그런 절박한 순간에서 어찌 몸을 빼내지 아니하시고 아예 그 속에 온 몸을 던지셨다. 바로 이 결정적인 표적(標的)이 그 누구도 대체가 불가능한 영역으로서, 오직 흠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어린 양(羊)되신 예수님만이, 하늘과 땅에 보여주실 몫이었다! 

 

그러면 예수님이 앞에 놓인 죽음을 끊고, 반드시 이루고자 하신 것은 무엇이었나? 창세 이래로 가인으로부터 흘러내려온 폭력과 죽임의 역사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자 함이었다. 동시에 당신으로부터 시작될 평화의 세력과 힘이 세상을 구원해 낼 수 있는 새로운 능력임을 보여주고자 함이었다. 진정한 구원의 힘의 이동(移動/shift)이 당신의 십자가 대속사건을 통하여, 폭력과 억압으로부터 평화와 공의에로 옮겨오게 되었음을 보여주고자 하신 것이다. 

 

인류는 바로 이 예수와 그의 십자가를 통하여, 평화의 힘이 이 세상의 진정한 주류(主流)로 등장하게 됨을 맛보기 시작하였다. 그로 인하여, 인류(人類)와 이 세상 역사(歷史)는 진정한 왕 중의 왕, 즉 참 평화의 왕이 등장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이런 시각으로 오늘의 세 본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그 변화된 힘의 앞잡이가 바로 교회 공동체였다. 

 

복음서를 다시 보자

 

요한이 전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기사는 여러 가지로 타 복음서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예수를 왕으로 옹립하려는 사람들이, 다른 공관복음서들과는 달리, 당시의 일반 대중들이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예수를 경험하면서, 그야말로 로마제국에서 신음하는 자기들을 정치적 경제적 시련기에서 해방해 줄 메시아로 기대하면서 영접하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제자들이 뒤늦게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까지 하신 후에 깨달았던 스승이신 예수는 대중들이 기대와는 달리, 구약 스가랴 예언의 성취자로 오신 분으로서, 당시의 유대인만의 왕이 아니라 온 세상 전체가 정말 필요로 하는 왕, 즉 평화(平和)의 왕으로 오신 분이셨다. 

 

1) 그 해의 유월절은 온통 나사렛 예수가 최대의 화두(話頭)였다. 두 가지 연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예수에 거는 백성들의 기대가 최고조에 달하면서 그를 왕에 옹립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예전의 오병이어 사례 이외에도, 최근에는 죽은 지 4일이나 지난 나사로를 무덤을 찾아, 다시 살려냈기 때문이다(17-18참조). 또 하나는 평소 예수의 대한 적대감을 품었던 유대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지도자들이 그런 예수를 자기 나라와 자기들을 망칠 위험인물로 보면서, 이제는 죽여야 되는 인물로 몰고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11:47-53 참조). 예수에 대한 ‘절대 지지와 절대 타도’가 그 해 유월절 현장을 그렇게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2) 입성하는 예수를 환영한 무리가 유월절을 지키러 모인 보통 유대인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이미 승리의 표시인 ‘종려나무’를 들어 흔들면서, 자기들의 왕이 될 예수에게 미리 승리와 영광을 축복하는 행동을 보였다. 그들에게 예수는 다윗의 자손으로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스라엘의 왕이었고, 그런 믿음을 담아 입성하시는 예수을 향하여 ‘호산나’(=도와 주소서)를 외쳐댔던 것이다(12-13절). 

 

3) 정작 당사자이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보이신 반응은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이 전부였다(14절). 하지만 이 행위가 중요한 것은, 이 모습이 곧 구약의 스가랴 예언의 성취가 예수에게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충분히 보여준 것이었기 때문이다(15-16, 슥9:9.하 참조). 그 예언에서는 오시는 분은 세상에 공의(公義)와 구원을 베푸시는 왕(王)으로서, 그 성품이 겸손하셔서(슥9:9하 참조) 입성하실 때도 세상의 일반 왕이 타는 말이 아니라 나귀 새끼를 타셨다. 그러면서 그 왕의 결정적인 역할은 세상의 전쟁을 끊어내고(병거와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세상에 평화를 전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전쟁이 더 이상 정치적 수단이 되지 않는 세상을 이루어낼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슥9:10절 참조). 

 

4) 적어도 그 때의 뜨거웠던 분위기는 어느 바리새인의 일갈(一喝)에 모두 담겨 있었다고 본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19절). 

 

예언서의 내용을 다시 보자

 

스가랴는 큰 선지자는 아니었으나, 오신 메시아가 유대만을 위한 왕이 아니라 온 세상의 왕이시고, 그것도 공의와 구원을 베풀면서 범람하는 세상의 모든 전쟁(戰爭)을 끝내고 평화(平和)를 정착시킬 왕으로 오실 것임을 예언하므로서, 평화의 새 세상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커다란 기다림의 신앙을 갖게 하는 큰 역할을 하였다(9-10절). 

이 예언이 선포된 때는 기원 전 4세기, 희랍의 알렉산더 원정 이후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때는 제국(帝國)들의 전쟁 지상주의와 약자들의 장탄식이 계속되는 상황이어서, 스가랴에게서 터져 나온 이 평화의 왕의 등장 예언은, 그 예언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는 정말 학수고대(鶴首苦待)하게 되는 메시아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보인다. 

 

1) 그 역사적인 예언이 바로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를 통하여 성취되었다(요12:-). 

2) 선지자의 예언은 오시는 왕이 어떤 방법으로 전쟁을 끝내고 평화의 세상을 만들 것인지까지를 담고 있어서 인상적이기도 하다(11-12절). 

 

평화의 방법은 바로 ‘왕의 언약(言約)의 피’이다. 당신의 십자가의 속죄의 피의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본다. 그의 잔을 약속의 잔으로 받는 이들을 통하여 평화의 물결이 온 세상에 흘러갈 것을 예고한 것이다. 특히 그 흐름의 전달자들은 ‘갇힌 자들이요 소망을 품은 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질 것인데, 그들이 누군가? 일차적으로는 바로 성령의 역사에 참여하게 된 교포들인 디아수포라들로 보인다. 이들은 성령을 통하여 평화와 구원의 예수를 만났고, 그의 선교명령으로 온 세상에 나아가, 평화와 구원의 공동체인 교회들을 세워서 그 예언을 이루고 왔잖은가! 

 

서신서를 다시 보자

 

본문은 사도 바울이 빌립보교회에 보낸 목회서신이지만, 내용은 원시 그리스도교회의 찬가(讚歌)였다. 유대인에게는 쉐마를 암송하며 지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이 그리스도 찬미 내용을 신앙고백으로 가슴에 담아왔다. 

 

1) 평화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교회 가족들은 서로에게는 다음의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1-4절). -같은 마음, 서로 사랑, 한 뜻과 한 마음, 다툼이나 허영이 아닌 겸손함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김. 자기 일과 함께, 다른 사람의 일도 함께 돌보아 보기.

 

2) 각자의 마음에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처럼, 한없이 겸손한 마음을 품어야한다(5-8절). -주는 하나님과 같으신 분이지만 자신을 부인하고, 오직 종의 마음과 행실을 스스로 취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인간의 간고(艱苦)와 죽음 아래에서까지 종살이하셨다. 

 

3) 아버지 하나님이 그런 그를 지극히 높여 주셨다. 천지에서 가장 뛰어난 이름의 소유자가 되게 하셨고, 그 속에 있는 모든 자들이 무릎을 그의 이름에 꿇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라 시인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9-11절). 

 

결론은 이렇다

 

우리의 손과 마음에도 평화의 주 예수를 환영하고 영접하며 뒤따라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종려나무를 들고, 호산나를 외치자. 평화의 일꾼, 평화의 교회, 평화의 민족, 평화의 나라 이루게 예수의 영과 능력과 힘을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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