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문) 사40:12~26, 막12:13-17, 엡1:15-23
오늘은 창조절 열 번째 주일이다. 한 해의 땀 흘림과 농사의 결실을 수확하는 본격적인 계절이다. 그러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보람도 클 것이고, 동시에 아쉬움과 함께 반성도 하게 되는 계절이기도 하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창조주 하나님의 솜씨는 기이하고 놀랍고 신비스럽다.
봄에는 눈에도 들어오질 않을 정도의 작은 씨앗을 그가 주신 광활한 대지에 뿌리게 하시더니, 여름에는 그것에서 솟아 나온 많은 새순(筍)을 무성하고도 굵게 자라게 하시며, 이 가을에는 거기에서 솟아난 신비하고도 풍성한 각종 열매까지 생산하고 추수도 하며 저장하게까지 하셔서, 그것들로 당신이 생존하게 하신 모든 지상의 생명체들로 하여금 그 열매들을 먹고 살게 하시는, 그 배려와 돌봄의 풍성하신 솜씨가 너무도 놀랍고 기이하며 신비한 까닭이다.
이런 동식물성 피조물의 비밀스럽고 신비로운 일대기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중 특히 우리 인간의 일대기는 더욱 경이롭기 그지없다. 곧 한 생명체의 탄생과 성장과 번성과 늙음과 떠남의 흐름 속에는 인간의 전체적 역사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한 생명의 출현이 독자적인 경우는 아예 없다. 40억 년의 생명 연대기에 연결된 존재로서, 그 전체 중의 하나로 온 것이다.
수십 대(代), 수백 대의 조상들이 담겨 있고, 종국에는 아담을 만나게 되며, 결국은 조물주 여호와를 만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이다. 동족의 피만이 아니다. 여러 민족의 핏줄이 자기 안에 와 있음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문화만도 아니다. 숱한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도 그의 핏줄에 담겨 있다. 그런 눈으로 보면, 한 개인은 그 사람만의 것이 아니다. 범(凡) 역사와 인종과 문화와 온갖 세상의 제반 구성원들이 지금의 자기의 원천(源泉)이다. 이런 사실을 깨닫게 되면, 대체 ‘나’라는 존재는 어떤 마음을 품고 사는 것이 마땅할까?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에게만 머물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을 산다고 지금만 생각하며 살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라고 해서 인간만 생각하지 않고 동식물과 자연도 함께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인간이라고 해서 조물주를 생각하지 않고 인간인 자기만을 생각하며 살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남자이지만 여자도 함께 생각하며 살아야 할 것이다! 극우나 극보수처럼 한쪽만, 또는 자기들만으로 치우쳐 살아서는 더더욱 안 될 것이다!
그러기에 언제나 ‘너’를 생각하며, 공유와 공존과 공생과 공영을 택하며 살아가야 마땅하지 않을까? 그러기에 창조주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흔들림 없이 견지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에 힘들게 살고, 가난하게 살며, 빼앗기며 살고, 아픔 속에 사는 이들에 대한 연민과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살아야 마땅하지 아니할까? 그게 곧 하나님 사랑이며 또한 자기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게 곧 나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살게 하신 조물주의 뜻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마침 오늘 열 번째 주일의 세 본문 내용은 이런 삼위 하나님의 놀랍고 압도적인 탁월한 능력과 지혜의 오묘함에 대한 증언들로 가득하다. 그러면서 그런 삼위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의 깊이를 맛보게 되는 자들이 결국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루고, 만물을 충만하게 하는 이의 충만을 따라서 이 세상 전체까지도 풍요롭고 생명력 있게 되도록 일하게 될 것을 말씀해 준다.
이사야 예언서에서는 성부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이 비길 데 없고 견줄 데 없는 압도적인 능력과 지혜의 신이심을 강조한다. 이런 선지자의 주장은 바벨론 포로 생활 속에서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지켜내지 못하고 제국 바벨론에 포로 되게 하신 일에 대한 불만과 ‘제국의 신들에 비하여 능력이 부족한 이가 아니신가’라는 의구심을 품고 있는 상황을 헤아리면서, 이 여호와의 비길 데 없는 절대 신이심을 강조하면 나온 증언이라서-, 이채롭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겪고 있는 민족적 불행(포로 생활)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 어떤 것인지를 전혀 헤아리지 못하고 지냈다. 그들은 다만 자신들의 불행과 고통에 대한 불만과 자탄과 원망에만 집중하였지만, 여호와는 그런 그들을 회개하게 하시면서 더욱 건강한 이스라엘의 출현과 함께, 당신은 그 기회에 바벨론을 포함한 온 제국과 세계 역사까지를 친히 주관하시며 그들의 신들까지도 제압하시는 능력의 주이심을 알리고자 하셨다.
복음서에서는 성자 예수님이 당시 하늘과 땅, 그 어느 한편에 치우쳐서 양쪽을 다 함께 보지 못하고 지내는 종교인들과 권력자들의 허점을 짚어주시면서, 당신이야말로 하늘과 땅 모두를 함께 지켜보시며 주관하시는 공의의 주이심을 증언하신 내용이다. 결국 당신의 빛을 받지 못하고 지내는 각 사람은 누구나 온갖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함도 일깨워 주신 것이다.
서신서에서는 성령 하나님께서 예수를 섬기고 좇는 교회 공동체에게 어떤 은혜와 선물을 안겨주려 하시는지를 사도 바울을 통하여 일깨워 준 곳이다. 교회의 진정한 힘은 성령이 전해주신 하나님을 아는 지혜와 계시를 받을 때이고, 그의 백성에게 베푸신 능력이 얼마나 큰가를 알며 살아갈 때이다. 동시에 각종 은사를 받은 성도들의 집단인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면서,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예수의 충만을 사실로 증언하는 공동체임도 전한다.
1. 예언서 / 사40:12-26 / ” 너희는 눈을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
본문의 배경은 이렇다. 곧 선지자는 유대인 일각에서 자기들은 전능하신 여호와의 백성임에도 이토록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어 장기간 타국 생활을 면치 못하고 고생하며 준(準)노예로 취급당하며 슬픔 속에 살아가게 된 일은, 결국 자기들이 믿어온 여호와가 자기들을 지켜낼 만큼의 능력을 갖지 못한 데에서 초래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는 일에 대하여, 매우 적극적으로 반론하며 ‘그게 아주 잘못된 신관(神觀)’에서 나온 것임을 해명한 내용이다.
여호와가 당신의 백성에게 이런 고난과 시련을 허락하신 까닭은 그 자신의 무능 때문이나 바벨론 신들의 강함 때문에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백성들을 바르게 회복케 하려는 마음과 이런 시련을 통하여 그의 백성을 온 세계 만민 속에서 보다 존귀한 백성으로 거듭나게 하시려는 연유 때문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이런 시련은 여호와의 무능력에 의한 것일 수 없고, 반대로 그의 절대적 능력과 완벽한 지혜의 탁월함의 산물이었음을 강조하였다.
본문은 그런 여호와의 그 누구와도,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이요 독보적이며 전적인 절대성과 창조성을 입증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 핵심 내용들을 다시 살펴 본다 :
1) 아무도 여호와를 지도하거나 가르친 자 없다.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고 교훈 받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에게 열방(列邦)은 통의 한 방울의 물과 같고 저울의 티끌 같다. 그 앞에는 모든 열방이 아무것도 아닐뿐더러, 그는 그들을 없는 것 같이, 빈 것 같이 여기실 뿐이다(12-17절).
2) 하나님은 누구와 같지도 않으시고, 그에게 비길 그 어떤 형상도 없다. 우상은 장인이 부어 만들었고 금으로 입혔고 은 사실로 만든 허상일 뿐이다. 사람도 그렇다. 땅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는 메뚜기 같다. 입김이며 속임수에 불과하다(시62:9 참조). 그는 귀인들을 폐하시며 사사들을 헛되게 하신다. 그들은 겨우 심기고 겨우 뿌려졌으며 그 줄기가 겨우 땅에 뿌리를 박았으나, 하나님이 입김을 부시니 그들은 곧 말라서 초개같이 날아갈 뿐이다. 그러기에 인간 누가 감히 여호와를 누구와 비교하며 여호와를 그와 동등하게 다룰 수 있겠는가(18-25절).
3) 그러기에 우리는 눈을 높이 들어 여호와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을 봐야 한다.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그들의 모든 이름을 부르시기에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시기에 하나도 그에게서 빠져나갈 수도 없다(26절),
2. 복음서 / 막12:13-17 / ”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 “
하나님의 그런 완벽하신 모습은 그가 보내신 아들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드러났다. 아주 작은 사례였지만, 현장의 시험자들 모두는 그의 생각과 판단의 놀라움 앞에 입을 닫고야 말았다. 예수님에게는 아주 당연하고 평범한 답변이었지만, 각종 편견과 의혹과 증오로 치우쳐 살던 적대자들(바리새인 & 헤롯당원)에게는 가히 상상을 불허하는 객관적 답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1) 바리새인 집단과 헤롯당 집단이 연합하여, 예수를 책잡으려고 연합 특사들을 예수께 보냈다(13절). 동기는 매우 불순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당시의 나사렛 예수의 모든 움직임이 그들양측 모두에게는 커다란 장애가 된 듯했다. 사실 그들 양측은 평시에는 서로 간에도 불편한 입장을 가진 집단이었다. 바리새인들은 헤롯당에게 로마 권력의 어용 세력 문제로 기피와 정죄의 대상이었고, 헤롯당도 바리새인에게 정치와 종교적 문제로 불편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서로 연합하고 교통하기에는 꺼리는 형편이었는데. 그럼에도 이날만은 그들이 하나가 된 매우 특별한 순간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함께 노상 진리를 말씀하며 백성들을 깨우고 계시는 예수님에 대하여 모두가 불편해하였음을 말해 준다(막3:6, 8:15 참조). 그러기에 연합해서라도 뭔가 빌미를 잡아서라도 예수를 제거하려고 했다(13-14절).
2) 전략은 양두구육(羊頭狗肉)의 방안이었다(14절). 양의 얼굴을 갖고 마음은 이리들의 것으로 무장해서 예수를 찾은 것이다. 접근은 매우 우호적이고 정중했다.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입니다’. 그런 후에 본격적인 낚싯바늘형 질문을 예수께 던졌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양자택일(兩者擇一)형 질문이었다. 평생을 한쪽만 의지하며 살아온 자기들 방식의 접근을 선보였다. 그러자 그들의 비루(鄙陋)함과 시험을 파악하신 예수께서 상황을 당신의 방식, 택일이 아닌 양자 모두를 함께 보는 방식으로 이렇게 풀어 주셨다(15절).
3) ‘로마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 명하신 후에, 예수께서 가져온 그들에게 물으셨다(16절).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에 ‘가이사의 것입니다’란 응답이 나왔다. 그러자 예수께서 간단명료한 한마디로 답하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17절). 답은 아주 간결한 것이었으나, 그 답이 준 충격은 엄청났다. 저들 시험자들 모두가 그의 답이 안고 있는 지혜와 위기를 떨치시는 탁월한 대응에 충격과 함께 놀라움에 빠지게 하셨기 때문이다.
4) 사실 이는 매우 당연한 것이었다. 한쪽만 보고 사는 사람이 양쪽 모두를 함께 보며 사는 사람을 상대하기란 원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누구신가? 처음과 나중을 함께 보시고, 있음과 없음을 함께 보시며, 지금과 나중을 함께 보시고, 땅과 하늘을 함께 보시기 때문이다. 이곳과 저곳도 함께 보시며, 동과 서도, 강과 약도, 나와 너도 함께 보시는 분이시다. 그러니 어찌 인간이 하나님을 상대할 수 있겠는가? 대체 이 과제를 어떻게 극복할 건가?
3. 서신서 / 엡1:15-23 / ”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
사도 바울은 그 과제 해결을 성령이 세우신 하나님 백성의 집합체인 교회를 통하여 하셨다고 본문을 통하여 밝힌다. 한계가 분명한 개인 차원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역사하는 교회를 통해서는 하늘의 능력과 지혜를 맛볼 수 있기에 가능함을 강조한다. 교회에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령으로 내려주신 지혜가 있고, 크신 능력이 현존하기에 인간 개인이 못 가진 초월적 능력을 경험하며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15-21절).
무엇보다도 하나님은 만물(萬物)을 당신 아들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고, 그런 그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22절). 예수를, 만물을 다스리실 지식의 보고인 교회 머리로 삼으신 것이다. 그뿐 아니다. 교회를 그의 몸으로도 삼으셨다. 모든 은사와 기능과 두뇌와 힘들이 모아진 집합체가 몸이다. 그래서 몸은 모든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을 드러낸다. 이는 개인 영역에서는 실현 불가능하지만, 오직 서로 사랑하고 돌보며 협력하고 상부상조하여 자신뿐 아니라 모두를 충만하고 풍성하게 하는 빛과 생명 공동체인 교회로는 가능한 까닭이다(23절).
o 삶이 고단하고 힘겨운가? 문제들이 버거워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해 보았는가? 기도했음에도 응답받지 못하여 시험에 빠져든 적도 있는가? 그렇다면, 이제 본 말씀을 의지하여 다시 눈을 높이 들어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바라보고 구하자. 원인은 나의 부족함에서이지, 하나님의 모자람 때문이 아님을 믿고 다시 엎드리자. 하나님은 좋으신 분이며, 믿고 의지하는 자를 일으켜 주시는 분이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알면 아는 만큼 복을 받게 되는 그 분이시다.